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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중에서 첫째 되는 계명에 대한 가르침
마태복음 22장 34-40절/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병행구절, 막 12:28-34)
한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한 율법사가 예수께 드린 질문 :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이 묻는 부활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해 주시자(마 22:23-33), 그들은 그 말씀에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소리 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소식은 곧 퍼져 바리새인들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번에도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책잡아 올무에 걸리게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궁리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며 사로잡을 음모의 생각에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율법에 정통한 한 율법사도 있었는데, 그가 예수께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것이 큽니까?” 마가복음의 기록에서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율법사에게 주신 답변 :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 되는 가장 중요한 계명인지를 묻는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2:29-31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의 하나님 주께서는 유일한 분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한 둘째도 그와 같다. 그러니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음과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리고 나서 “모든 다른 계명과 선지자들의 글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이 두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으니,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라고 부언함으로, 이 두 계명보다 으뜸 되는 더 중요한 계명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여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또한 이웃을 사랑할 것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강령이란 하나님의 본의를 드러내 알려주시는, 요약이요 핵심이란 말입니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의도하고 있는 본뜻의 요약이요 핵심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또한 너의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잘 나타나 있어 이것으로 족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도록,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그리스도이신 주 예수 안에 두시고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의 인도를 받게 하실 것임을 의도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계명을 실행할 수 있음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 추가되어 있는 내용 : 여기까지가 마태복음에서 알려주시고 있는 한 율법사와 예수님 간의 대화입니다만, 마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이 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기관(율법사)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막 12:32-34)
여기에 의하면, 율법사는 “선생님, 하나님은 한 분 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신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저는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성전 제단에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였으며, 그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는 아무도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서 주시는 가르침
한 율법사의 질문 의도 : 율법사는 주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삶의 도리를 가르치는 유대교 교사를 가르칩니다. 이 율법사가 예수께 질문한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더 크니이까”에서 ‘계명’으로 번역된 단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의 총체와는 구별되는 율법의 개개의 가르침, 훈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당대에 존재했던 모든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개의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크니이까’에 사용된 단어는 어떤 대상 가운데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형용사입니다. 해서, 한 율법사가 예수께 질문한 것은 모든 계명 중에 가장 중요한, 제일 첫째 되는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물은 것은 자기가 율법사로서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시험의 의도에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613조의 계명으로 확대하여 만들었고, 다시 이것을 분해하여 사람의 몸의 지체수에 맞춘 248개의 적극적인 이행의 계명과 1년의 날수와 맞춘 365개의 소극적인 금지 계명으로 나누어 만들고 자랑스런 전통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613개조에 이르는 모든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율법을 중요성에 따라 나누어 중요한 율법을 반드시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에 따라서 더 중요한 율법과 덜 중요한 율법을 나누는 기준이 필요했으므로 율법을 보다 중요하고 무거운 정도에 따라 등급을 매겼습니다(참조, 5:19; 23:23). 이처럼 많은 계명들을 경중을 매겨 그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를 정하여 그 서열을 매기는 것은 당시 율법사들에게는 많은 논쟁거리였기에 가장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대답하기에 난감한 가장 어려워 보이는 질문을 함으로써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에 아주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답변에서 가르치시는 의도 : 예수께서 한 율법사에게 말씀하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너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너의 온 마음으로, 너의 온 목숨으로, 너의 온 뜻으로”로서, 주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먼저 선포하고, 이어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신명기 6:5에서 취한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주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율법사 한 사람에게가 아닌 온 이스라엘이 들어야 할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주어진 것으로,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들을 것을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지켜야 할 모든 계명 중에서 어떤 한 가지 계명을 들어서 이것이 첫째 되는, 가장 중요한, 가장 큰 계명이니 이것을 그 어떤 계명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서 제일 먼저, 우선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들어야 할 온 율법과 선지자의 글은 그 수가 얼마이든지간에 그 강령, 곧 율법의 모든 계명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본의(本意; original meaning)를 요약해서 정리한 으뜸은 다만 주이신 한 분 하나님을 섬김에 있는 것에서 나온 큰 두 줄기인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함께 이웃을 사랑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좇아 그 말씀 속에 있으면서 그 말씀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뜻을 좇아 살아야 할 것으로 신명기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너는 (1)마음을 다하고 (2)성품을 다하고 (3)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를 취하여 인용하신 것인데, 마태복음에서의 기록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1)네 마음을 다하고 (2)목숨을 다하고 (3)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3중적인 말씀으로 하셨으며, 마가복음에서의 기록에서 예수님은 “(1)네 마음을 다하고 (2)목숨을 다하고 (3)뜻을 다하고 (4)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4중적인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다하고’라고 하시면서 ‘성품을 다하고’ 대신에 ‘목숨을 다하고’에 ‘뜻을 다하고’를 더하셨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를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구약성경에서 말씀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훨씬 더 강화하시고 강조하여서 하시고 있는 말씀으로, 가식 없는 진실함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이해하고 느끼며 갈망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이름입니다. 