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할머니
이미나
할머니 영정 사진을 들고 한국전쟁민간인 희생자 위령비를 도는 남동생과 그 뒤를 따라가는 유족들의 가슴은 한없이 미어진다. 그곳을 거쳐 십자가가 덮인 할머니의 영구는 장지로 향했다. 하늘에서는 쉬지 않고 하얀 눈을 퍼부으며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하였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할아버지를 보내시고 홀로 아버지를 키우신 할머니, 참담했던 그해 겨울도 이렇듯 눈발이 거셌겠지요! ‘겨우 9개월 된 아들을 품에 안고 얼마나 고통스러우셨나요!’ 예상치 못한 삶의 파도 속에서 아들을 위해 큰 슬픔을 뒤로하고 생계를 위해 온갖 일마다 하지 않으셨던 할머니, 친정집에선 재혼을 권하셨지만, 남편과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한사코 제안을 뿌리치셨던 할머니! 그 한 많은 세월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한편 결혼한 지 3년 반 만에 할아버지와 생이별하고 73년 만에 하늘나라에서 할아버지와 상봉하셔서 반가움에 덩실덩실 춤을 추셨을 생각을 하니 환희의 눈물이 쏟아졌다.
모진 풍파를 감내하신 할머니의 덕택으로 마침내 아버지를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육자로 만들어 내시며 해맑게 웃고 계신 할머니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힘겨웠던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 아들이 결혼하여 손자, 손녀를 보게 되어 교사로 그리고 강사, 작가로 활동하며 화목한 가정을 이루게 된 노년이 그려졌다.
어느덧 영구차가 장지에 다다르고 일꾼들이 땅을 파자 눈바람이 멈추고 햇볕이 따사롭게 비쳤다. 이윽고 묘가 만들어지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영정 사진이 앞에 세워지고 아버지를 포함한 유족들은 할머니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하고 근처 마을 회관에서 함께 온 일행들과 차려진 점심을 먹으며 장례 일정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듯하였다. 특히 긴 세월 할머니와 함께하신 아버지는 하늘이 내려앉은 듯이 슬퍼하셨다. 할머니를 정성껏 모셨지만, 할머니가 떠나시니 더 잘해 드리지 못한 것만 떠오르신다며 후회하셨다. 내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올해 들어 자주 호흡곤란을 겪으셔서 할머니를 홀로 계시지 않게 하려고 부모님과 교대하며 나도 친정집에 들러 할머니를 보살펴 드리긴 했지만, 두 남매를 키우는 데 지쳐 살뜰히 챙겨드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주현미, 이미자, 설운도 가수가 부르는 여러 트로트 가요를 피아노를 치며 불러드리려 했는데…. 또한 가요무대 방송에 할머니 애창곡과 함께 살아오신 이야기를 멋들어지게 쓰면 내 편지가 선정되어 진행자가 그 사연을 읽어주고 할머니 신청곡을 방송에서 들려 드릴 수 있었는데……. 바쁜 삶의 일정 때문에 그 일을 하지 못한 것도 후회가 되었다.
할머니가 떠나신 날에도 한 차례 호흡곤란으로 힘들어하셨다가 다시 평정을 되찾으셨기에 그것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아이들과 좀 더 있다 가라는 말에 피로가 쌓여 다음에 오겠다며 인사를 한 뒤 집으로 향한 것도 너무 안타까웠다. 그리고 2시간쯤 지나 친정 가족 단체 카톡방에 할머니가 호흡곤란으로 119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셨다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이어서 30분, 40분 간격으로 올라오는 단체 카톡방 메시지를 보며 급박한 상황을 직감했다. 의료진들이 할머니의 폐에 물이 차서 어려울 것 같다는 진단을 했다는 메시지에 이어 조금 후 의식이 없으시다는 말까지 전해지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1년이라도 더 사시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하지만 얼마 후 아버지가 절규하며 할머니의 비보를 전하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 뜻하지 않은 이별 앞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며 통곡했다. 급하게 차에 몸을 싣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어 드렸다. 1시간 반쯤 흘러 외지에서 온 남동생과 여동생 또한 말을 잇지 못하였다.
입관하기 전에 가족들이 돌아가며 할머니에게 하고픈 말을 남기는 순서가 되었다. 가족들 모두가 한결같이 젊은 나이에 홀로 되시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힘드셨냐는 말과 자녀들에게 쏟으신 헌신적인 삶을 높이 기렸다. 황망한 마음으로 할머니가 운명하신 날은 가족끼리 장례 절차를 의논하고 할머니의 부고를 알린 뒤 다음 날부터 조문객을 맞이하며 장례를 치렀다. 많은 분이 오셔서 나와 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고 생전에 할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하였다.
할머니에게 나는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남동생, 여동생 모두 할머니와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여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교사가 되었지만 내 실력은 턱없이 부족하였다. 자주 능력 없는 아이라는 놀림을 들어야 했던 나는 가슴에 울화가 쌓여 끝내 화병을 앓았다. 그래서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탕약도 복용해야 했다.
손녀의 건강에 대한 염려로 할머니는 당시 대학 생활을 하던 나를 위해 “미나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내가 대전에 가서 뒷바라지를 해주겠다”라는 중대한 결심을 가족들에게 밝히셨다. 그리하여 대학교 2학년 새 학기가 되던 3월 초 차에 할머니가 쓰시던 생활용품들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대전으로 향하였다. 아무 연고도 없는 대전에서 손녀를 위해 만 3년이란 세월을 보내신 할머니! 내가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들을 동안은 혼자 적적하시기에 성경을 벗 삼아 읽으셨고 학교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그런 할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나는 무사히 4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쳤고 점차로 내가 뜻하는 일들을 이뤄냄으로써 가슴의 답답한 증상과 화병이 사라졌다. 또한, 홍성에 내려와서는 중등교사 임용고시에 첫해 고배를 마신 남동생을 위해 새벽기도를 다니셨다. 힘든 마음을 다잡고 묵묵히 시험공부에 열중하던 남동생은 마침내 합격의 영광을 얻으며 교사의 꿈을 이뤄내었다. 그리고 막내 여동생도 교대에 진학하여 높은 경쟁률을 뚫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우리 세 남매는 이 모든 것이 할머니의 사랑과 기도로 꿈을 일궈낸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또한, 교육자이신 부모님은 직장 일로 분주하셨기에 우리에게 할머니는 부모님의 역할을 대신 해주셨다. 때론 진지한 대화도 나누며 격려해 주시고 조언도 해주셨던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가시니 허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어서 슬픔에서 벗어나 삶의 한순간들을 뜻깊게 살아내는 것이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겠는가! 또한, 나도 언젠가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혼이 되어 할머니와 만나는 날 기약해 보았다. 분명 그날도 늘 그랬듯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줄 할머니의 얼굴이 밤하늘에 아른거리기 시작한다. 빛나는 별빛 아래 또다시 미련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