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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4일(주일) 마가복음 10:32~45 으뜸이 되려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
세상에서 사람들은 으뜸이 되려고 합니다. 으뜸이 되려고 공부도 하고, 스펙도 쌓고, 열심히 일하며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으뜸이 되려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본문에 대한 이해
본문 32~34절에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예고가 제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예루살렘에서 받으실 고난에 대해 세 번째로 말씀하시는데도, 35~40절에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42~45절을 통해 “나의 마시는 잔과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43,44절)고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고 친히 순종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2. 으뜸이 되고자 하는 제자들(35~40절) 예수님이 세 번째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실 것을 말씀하시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37절)라고 놀라운 청탁을 합니다. 세 차례의 수난 예고 후에 이러한 청탁을 예수님께 했다고 하는 것은 영적 무지의 깊이를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들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의 의미를 얼마나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은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38절)고 질문하신다. 여기서 말씀하신 ‘내가 마시는 잔, 내가 받는 세례’는 어떤 의미입니까? ‘잔’이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주로 ‘고난’을 상징합니다(시75:8). 또한 ‘세례’는 물에 잠기는 이미지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 청탁을 하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으로 부터 처음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며 수제자 베드로와 더불어 특히 예수님의 신임을 받은 제자였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주께서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실 때에도(막5:37), 변화산상에서 주님께서 변형되실 때(막9:2~8)에도 함께 있었습니다. 또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막16:1)는 마리아와 자매간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혈육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이종사촌지간이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이들 두 제자들이 예수께 부탁한 것은 왕의 우편과 좌편이라는 영광스럽고 가장 권세있는 높은 자리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을 기존의 모든 왕권들을 무너뜨리시고 영광스러운 왕의 보좌에 앉는 것으로 잔뜩 기대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각별한 관심을 오해하여 자신들이 다른 제자들보다 특별히 잘난 것으로 착각하고, 예루살렘에 이르기 전에 자신의 위상을 확실히 해두고 싶은 헛된 야망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때 야고보 형제는 그들이 구한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좌우편은 두 강도가 달린 십자가의 자리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바라보면서 나아가고 계시는데, 저들은 오직 ‘왕의 보좌 좌우편 자리’에만 눈독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38절에 “너희는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도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41절에 세베대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을 알게 된 나머지 제자들이 이를 듣고 분개합니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분개한 이유는 자신들도 차지하고 싶었던 자리를 그들이 선점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보면 나머지 열 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야망에 붙들려 있었음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민일보/겨자씨>에 이런 글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유명 지도자인 ‘론 새니’가 한 젊은이에게 제자훈련을 시켰습니다. 그 젊은이는 ‘섬김의 종’에 대한 훈련을 마친 뒤 스승에게 ‘섬김의 종으로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론 새니는 이렇게 그 젊은이에게 대답했습니다. “섬김의 종으로 산다는 것을 지금은 모르지. 제자훈련 교육을 받으면 다 ‘섬김의 종’이 되었다고 고백한다네. 그러나 섬김의 종은 현장에서 사람들로부터 ‘종 취급’을 당할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네. 만약 그가 그 상황 속에서 화를 낸다면 아직 섬김의 종이 되지 못한 것이야. 기꺼이 당하겠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이제 섬김의 종이 된 것이겠지.”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섬김의 종이 되려면 우월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월한 자리, 높은 자리, 군림하는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큰 자로 살기 원한다면 이 땅에서 섬김의 종으로 봉사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
적용) 나는 지금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물질과 명예와 높은 자리를 얻고자 부르짖습니까?
3. 예수님의 가르침~ 겸손과 섬김을 실천하라(42~45)
42절에서 45절에 보면 이렇게 한심한 제자들을 향해 화내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모으시고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인내하며 가르치십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자기 야망을 위해 자기 힘을 발휘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의 가치체계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뒤집는 역설의 가르치심을 제자들에게 주고 계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43절), 라고 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에서 ‘누구든지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할 것이라’(43,44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궁극적인 ‘종과 섬김’의 본보기로 자신을 제시하십니다. 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왕이신 메시야로 오셨지만, 천군만마를 타고 오시지 않으시고, 스가랴서에 나귀새끼를 타고 오실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예수님은 왕이시면서 또한 종이신 메시야의 영광과 고난을 동시에 예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으뜸이 되려면 세상의 야망을 버리고 자신의 겸손과 섬김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최고의 겸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빌립보서 2:5-8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본문 45절에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는 말씀에서 “대속물”(헬라어,‘뤼트론’,λ?τρον)이라는 단어는 “푼다”(헬라어,‘루오’,λ?ω,to release, untie, unbind)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포로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속전(贖錢)을 지불하고 포로나 노예에서 ‘풀어준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주셨다”는 것은 죄와 죽음의 노예상태에 있는 인류를 자유로운 생명으로 풀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사53:6).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은 죽으리라(창2:17)는 법을 정하셨습니다(롬 6:23). 범죄한 인간이 살 수 있는 길은 죄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신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한 것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어 섬기시는 삶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제1세기에는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했습니다. 너무나 초라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학문도 집안 배경도 없는 목수의 아들이 그나마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맥없이 죽었으니 그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미련하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 초라함, 그 약함, 그 땀과 눈물과 피, 홍포에 쌓인 패배자 같은 그 예수가 곧 자기를 비우신 하나님, 낮은 데로 내려오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를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53:2-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으로 우리가 구원받게 됨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잘 가르쳐 ‘로마의 장군’이나 ‘국회의원격인 원로원 의원’으로 진출시키거나, ‘식민지 관료’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나 의회기관인 ‘산헤드린의 공회원’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에게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말씀은, 베드로가 네가 장차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요21:19)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이루지 못한 굴지의 재벌이 되거나 세계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가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저 높은 곳을 향하셨다면, 굳이 그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죄와 저주와 심판을 친히 담당하시고자 고통과 저주와 죽음의 십자가의 길을 친히 가신 것입니다.