이 사랑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신명기 6:6-9절에서 일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표현해 주시고 있는 것에서 의도해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이 그들의 주로서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시며 언약하신 뜻을 이루실 것이었습니다. 언약의 주이신 메시야(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가 되어 언약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게 하시니 십자가의 구속이 그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구속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가지신 뜻을 이루시는 것이며,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온전히 섬겨 이룸으로써 아버지를 향해 아들이 갖고 있는 사랑을 나타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들의 아버지 사랑은 예수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8-39)고 하신 말씀에서 듣는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에 있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보게 되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또한 행하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첫째가는 가장 중요하고 큰 계명 뒤에 두고서 그 계명과 같은 계명으로 연계하여 말씀하셨는데, 이 첫째가는 계명 못지않게 중요한 계명은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는 레위기 19:18에서 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같은 동일한 계명으로 말씀하신 것은 도덕과 윤리 개념에서의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는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니라 레위기 19:9-10에서 농사한 곡식의 이삭을 이웃인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남길 것을 말씀하시고, 그들의 물건을 도둑질하지 말고, 그들에게 거짓말하지 말고, 그들을 억압하여 착취하지 말고, 억울하게 죽임당하는 일이 없게 하고,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말고, 그들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살 것을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둘째 계명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가난한 이웃을 보호하시며 살피심에서 그들의 생명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웃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에 있으시는 이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아들로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으니, 곧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인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하나님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죽음에서 건져 하나님 앞에 산 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피 공로를 통해서 죄를 용서하시므로 정죄에 있는 율법의 저주를 벗어나게 하셨으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에 있는 하나님과 참다운 화평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을 위한 헌제 사역의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엡 2:15)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에 의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다
예수께서 실행하신 ‘주 하나님을 사랑하신 것’과 ‘또한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신 것’은 앞서 언급한 바대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강령이란 하나님의 본의를 드러내 알려주시는, 요약이요 핵심이란 말입니다. 곧, 온 율법과 선지서를 요약하여 알려주시고 있는 정신인 하나님의 본뜻입니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요약이요 핵심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함께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율법의 온 계명이 지닌 사랑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계명으로 주어졌음을 사도 요한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여 알려주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사도 요한은 이 새 계명이 어떤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요일 2:7-8)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요이 1:5)
요한이 이처럼 예수께서 주신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말함은 율법의 계명인 이전 계명과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 주어진 계명이라는 것에서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새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해서 받아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새 계명으로 표현하심은 그 계명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서 항상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조상이 대대로 흘러 후손이 바뀐다고 해서 옛날 옛적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사람이든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처음 주신 계명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새로운 계명입니다. 그 계명을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사람들에게 또한 다시 써서 주시는 것이니, 곧 새 계명입니다. 이 새 계명은 아들이 아버지의 빛 가운데서 받아 아버지와 함께 한 자신의 빛에 거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계명이니,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아들과 함께 아버지를 사랑함에 있어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시는 계명을 따름에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 줍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15, 21)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이 계명들은 전혀 무거운 것들 – 지키기 어려운 것들 – 이 아닙니다. 주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도록,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그리스도이신 주 예수 안에 두시고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의 인도를 받게 하실 것임을 의도하시고 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에서 품으신 하나님의 뜻을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 주실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주 하나님을 사랑함에 흠과 결점이 되지 않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공급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는 은혜가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의해서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에서 선포되고 있는 저주와 복의 주로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내리시는 저주인 죽음의 형벌을 제거하고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자신 안에 두고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흠과 결점이 없게 거룩하게 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온전을 이루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행하심에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할 것’을 온전히 지키심에 있으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신 뜻을 받들어 십자가의 구속 사역인 주님의 교회를 이룸을 우리 자신의 몸을 위함 같이 해 나가는 사랑에 있으면 하나님은 이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한 사랑으로 받으십니다. 그럼으로써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두 계명을 온전히 이롬에 있게 해주십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할 것’을 말씀하신 것은 이제 곧 십자가에서 이룰 구속을 염두에 두고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이것이 율법 중에 첫째 되는 가장 큰 계명인 것을 알게 해주신 것이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니, 예수님은 이것을 이제 곧 십자가에서 구속의 피를 흘리심으로 그 공효 속에서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새 계명으로 주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훗날 사도 요한은 지금까지 설명하여 말한 내용을 정리한 것을 보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깨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라고 말하였습니다(요일 3:23-24; 4:7-12).
