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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드니 성당 (Basilique de St-Denis)
파리의 북부에 '생드니 바실리카'라는 13호선 지하철 역이 있다. 이곳은 파리의 교외 중에서도
저소득층이 주로 거주하는 곳이다. 아랍인과 흑인이 많으며, 중국인을 비롯한 황인종도 볼 수 있다.
파리의 경찰관이 총을 쏘고 누가 죽었다는 기사가 나왔다하면 바로 이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이곳에 볼 것이 하나 있다. 그것도 프랑스 역사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유적이 있다.
사르트르와 아미앵, 그리고 랭스의 대성당들과 함께 12세기 프랑스 고딕 양식의 성당을 대표하는
생드니 성당으로, 프랑스 역대 왕들의 무덤성당으로 유명하다.
단아한 모습의 생드니 성당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왼쪽문 부조
우선, 생드니(Saint Denis)에 대하여 알아보자.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 정면의 3개 문 가운데서 왼쪽에 있는 문 위에, 자신의 목을 들고
두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는 부조가 있다. 이 분이 바로 프랑스 파리의 초대 주교로 알려진
생드니(Saint Denis), 즉 드니 성자이다. 그는 파리가,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던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서기 250년경에 몽마르트 언덕에서 참수형을 당한 것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드니 성자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기 63년 전에 처형된 것이다.
몽마르트르는 ‘순교자의 산’이라는 뜻으로 순교자 생드니 주교의 전설에 의해 명명되었다.
당시는 파리 교외였던 몽마르트 언덕에서 망나니의 칼에 목이 잘린 드니 성자는,
자신의 목을 들고 북쪽으로 6km쯤 걸어가 생드니 마을에 머리를 내려놓고 누웠다. 사람들이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들어 드렸는데, 기독교가 공인되고 475년 경 드니의 무덤 위에 성당이 세워졌다.
그후 627년 메르빙고 왕조의 마지막 왕 다고베르트 1세가 그곳에 수도원도 세웠다.
(1) 최초의 고딕 건축물
생드니 성당의 외부 생드니 성당의 내부
다시 정리하면, 3세기 경 드니성자가 참수형을 당했고, 475년 무덤 위에 성당이 건립되었다.
627년 다고베르트 1세 때에 수도원도 세워져 이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점차 발달했다.
그후 수도원장 쉬제르(Abbe Suger 1136~1147년 재임))신부가 카롤링거 제국시대(751~987)의
옛 성당 일부를 합쳐 장미모양의 원형 창문을 구비한, 문이 세 개인 성당을
'버팀벽 날개공법(Flying Butteress)'으로 세우면서 최초의 고딕양식의 탄생을 알렸다.
그리고 여러 차례의 개축과 증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쉬제르 원장에 의하여 생드니로 소집된 건축가, 조각가, 스테인드글라스 공인(工人)들은
나중에 사르트르 대성당 건조에도 여러 작품을 남겼다.
중앙문
서쪽 파사드의 중앙문
중앙문 팀파눔의 '최후의 심판'
청동문에는 예수의 일생이 새겨졌다
오른쪽 문
왼쪽 문
왼쪽문 팀파눔
(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성드니의 행렬'
'성드니의 행렬'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신자들(부분)
성당의 북쪽문
잘린 머리를 들고 있는 생드니
성당의 남쪽문
성당의 나무문에도 왕가의 백합 문장이 있다
(2) 장미창과 스테인드글라스
12세기 쉬제르 신부는 생드니 대성당 건축에 관한 기록에서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새로운 스테인드글라스는 그 경이로움과 다채로움을 통하여 우리를
물질적인 세계로부터 영적인 세계로 인도한다."
장미창 외부
장미창 내부
생드니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서 빛이 들어오도록 한 최초의
고딕 건축물로 유명하다. 실내가 무척 어두워서 답답하다는 느낌은 들지만
이래야 스테인드글라스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여진다고 한다.
