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카톨릭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받기 위하여 모인 교구 신도들에게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시대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합창과 현란한 손짓과 몸짓 방언과 예언, 무의미한 강단초청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지지하는 방언과 교회에서의 예언의 은사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우리시대 공예배가 ‘추구자의 구미에 맞는 형태로’ 변화되는 것에서는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싶다. 아래 침묵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분에 있어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면 기도원에서 뜨겁게 부르짖는 기도나 열정적인 찬양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구약성경의 다윗의 실례를 드셨는데... 그것이 어떤 열심이며, 다윗에 대한 그 성경구절이 오늘날 우리공예배의 요소와 환경을 정당화 시켜 주느냐고 반문해보고 싶다. 침묵님은 개혁주의 공예배를 이끌 책임과 의무가 있는 고신의 목사가 아닌지? 예배란? 최재호기자의 언급처럼 ‘창조주의 영광을 바라보는 피조물의 반응’으로 예배도 신앙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규정될 수 없는 것으로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닌 것입니다. 이번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우리가 예배에 대해서 묵상해 본 바로는 하나님의 초월적 영광이 이 예배를 이끌고, 하나님의 뜻이 예배를 명한다는 사실에 주목 한 것인데, 오늘날 우리시대 교회, 고신교회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예배, 자신을 위한 예배에 몰입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것도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년부흥회, 헌신예배, 장례예배, 추도예배, 목적이 이끄는 각종예배들.... 난립하는 예배들 속에 창조주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나? 오늘날 우리는 ‘언약의 하나님’ ‘구원 역사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고하고 그 의미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있는가? 또 다른 목적이 우선하고 있지는 않는지 묻고 싶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 34:14) 하나님은 다른 존재와 예배를 나누려고 하지 않는 오직 상천하지에 한분 뿐이신 하나님이다. 오늘날 공예배가 각종 이벤트로 행사로 자신의 구미에 맞게 재단되어가는 것을 볼 때 분노를 느낀다. 우리를 향한 계명이 아니던가? 영적 이스라엘은 다른 어떤 방법도 아닌 하나님이 명하신 방법대로 예배를 드려한다.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서는 예배의 원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의 방법은 하나님 자신이 제정하시고 그분이 계시하신 뜻에 의하여 제한된다. 인간의 상상이나 생각 혹은 사단의 제안에 의하여 만들어지니 어떤 시각적 표현, 혹은 성경이 규정하지 않은 다를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도록 하신다.” 이 예배의 원리와 이것을 적용하는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 되는 우리의 신앙양심이 배치되지 않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공예배를 바르게 판단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오직 십자가에서 성취된 그의 '구속과 희생'이 새언약의 예배,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의 중심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 이산(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성전에서도 아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는 의미 속에 잘 나타나 있지 않나? 거듭 말씀참 예배 속에는 삼위 하나님의 영광이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의 예배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장소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예루살렘을 성취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점증하는 반감과 분노도... 예배의 자유를 이해하기위해서는 예배의 요소들(말씀선포, 기도, 찬양)과 거기에 수반되는 환경의 구분이 중요합니다. 악기를 사용하거나 춤을 추는 것은 예배의 요소가 되지 않습니다. 환경이 예배를 이끌는지않는다. 조지 휫필드는 장례예배시 집단적 통곡이 예배의 요소로 도입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똑같은 원리가 춤과 악기사용에 적용된다. 오늘날 우리는 유명한 목사 개그맨을 초청하여 강단을 무대로 선포를 오락으로 꾸미고 있는 개탄스러운 광경을 본다. 성공하지 못하면 부흥하지 못하면 더이상 교회로 존재할 수도 주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거짓 부흥과 논리앞에 자신들의 영혼을 팔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의 대체한 빛나는 전리품앞에 어쩔 줄을 모른다. 이것이 오늘날 고신교회, 개혁주의 교회를 표방하는 교회들에서 널리 유행하는 예배의 모습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사무엘하와 시편 149편 150편, 다윗의 춤에는 악기가 동반되어 있다. 신약의 예배와 관련해서 어디에도 없는 시편기자와 다윗의 모범이 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의 요소를 결정해 준다고 결론지어야 하나? 문화적 환경이 예배의 요소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 시편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와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우리시대 예배가 진정으로 메마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언약과, 구속사역속에 잘 나타난다. 성도와 교회, 그 공예배의 회복을 위해서 우리 예배를 말씀에 비춰 돌이켜 보아야 할 때이다. 아울러 개혁자들의 유산을 성경에 비춰 바르게 살펴보길 소원한다. 안식일의 진정한의미 주일의 참된 의미를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 그 영광에 참여함을 통해 누리게 될것이다. |
출처: 善祐 - 선한 도우심 원문보기 글쓴이: 박선우
첫댓글 언젠가 저도 다윗에 대한 그 구절로 공예배를 설명하는 사람들을 보고 참으로 한심했었는데.......일반적인 목사님들이 그렇게 성경해석을 하시죠.....