예수님이 말씀해 주시는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대하는 한 율법사의 고백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시자, 이를 들은 율법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을 대하는 자세를 어떻게 가져야 할 것인지를 간파하고 예수님을 음해할 목적에서 시험하고자 했던 악한 마음에서 돌이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고백함에 있는 것을 기록해 주시고 있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고 그분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저는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성전 제단에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막 12:32-34)
여기에서 보는 대로, 율법사는 먼저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고 그분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진정 옳다며 하나님의 말씀을 시인하고 다만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율법의 오경과 시편과 모든 선지자의 글인 구약성경이 증거하며 가르치는 것의 핵심인 하나님을 사랑할 것에 있을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데 따른 것입니다. 그는 참된 신으로서 유일하신 분은 하나님뿐이심을 말하였습니다. 이는 구약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은 유일(唯一)하신 분인 오직 한 분뿐이심을 증거하며 가르치고 있는 것을 그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과연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며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대답은 오직 참된 신이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데, 그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아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함으로써 하나님께 가진 믿음을 행하여 보이는 것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기의 뜻을 실행하시고 실현하시는 것으로 나타나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랑을 행한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이 그 품으신 뜻을 그로 하여금 좇게 하신데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사는 이어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희생제물)을 성전 제단에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말입니다. 그의 이러한 말은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한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삼상 13, 15장). (1)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블레셋 족속이 3천 대의 전차를 6천 명의 기마병들이 몰고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셀 수 없는 군사들이 쳐들어와 몰려왔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침공을 받자 벧아웬의 동쪽 믹마스에 진을 치고 대치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는데, 블레셋의 엄청난 위세에 눌려 길갈에 남아 있으면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사울 왕은 어떻게 전쟁에 임하여 블레셋을 물리쳐야 할지를 몰라 크게 당황하고 다급한 나머지 사무엘이 7일 동안 길갈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전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이 직접 제사장 노릇을 하여 번제와 화목제에 쓸 제물을 가져오게 하여 자기 손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자 막 도착하여 이를 본 사무엘이 그의 망령된 행실을 크게 꾸짖으며 그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를 지키지 않았으므로 그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였습니다. (2)이렇게 책망을 받은 사울 왕이나, 후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진행을 막으며 괴롭혔던 에서의 후손인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되 남자와 여자와 젖먹이, 소와 양, 낙타와 나귀 가릴 것 없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진멸할 것을 말씀하심으로 사울이 아말렉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을 때 또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악한 죄에 있었습니다. 사울이 겐 족속을 아말렉 족속에게서 빠져나오게 하여 살리고 아말렉 족속의 왕 아각과 함께 양 떼와 소 떼 중에서 기름지고 살찐 것은 살려 남겨두고 대신에 여위고 보잘 것 없는 짐승만 죽임으로써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죄를 또 다시 저지른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에게서 떠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아말렉 족속에게서 빼앗은 떼와 소 떼를 끌고 오는 사울을 만났을 때 “여호와이신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기 위하여 가장 좋은 양과 소를 살려 남겨두고 끌고 왔다"고 하는 그에게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에 부족함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운 것은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기 위한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명령을 불순종하여 어겨 아각 왕을 살려주고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짐승을 살려두었다고 하니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 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그보다 더 좋은 제물이 없을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에 있는 것은 점쟁이의 속임수와 같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은 죄악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무엘은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물은 기름지고 살찐 양과 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깨달은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율법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성전 제단에 바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은 한 율법사
한 율법사는 바리새파의 사람으로서 비록 예수님을 시험하는 의도로 율법의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만,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옳게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 율법사가 이렇게 옳게 알고 있는 것을 대답함으로 예수님은 그 대답을 인정하여 받아들이시는 것에서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영생을 얻기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말씀과 같으니 “영생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를 이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는 정도로 이야기 하신 것은 왜인지요.