스타인드글라스의 그림은 성인들이 어떻게 하느님을 섬겼는지, 또 사도들이
어떻게 순교했는지를 아름다운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左) 예수의 어린 시절 / (右) 예수의 가계도를 표현한 '이새 나무'
(3) 왕과 왕비의 무덤
9세기에 생드니 수도원의 사본 삽화와 금공예 아틀리에는 유명하였지만,
이 수도원이 융성한 것은 쉬제르(Abbe Suger)원장 시대 이후이며, 성왕 루이 9세시대인
1263~64년에는 프랑스 역대 왕의 무덤이 수용되어서 왕실수도원이 되었다.
메로빙거 왕조(500~751)와 카페 왕조(987~1328)의 몇몇 왕들을 제외하고는
다고베르 1세(629~639 재위)부터 루이 18세(1814~24 재위)에 이르기까지 1,200년 동안의
모든 프랑스 왕들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척들과 수많은 뛰어난 신하들까지 이 성당에 묻혔다.
프랑스 혁명 중 그 무덤들이 파헤쳐지고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나중에 이 성당으로 다시 모아져
지금은 프랑스의 유명한 장례 조각 전시회장이 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무덤들은 정교하고 사치스런 장식을 했다.
대부분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무덤들은 위층에 대례복 차림으로 무릎을 꿇은
왕과 왕비의 조상이 있고 그 아래층에는 맨발 벗은 시신을 안치했다.
루이 12세(1462~1515)
1498~1515재위
루이 12세와 안 드 브르타뉴(1476~1514)의 묘
'국민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은 루이 12세는
상비군제도의 정비, 도로 건설, 농민 보호 등에 힘을 썼으며
많은 외국 학자와 문인들을 불러들여 프랑스 르네상스의 길을 열었다.
프랑수아 1세(1494~1547)
1515~1547 재위
프랑수아 1세와 클로드 드 프랑스(1499~1524) 왕비의 묘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며
그의 치세에 프랑스는 거대한 문화적 진보를 이룩해, 앙리 4세와 더불어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왕이다.
프랑수아가 왕위에 올랐을 때 프랑스는 르네상스기를 막 맞이하고 있었고,
프랑수아는 변화의 중요한 지지자가 됐다. 프랑수아는 예술의 주요한 후원자였다.
그는 훌륭한 예술가들을 많이 후원해주었고 그들이 프랑스에 오도록 장려했다.
그를 위해 일하고자 안드레아 델 사르토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온 것이 좋은 예다.
특히 레오나르도는 프랑스에 있는 동안 모나리자 등의,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앙리 2세(1519~1559)
1547~1559재위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치(1519~1589)의 묘
앙리 2세는 전쟁을 벌여 영토를 늘리는 데 공헌하고, 행정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지만,
신교 세력을 극심하게 탄압해 프랑스에 내전을 불러오기도 했다.
'검은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s)!
그녀는 남편인 앙리 2세가 마상 시합을 하다가 상대방의 창이 눈을 관통하는 바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나자, 영원히 복상한다는 뜻으로 더 이상 비단 옷을 입지 않고
늘 검정색의 옷을 입어 "검은 왕비"라고 불리웠다. 프랑스 왕을 지낸 세 아들의 황태후로
무려 30년 동안이나 섭정을 했던 그녀의 동상은 화려함과 도도함이 느껴진다.
한 시절 프랑스의 절대 권력자였던 카트린 드 메디치는 1589년 1월 5일 숨을 거뒀다.
그녀는 남편인 앙리 2세의 곁에 묻히고 싶어했지만, 교회 밑바닥에 방치되어 묻혔다가
20년이 지난 후에야 생드니 성당의 앙리 2세 곁에 묻힐 수 있었다
앙리 4세 (1553~1610)
1589~1610 재위
낭트 칙령을 발표해 30여년 동안 계속된 위그노 전쟁을 끝낸 것으로 유명하며,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는 왕국의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일요일이면 닭고기를 먹게 하겠다'
라는 모토를 내세우며 프랑스의 전후처리까지 끝낸 인물이다.
앙리 4세가 남긴 말 한 마디 덕분에, 현재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은 닭이 되어 있다.
2010년12월 15일, 파리 AP통신은 민간인 수집가가 가지고 있던
앙리4세의 유골이 400년만에 주인을 찾게됐다고 전했다.
영국 의학전문지 브리티시메디컬저널에 따르면 프랑스 레몽 푸렝카레 대학병원 법의학 연구팀은
머리 유골이 감식 결과 앙리 4세임을 확인해줬다고 보도했다.