국민일보에 이런 글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천재로 불리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항상 오르막길이었습니다. 그는 주위의 기대대로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됐습니다. 그가 집필한 30여권의 책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됐고,그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오직 성공과 성취로 장식됐습니다. 어느날 이 사람이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나는 교수직을 포기합니다. 이제 나는 정박아시설에 들어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선언을 하는 그 교수에게 의아해 하면서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쌓아놓은 그 많은 명예와 보수를 왜 버리려고 하십니까? 정박아 시설이 아니라 차라리 후학을 양성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질문에 그 교수를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의 오르막길 인생은 성공과 세상의 칭찬에 가려 예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낮은 곳으로 가서 예수를 만날려고 합니다” 그는 인생의 말년을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정박아시설에서 장애인들의 용변, 식사, 목욕 등 구질구질한 일을 하는데 보내고 조용히 소천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책인 ‘상처입은 치유자’의 저자인 ‘헨리 나우웬’입니다. 인생의 오르막길에서는 예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고통과 눈물의 돌자갈이 깔린 곳에 바로 예수의 미소가 있습니다. 꼭대기 인생은 추락의 위험성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늘 낮은 곳에 거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 적용 어떻게 살아갈까?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을 실천하려면 내 기도내용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구하고 있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6:33)는 말씀을 되새겨보면서 나의 기도제목과 인생관을 점검해야 합니다. 나의 기도는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내가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하는 것인가? 높이 올라가는 것에 주님께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인가? 내가 주님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내가 높이 올라가는 데 그 분의 힘과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인가? 내가 더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내가 더 건강해져야 하고, 내가 또 남들에게 더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에 주님이 필요하다면 오늘 우리의 기도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이 필요한 것은 그분의 겸손과 섬김을 배우고자 함임을 또한 우리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을 어떻게 내 삶 속에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겸손과 섬김은 함께 갑니다. 교만한 자는 섬김을 받으려 하지 남을 결코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섬김의 필수조건입니다. 섬기는 자는 반드시 겸손해야 합니다. 섬기는 자는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청지기는 내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섬기는 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물질과 힘으로 다른 사람을 힘 있게 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이라는 찬양을 요즘 자주 듣고 부르고 있는데요. 거기에 보면 “주님 제 마음이 너무 둔해서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땅에 속하여 이땅만 보다가 주님 손을 놓쳤습니다. 나는 나그네로 왔는데 왜 주저앉게 되었나 나는 청지기인데 언제부터 내 삶에 주인이 되어 버렸나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고된 수고도 다헛될 뿐이라 믿음이 없어서 무너진 삶의 모든 자리에 다시 주님을 기다립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주를 찾는자 반드시 만나리 믿음이 없어서 무너진 삶의 모든자리에 다시 주님을 기다립니다” 섬기는 자는 나를 만나는 자들에게 ‘힘을 북돋아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 청지기 의식을 갖고 내가 먼저 십자가를 지고, 내가 먼저 섬겨야 합니다. 그럴 때 참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군림이 아니라 섬김이 영광의 길입니다.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설교 중에서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 가정의 표어 가운데는 “봉사하기 위하여 구원받았다”(Saved to serve)란 말이 있습니다. 섬김을 모르는 삶은 ‘구원의 감격이 없는 삶’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고침’받은 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일어난 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섬기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 주신 사명입니다. 어떤 이는 “인생은 테니스 경기와 같다. 서브(섬김)를 잘 하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서브는 테니스 경기의 승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테크닉입니다. 서브 하나로 많은 점수를 거둬들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브(섬김)를 잘 해야 합니다. 성공적인 인생은 섬김을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서브(섬김, 예배), 사람에 대한 서브(섬김, 봉사)를 잘 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서브(섬김)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잘 섬기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입니다. 잘 섬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입니다. 잘 섬기는 사람이 으뜸이 되는 사람입니다. 잘 섬기는 사람이 큰 자입니다. 인생의 성패는 얼마나 서브를 잘 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작게 가신 사람을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마시고 어깨 높이를 낮추어 함께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과 단점을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 위에 군림하려 하거나 공갈을 그치고 자신의 상전이 하늘에 계신 것을 깨닫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엡 6:9)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악입니다.” 크고자 하십니까? 으뜸이 되고자 하십니까? 섬기는 자가 되시고 모든 사람의 종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을 섬기며 사는 삶으로 하나님께서 지극히 영광스럽게 높이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늘 으뜸이 되기를 구했기에 초라하고 능력 없어 보이는 십자가를 외면해온 비천한 인생입니다. 이런 저를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고 친히 순종의 본은 보이신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저도 예수님을 따라 구원을 위해서 겸손히 섬기게 하옵소서. 주님, 이 땅에서 자리 다툼하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써 인내하며 잘 참고 견디며 잘 죽어지게 하옵소서. 그것이 으뜸이 되고, 큰 자가 되는 길임을 늘 기억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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