그것은 그가 아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계명의 강령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못함으로 예수님을 주로 섬겨 따름에 있지는 못하여 아직은 그가 알고 있는 율법의 충족에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성전 제단에 바치는 어떤 제물 제물보다도 더 낫습니다. 그런데 모든 계명을 대표하는 율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을 계명으로 주신 것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으려면 그 이전에 사랑해 왔던 모든 것을 부인함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하나님만 사랑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하나님 이외의 것은 모두 미워함에 있어야 하며, 또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위하는 모든 것을 미워함에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마 6:24)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인데,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재물을 미워하면서 살 수 있는 자가 있는지요. 재물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기를 위함에 있는 육을 부정함에 있는 것인데, 과연 자기를 위함에 있는 육을 부정하면서 살 수 있는가요. 우리 육이 희노애락 할 수 있는 재물 등 세상의 온갖 것을 내버릴 자가 있으며, 내버린다면 어느 정도 내버릴 수 있을까요?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여야 합니다. 그러니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늘의 것을 바라보고 땅엣 것은 바라보지 말라는 데(골 3:2), 땅엣 것 그 어느 것도 바라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요? 땅엣 것 실컷 바라보고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살고 싶은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능하지도 않은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신 것인지요. 사람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 순종하여 지켜 나가는 것에 온전하지 못하니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한도의 선에 이르게 되면 지치고 힘겨워하며 원망과 불평을 토로합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하신 본의는 이것이 끝없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실상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한 율법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자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성전 제단에 바치는 그 어떤 제물보다 더 낫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기의 마음, 목숨, 생각, 힘을 미워하고, 자기를 위하는 사랑을 버리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율법사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기에 율법의 의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 외에 또 다른 의인 하나님의 의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셨으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실 것이다”(참조, 롬 5:8)라고 사도 바울이 깨달은 깨달음에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자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성전 제단에 바치는 그 어떤 제물보다 더 낫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받아들여 따르는 믿음에는 있지를 못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의 ‘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는 대답을 한 율법사에게 “네 대답이 옳다. 그러니 네가 옳게 알고 있는 대로 행하라. 그러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눅 10:28)라고 해 주시는 말씀을 들었으나,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다가와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생명의 주로 영접하여 따르는 믿음에 있지 못하므로 주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복의 선언을 받기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인인 성도는 예수님과 한 율법사 간에 오고 간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된 그리스도를 통해서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그 사랑을 입고, 그 사랑을 하고 있는 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인 하나님과 원수 되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을 때 그런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로 날마다 입고 있는 그 사랑으로 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기회를 가져나간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십자가에서 베푸신 사랑과 똑같이 여겨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으로 해나간 것으로 그리스도가 베푸신 사랑으로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또한 이웃을 사랑한 그 사랑이 비록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사랑에 견줄만한 것이 되지 못하는 미미한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신 그 받아들이심으로 우리 또한 받아들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모자람이 없는 온전한 사랑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와 같이 이웃도 자기 몸을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말해지고 있는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나 실행이 되고 있는지를 우리가 섬기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시고 또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관심을 가지고 봄에 있으며,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고 있는 사랑이 있기에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랑이 어떻게 행해지는 지를 여실히 봄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에 있으며 또한 우리 믿음의 형제와 하나 된 몸에 있는 교회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