앙리 4세는 카톨릭국가였던 프랑스에서 신교의 자유를 인정한 군주로 민생과 경제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겨 프랑스 내에서 성군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신교를 인정했다는 이유로 1610년 카톨릭근본주의자에게 암살되어 왕실 묘에 안장됐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1793년에 군중들에 의해
파리 북부 생드니 성당의 왕실묘지를 훼손하는 과정에 머리가 잘린 뒤 버려졌다.
이후 머리 유골은 민간인 손에 거래되다 미술품 수집가의 수집품 속에서 발견됐다.
연구팀은 머리 유골을 왕의 초상화와 대조하는 감식작업을 펼친 결과
오른쪽 콧구멍 위의 11mm 길이 짙은 상흔과 귀고리 자국, 방부처리에 쓰인 유향도
그의 사망시 쓰이던 기술과 일치했다고 밝혔다. 한편 유골이 여러 수집가의 손을 거치면서
많이 오염된 탓에 DNA 검사는 이뤄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루이 14세 (1638~1715)
1643~1715 재위
'태양왕'이라 불렸던 부르봉왕조 전성기의 왕으로
"짐(朕)은 곧 국가이다" 라고 할만큼 절대주의 시대의 대표적 전제군주였다.
루이 14세의 무덤
루이 14세는 5살이 채 안돼 왕위를 계승하여 1715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절대군주였던 그의 시신은 대중의 비웃음을 받는 가운데 생드니에 묻혔다.
루이 14세가 임종시 후계자에게 남겼다는 말:
"내가 했던 실책을 따르지 말라. 나는 너무 가볍게 전쟁에 임했고 때로는
허영심으로 전쟁을 계속하기도 했다. 나의 전철을 본받지 말고, 평화를 사랑하는 군주가 되라.
그리하여 자신의 정책이 국민의 부담을 경감하는데 치중하게 하라."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상반됨:
볼테르의 말-- "그의 이름은 존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그리고
영원히 기억될 시대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입에 올릴 수가 없다."
루이 15세 (1710~1774)
1715~1774 재위루이 14세의 증손자. 5살에 왕이 됨.
대관식 복장의 루이15세 갑옷을 입은 루이15세
1751년, 반 루作
'친애왕'으로 불리는 루이 15세는 1774년 5월 10일 천연두에 걸려
증조부인 '루이 14세' 만큼 국민들에게 미움을 받은채 64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루이 16세(1754~1793)
1774~1793 재위
비운의 황제 루이 16세와 합스부르크왕가의 딸 마리 앙뚜아네트(1755~1793)의 조각상은
특이하게 누워있는 자세가 아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되어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에 통치한 부르봉 왕가 출신의 왕들 가운데 마지막 사람이었다.
왕정은 1792년 9월 21일에 무너졌으며 그후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반(反)혁명죄로 처형당했다.
혁명 후 루이 18세(루이 16세의 동생)가 왕위에 오르자 형과 형수의 유해를 찾아서
생드니 대성당에 왕실 무덤으로 만들어 주었다.
루이 17세 (1785~1795)
1793~1795재위 / 프랑스의 명목상 군주
루이 14세와 마리 앙뚜아네트의 둘째 아들
2004년 검사를 통해서 진짜로 밝혀진 루이 17세의 심장
프랑스 혁명(1789년)으로 감옥에서 죽은 루이 17세(10살)의 절여진 심장이
유전학적 검증을 거친후, 다음 주에 파리 북쪽에 있는 생드니 성당에 안치될 예정이다.
-2004년 6월 4일. Ap 통신-
DNA로 풀린 200년 미스터리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의 왕들 가운데 루이 17세만큼 비운의 인물도 없다.
부모인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대혁명의 열기 속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외국으로 도피한 프랑스의 귀족들에 의해 루이 17세로 추대됐지만 이름뿐인 왕이었다.
루이 17세는 간신히 처형을 면했지만 독방에 갇혔다가 2년 뒤 한맺힌 생을 마감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10살이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기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는 200년간 숱한 미스터리의 소재가 됐다.
