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일 ( 李徽逸 : 1619生 ~ 1672 卒)
자는 익문 ( 翼文 ), 호는 존재(存齋), 병은 ( 病隱 ), 본관은 재령 ( 載寧 )
경상도 영해부(寧海府)에서 석계 이시명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호군 이시성(李時成)에게 입양 되었다.
학봉 김성일의 학통을 계승한 경당 장흥효의 외손이며
그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서애 유성룡의 문하생인 학사 김응조
(鶴沙 金應祖)에게 많은 질의와 토론을 하였으며 그의 학문적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미 13세에 성리학에 심취하여 주역을 읽은 감동으로
복희횡도음(伏羲橫圖吟)이란 시를 지었고
성리략(性理略)을 보고는 서성리략후( 書性理略後)를 지었으며
인(仁)에 대한 성인의 설을 모아 구인략(求仁略)을 짓기도 하였다.
성리학의 존심양성(存心養性)이란 문구에서
스스로 호를 존재(存齋)라 하였다.
성리학 이외에도 천문과 지리, 역법, 역학, 상례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우주의 생성은 물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고
천체의 운행은 좌선설(左旋說)임을 주장하였으며
스승인 장흥효의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를 보고
일원소장도후어(一元消長圖後語)와 주자의 계몽도서(啓蒙圖書)에
자신의 생각을 붙여 계몽도설(啓蒙圖說)을 지었다.
평생 관직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학행으로 천거되어 경기전 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퇴계의 학문이 김성일로, 다시 장흥효에게 이어진 연원을 이어 받아
동생인 이현일에게 전수함으로서 명실공히 퇴계학통의 적전이라 할 수 있다.
45세에 한글 시조인 저곡전가팔곡(楮谷田家八曲)을 지어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하였고
말년에는 경세학에 뜻을 두고 홍범연의(洪範衍義) 편집에 착수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54세에 졸하니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되었고
후일 아우인 갈암 이현일이 13책으로 간행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창설 권두경과 하당 권두인, 고산 이유장, 옥천 조덕린,
금헌 백돈, 해은 박기봉, 칠탄 김세흠, 회양당 권상정, 갈암 이현일, 항재 이숭일등
당대 영남을 대표하는 퇴계학통의 계승 학자들을 두었다.
이조판서 이현일 찬행장. 산목재 홍여하 찬지명. 금옹 김학배 찬애사.
저서: 존재집. 서성리략후. 일원소장도후어. 계몽도설. 저곡전가팔곡. 홍범연의.
이휘일(李徽逸, 1619-1672)은 효종․현종 때의 학자이다. <효종실록>과 <목재집(木齋集)>의 묘지명에 의하면, 자는 익문(翼文)이고 호는 존재(存齋)이며 본관은 재령으로 영해 사람이다. 13살부터 외할아버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에게서 맹자 수심양성(收心養性)의 뜻을 배우고 성리학에 몰두했다. 경(敬)이 마음을 바로잡는 존심지법(存心之法)이라고 하여 당호를 존재(存齋)라고 했으며, ‘홍범연의집설(洪範衍義集說)’,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 등을 지었고, 주자가례의 상제(喪祭)에 대하여 자세히 연구했다. 35살(1653, 효종4)에 영해부사 최혜길(崔惠吉)이 학행으로 천거하여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43살에 저곡(楮谷)에 명서(冥棲)라고 이름붙인 집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고, 50살에 모친상을 당했으며, 홀로 된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다.
세상에 버린 몸이 견묘(畎畝)에 늙어가니
바깥일 내 모르고 하는 일 무슨 일고.
이 중에 우국성심(憂國誠心)은 연풍(年豐)을 원하노라.
농인(農人)이 와 이르되 봄 왔네 밭에 가세.
앞집에 소보 잡고 뒷집에 따보 내니
두어라 내 집 부대하랴 남 하니 더욱 좋다.
여름날 더운 적에 단 땅이 불이로다.
밭고랑 매자 하니 땀 흘러 땅에 듣네.
어사와 입립신고(粒粒辛苦) 어느 분이 알으실꼬.
가을에 곡식 보니 좋음도 좋을시고.
내 힘에 이룬 것이 먹어도 맛이로다.
이 밖에 천사만종(千駟萬鍾)을 부러 무슴하리오.
밤에란 샃을 꼬고 낮에란 띠를 베어
초가집 잡아매고 농기(農器) 좀 차려스라.
내년에 봄 온다 하거든 결에 종사(從事)하리라.
그가 지은 ‘저곡전가팔곡(楮谷田家八曲)’ 첫 수부터 다섯째 수다. 첫 수는 서사(序詞)로 제목이 ‘원풍(願豊)’이고 둘째 수부터 다섯째 수는 각각 춘, 하, 추, 동이다. 농촌 선비의 생활과 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학자였지만 농부의 삶을 자신의 것인 양 핍진하게 파악하고 그려내 보인다.