전체적인 내용에 공감 합니다.이런 지극히 당연한 내용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목사님들이 대다수니, 그들의 눈과 귀는 어디에 있는가? 신학교는 뭐하는 곳인가.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테스트 해서 졸업을 시켰는가? 오늘날 교회예배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다.
진리를 모르는 무식한 목사들이 문제군요...
성경이 규정한 예배의 모습이라면 성경어느 곳에 어떤 모습의 규정이 있는지요? 신령과 진정은 마음의 자세를 규정할 뿐 손뼉을 치느냐 치지 않느냐, 악기를 사용하느냐 마느냐, 춤을 허용하느냐 않느냐를 설명하는 구절은 아닙니다. 신령과 진리로 해석한다면 오히려 손뼉과 악기와 춤도 허용된다고 보아야 겠지요. 그것을 구약이라 그림자라 표현다면 정말 웃깁니다.
'신령과진정으로'라는 내용은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번역상의 매끄럽지 못함으로 인해서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신령과진정의 정확한 해석은 '성령과 진리' 입니다. 성령과진리의 실재로서의 예배는 구약의 유아기적의 예배,많은 장애물이 놓여있는 상태의 열등한 예배와 대조해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새시대 예배의 특성의 우월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현실의 예배문제를 단순히손뼉을 치느냐,악기를 사용해도 되느냐의 논지가 아닌데 그걸 이해 못하겠습니까? :56
혹 박선우님이 광주행님인가요? 위 글은 예배에 대한 원론적인 말씀입니다. 그 원론에 따른 예배를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을런지요.. 아마 죽을 때까지 찾기는 힘들겁니다. 혹여 여기 있다고 하지 마십시오. 모두 죄인들이고 사람들입니다. 예배 시간에 사사로운 생각 한번도 하지 않고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솔직하게 본인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예배를 안드린 것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예배는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삶일 것입니다. 몸으로 드리는 신령한 제사지요. 그것이 성령과 진리의 예배가 아닌지요.
헐~ 예장고신의 목사님께서 윗 글을 원론적인것이라 치부하시 할 말이 없습니다. 원론적인 것 따로 있고 삶따로 있습니까? 주께서는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적어도 저희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구속과 그의 영광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아울러 높이되신(왕되신) 그리스도를 향해 찬양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예배와 삶이 아닌가요. 저에게 "사사로운 생각 한번도 하지 않고 예배드린적이 있느냐고 물으시는데"... 구속받은 성도중에 그런 생각 해보지 않은 분이 한사람이라도 있는지 묻고 싶군요.
원론적이라는 말에 놀라셨습니까? 제 말은 교과서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하는 원론인데 몸은 온전히 그렇게 안된다는뜻이죠. 그렇다고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죠.
이 때에는 제사장들이 그 반차대로 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정결케 하고 성소에 있다가 나오매(대하 5:11)
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단 동편에 서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또 나팔 부는 제사장 일백 이십인이 함께 서 있다가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대하5:12~13)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역대하 5:14)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계 15: 2~4)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계 15:5~8)
구약에 지상에서는 제금과 비파와 수금, 나팔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할 때,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하여 제사장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했고, 신약에 천상에서는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때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어 .... 성전에 능히 늘어갈 자가 없더라했습니다.
야고보사도는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당시대의 사람들을 격려했습니다. 칼빈의 저술로 너무 주눅들게 하지는 않았음 좋겠습니다.
ccm이나 ccd가 뭔지는 잘모르겠습니다만 경배와 찬양곡 가운데는 찬송가에 있는 곡들보다 훨씬 더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가사로 된 곡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찬송가에는 복음성가수준의 곡들이 훨씬 더 많지요.
주께 영광 돌리세~! 하는 내용도 찬송가 중에서는 "경배와 찬양"에 포함되지만 "왕이신 ~나의 하나님!" 하는 가사는 하나님의 위격에 직접 경배를 드리는 찬양으로 가사로 본다면 찬양의 수위가 더 높다(?) 할 수 있습니다. 개혁하시는분들이 찬송곡에 대해 수준을 정해서 제재하기 원하는 대로 표현한다면 올려드리기 권유하는 표현인 "찬송 드리세"하는 것과 직접 올려드리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 , "영광받으시옵소서" 하는 가사와는 차이가 확실히 있습니다. 그런데 권유형은 찬송가에 많고, 직접 올려드리는 표현은 복음성가라 불리는 경배와 찬양집에 훨씬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