“그가 가까스로 감옥에서 탈출했다”거나 “독살당했다” “죽은 소년은 루이 17세가 아니라 그와 닮은 대역이었다”는 등
풍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의 사후 수십 년 동안 자신이 루이 17세라고 주장한 사람만 30명이 넘었을 정도였다.
그가 남긴 유일한 것은 심장이었다. 검시 의사가 죽은 왕족의 심장을 분리해 보관하는 게 당시 프랑스 왕실의
전통이었다. 루이 17세의 심장은 그의 삶만큼이나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때 검시 의사의 조수가 심장을 훔쳤다가
다시 돌려주었고, 왕정이 회복된 후 루이 17세의 삼촌인 루이 18세에게 넘겨졌지만
그가 이를 외면하는 바람에 파리 대주교가 대신 보관하게 됐다.
1830년 7월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루이 17세의 심장은 다시 수난을 겪는다. 일부 폭도들에 의해
성당이 약탈당하는 과정에서, 땅에 떨어지는 바람에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이다. 가까스로 수거된 심장조각은
이후 프랑스 왕족이 넘겨받아 보관해 오다 1975년에야 왕가묘소에 기증됐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닌 기구한 운명의 이 심장이 루이 17세의 것이 맞는지를 놓고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급기야 이 심장의 DNA와 오스트리아에 보관돼온 어머니 앙투아네트의 어릴 적 머리카락의 DNA를 비교해
친자여부를 확인하는 DNA 분석까지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이 검사를 수행한 벨기에 루뱅대학의 장 자크 카시망 교수와 독일 뮌스터대학의 에른스트 브리크만 교수는
2000년 4월20일(현지시간 19일) “루이 17세의 심장이 맞다”고 발표해 오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오랜 풍파를 거치면서 돌처럼 딱딱해진 루이 17세의 심장은 수정병에 넣어져 2004년 6월8일
파리 교외에 있는 생드니 성당의 부모 묘소 옆에 안치됐다. 미스터리는 풀렸고, ‘잃어버린 황태자’로
죽어서도 기구하게 떠돌던 그도 안식을 찾았다. 숨진 지 209년 만이었다.
루이 18세 (1755~1824)
1795년에 왕이 되었으나 이름뿐이었고 실권을 잡은 것은 1814~24년이다.
또 나폴레옹이 다시 정권을 잡은 백일천하(百日天下) 기간에 잠시 지위를 잃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1793년 왕과 왕비가 처형당하자
스스로를 조카인 왕세자 루이 샤를의 섭정으로 선포했으며, 1795년 혁명 정부에 의해 유폐당한
루이 16세의 아들 루이 샤를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루이 샤를을 루이 17세라고 칭하며,
자신을 루이 18세라고 선언하였다.
1814년, 나폴레옹 1세가 대(對)프랑스 동맹군에 의해 쫓겨나고 이후 빈 회의에서 여러 나라로부터
부르봉 왕가의 복귀가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프랑스로 돌아와 왕으로 즉위하였다.
다만 당초엔 연합국으로부터 생사가 확실치 않은 루이 17세의 섭정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2년간은 명목상의 왕으로 취급되었다. 나폴레옹 1세가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루이 18세는 다시 프랑스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복귀가 백일천하로 끝나면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즉위하여 친정을 실시하였다.
루이 18세는 “나는 혁명 당시의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고, 혁명 전의 아무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클로비스 1세(466년경~511)
클로비스 1세가 세운 프랑크 왕국(프랑스의 전신)은 중세 초기에 서유럽의 대부분 지역을 지배했다.
그는 로마인이 아닌 이방인 왕으로는 처음으로 랭스의 대주교 레미기우스에게 세례를 받고
로마 가톨릭교도가 되었다.
클로비스는 말년에 2가지 의미 있는 행동을 했다.
첫번째는 오를레앙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한 것이었는데, 이 회의에는 32명의 주교가 참석했다.
여기서 결정된 교회법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데, 이것을 보면 왕이 교회법 심의에
개인적으로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2번째는 그의 권위를 인정한 잘리어 프랑크족의 법률인 잘리카(살리카) 법전을 공포한
것이었다. 이 법전은 시골 생활을 규제하는 65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 조항들은 프랑크족이 자신의 생활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엄격한 법률 문서라기보다는 정치적 선언문이다.