첫 수에서 자신이 농촌에서 늙어가지만 나라를 위해 풍년들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초장은 자신의 처지를 드러낸 것으로, 농촌에서 늙어가는 재야 선비임을 말한 것이다. 중장에는 조정의 일에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가 학문과 행실로 이름이 나서 영해부사의 천거로 참봉에 임명됐지만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자세와 연관될 것이다. 그는 조정의 현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지만 백성의 배고픔을 면하게 하도록 해마다 풍년이 들기를 바란다고 했다. 둘째 수는 봄날 농촌의 바쁜 나날을 읊은 것이다. 농인(農人)이라는 말을 쓴 것으로 보아 자신은 농촌에 살되 글 읽는 선비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 초장에서 농부가 봄이 왔음을 알리고 밭에 나가기를 재촉하는데, 소뷔나 따비 등의 쟁기 비슷한 농기구를 챙겨서 밭갈이를 나가자는 것이다. 종장에서 내 집의 힘든 일을 남들이 해 주니 고맙기 그지없다고 했는데, 부대(負戴)는 지고 인다는 말로 힘든 일을 한다는 뜻이고 여기서는 자신의 집 농사일을 말하는 것이겠다.
셋째 수는 여름 날 농사짓는 농민의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여름 땡볕에 땅은 불같이 달았는데, 농민은 땅에 엎드려 땀을 흘리며 김을 맨다. 곡식 한 알 한 알이 모두 농민의 고생으로 얻은 것인데 위정자나 양반 귀족들은 이러한 사정을 알기나 하느냐고 물어서 농민의 마음을 대변하였다. 넷째 수는 가을날 추수의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가을이 되어 곡식을 보면 여름날의 고생도 잊어버리고 수확의 기쁨에 젖는다. 스스로 농사지어 먹는 것이니 햇곡식으로 지은 밥은 더욱 맛있다. 귀족들의 수많은 말이 끄는 만종의 곡식인들 부럽지 않다고 할 정도로 가을 추수의 기쁨은 농민의 마음에 만족감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다섯째 수는 겨울에 집안일을 살피고 농기구를 고쳐서 다음해의 농사에 대비하는 농민의 월동 생활을 읊은 것이다. 밤에는 삿자리를 엮고 낮에는 마른 띠풀을 베어 이엉을 엮어서 낡은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새로 지붕을 이어놓고, 농기구도 손질하여 다음해 농사에 대비하자고 하였다. 그렇게 해 두었다가 다시 봄이 되어 땅이 풀어지면 즉시에 농사를 시작할 것이라고 하여 사철 바쁘게 살아가는 농민의 생활을 그려내고 있다.
새벽 빛 나자 나서 백설(百舌)이 소리한다.
일거라 아이들아 밭 보러 가자스라.
밤사이 이슬 기운에 얼마나 길었는고 하노라.
보리밥 지어 담고 도토리 갱을 하여
배곯는 농부들을 진시(趁時)에 먹여스라.
아이야 한 그릇 올려라 친히 맛봐 보내리라.
서산에 해 지고 풀끝에 이슬 난다.
호미를 둘러메고 달 띠어 가자스라.
이 중에 즐거운 뜻을 일러 무슴하리오.
‘저곡전가팔곡(楮谷田家八曲)’ 여섯째 수부터 여덟째 수까지다. 새벽[晨], 낮[午], 저녁[夕]이 각 수의 제목이다. 계절은 온갖 사물이 살아나고 아침 이슬이 맺히는 것으로 보아 초여름일 것이다. 초여름 하루 동안의 농촌 풍경을 그려내어 계절의 변화 속에서 잡아내지 못한 자세한 농촌생활을 그려내었다.
여섯째 수는 새벽 일찍 일하러 나가는 농민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동이 트자 들에 나서니 백설조(百舌鳥) 곧 지빠귀, 티티새가 지저귀는데, 아이들까지 깨워서 밭을 보러 가자고 한다. 밤사이 촉촉이 이슬에 젖어 곡식이 얼마나 자랐는지 보자고 했다. 농작물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 더없는 즐거움인 농민의 마음을 붙잡아 내었다고 하겠다. 일곱째 수는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점심을 해서 내보내는 모습을 읊은 것이다. 보리밥을 짓고 도토리묵을 쑤어서 반찬으로 하고 일하느라 배고픈 농부들에게 진작 참도 먹이고 점심도 먹이자고 했다. 그리고 자신도 농부들의 점심을 한 그릇 맛보겠다고 하여 농부의 노고와 그들의 거친 음식을 함께 나누겠다고 하였다. 비록 글 읽는 선비지만 농촌에 뿌리를 내리고 농민과 함께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농부와 같은 운명 공동체라는 유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수는 해가 저물도록 들에서 일하다가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의 즐거움을 읊은 것이다. 서산에 해가 지고 저녁 이슬이 풀끝에 맺힐 때 하던 일을 멈추고 호미를 챙겨들고 어스름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고된 농사일에 몸은 괴롭더라도 하루 종일 애써 일한 보람과 달빛을 맞으며 돌아가는 노동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노동의 가치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부지하는 기본적 힘을 창출하는 것이기에 그 즐거운 뜻은 자못 심오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그는 농부의 노동이 국가와 민족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그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여, 오직 바라느니 풍년드는 것이라고 서사에서 말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