발바닥을 보이며 맨발로 영면하고 있는 왕후 귀족들
황금관 속의 주인공은?
왕관과 왕의 홀-성당 안에 보관되어 있다
루이 18세 대관식 때의 왕관
(4) 생드니의 무덤
지하 묘소 입구
생드니가 잘린 머리를 들고 와서 사망한 곳
지하실에 있는 생드니의 무덤
'생드니의 순교' - 루브르 박물관
(5) 가고일 Gargoyle
가고일Gargoyle은 건축물의 지붕 바로 밑부분에 사람이나
괴이한 동물 모양으로 돌출 조각된 낙수물받이를 말한다. 지붕으로부터 흘러내린
빗물을 내보내는 기능을 하며, 중세 고딕 건축물에 흔히 사용되었다.
대개의 성당 가고일은 사람이면 사람, 기이한 동물이면 동물, 하나씩으로 되어 있는데
생드니 성당의 가고일은 동물과 사람이 3중으로 포개어져 있다.
(6) 생드니 개선문 (Ard de triomphe de la St. Denis)
파리에는 에뚜알 광장의 개선문 말고도 2개의 개선문이 더 있다.
그 중 하나가 생드니 개선문이다. 1674년 루이 14세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에뚜알 광장의 개선문도 이를 토대로 만들었다.
개선문의 아치 위에는 루이 14세가 정복한 네델란드 마스트리히트 땅에 발을 내딛는
아름다운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300여년 후 그땅에서 하나의 유럽을 위한 자발적 움직임인
유럽연합(EU) 창설 조약이 체결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펼쳐졌다.
프랑스 왕들이 파리의 북부 생드니 성당에서 종교의식을 마친 뒤
파리로 돌아오는 관문이었으며, 1816년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의 군대가
파리에 입성할 당시 통과한 문이기도 하다.
바실리카 영어-basilica
[역사] 고대 로마에서 재판소나 상업 회의소 등으로 사용되었던, 직사각형의 집회소.
정면에는 높은 제단이 있고 중앙에는 채광용(採光用) 네이브(nave)가 있으며
그 좌우는 측랑(側廊)으로 구성되었다.
*
[역사] 바실리카 양식의 초기 기독교 교회. 후에 로마네스크 및 고딕 건축 양식의 기초가 되었다.
[천주] 교황으로부터 특권을 받아 일반 성당보다 격(格)이 높은 성당.
(2)
[책명] 9세기 말에 동로마 제국의 바실레이오스 1세와 그의 아들 레오 6세가 편찬한 법전.
《로마법 대전》의 요약서와 주해서를 자료로 하여 그리스 말로 편찬되었으며,
후세 동방 여러 나라의 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모두 60권이다.
첫댓글 생드니 성당에는 프랑스의 간추린 역사가 잠겨 있네요.
단순한 하나의 성당이 아니라 간이 중세 역사 교과서이자,
프랑스 건축 미학의 박물관.
이런 정도이면, 종교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성당을 다시 보게 되는 좋은 시각을 제공한 것이지요?
브라보, 어차피 성당은 중세 유럽의 역사 그 자체이니--.
좋은 공부입니다.
이 정도의 파우워는 갖추어야, 비로소 르포르따주가 되겠군요.
이민혜 님, 수고가 너무 많았습니다.
파리 왕정의 역사와 함께 생드니성당에 대한 상세한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프랑스어 가사 가곡을 배우다가 프랑스어를 좀 공부했고 최근 그만 뒀는데
이선생님 덕분에 다시 포부가 생겼습니다. 좋은 정보와 글에 감사드립니다.
프랑스어를 공부하신다니 그 학구열에 찬사를 보냅니다.
프랑스 역대 왕들의 무덤성당으로 유명한, 생드니성당을 소개하면서
무덤 속에 있는 인물의 사진까지 찾아 올리는 극성을 부렸습니다.
감사합니다.
Tosti의 가곡 Chanson de L'adieu(이별의 노래)가 불어 가사이고, 불러보고 싶어서
가사를 제대로 발음해야겠기에 몇달 공부했는데 재미있고도 힘들고도.. 그렇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