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이야기]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1사무 17,46) - 다윗이 골리앗에게 승리를 거두다
두 번째 이야기 : 1사무 17,1-54
“필리스티아인들은 전쟁을 일으키려고 군대를 소집하여 유다의 소코에 집결시켰다.”(17,1)
필리스티아는 다섯 도시(아스듯, 아스클론, 갓, 에크론, 가자)가 연합된 나라로 ‘블레셋’이라고도 불린다. 철기 사용에 앞섰기에 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며 판관기부터 이스라엘의 적대 세력으로 등장한다. 사무엘의 스승인 엘리 사제의 두 아들이 전사하고 계약 궤를 빼앗긴 것도 이들과의 전쟁에서였다.(1사무 4,1-22 참조) 그들이 사울의 아들 요나탄에게 패배 한 일(1사무 14장)을 설욕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소코는 베들레헴 서쪽 25km 거리에 있으며, 이에 맞서 이스라엘은 베들레헴 남서쪽 20km 거리에 위치한 엘라 골짜기에 전열을 갖춘다.
공격에 나선 것은 “필리스티아인들 진영에서 골리앗이라는 갓 출신 투사”(17,4)였다. 4-7절에 걸친 그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자세하다. “여섯 암마하고도 한 뼘이나 더” 되는 그의 키는 약 2m 80cm에 달한다.(일 암마는 성인 남성의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까지의 길이로 보통 45cm를 말한다). 그가 장착한 금속제 무기들의 총 무게는 60kg이 넘는데, 성인 한 명을 업고 있는 셈이다. 겉모습부터 위압적인 골리앗은 마침내 이스라엘을 향해 도발적인 선전 포고를 던진다.
“너희 가운데 하나를 뽑아 나에게 내려 보내라. 만일 그자가 나와 싸워서 나를 쳐 죽이면, 우리가 너희 종이 되겠다. 그러나 내가 이겨서 그자를 쳐 죽이면, 너희가 우리 종이 되어 우리를 섬겨야 한다.…내가 오늘 너희 이스라엘 전열을 모욕하였으니, 나와 맞붙어 싸울 자를 하나 내보내라.”(17,8-10)
‘투사’라는 골리앗의 칭호는 히브리어로 ‘이슈 하베나임’인데 직역하면 ‘중간의 사람’이란 뜻이다. 전쟁터에서 자기 군대 사이를 누비며 사기를 돋우고, 적과 대치상태일 때 단독으로 싸워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인물이다. 일대일 대결은 희생자를 최소화하고자 고대 전쟁에 있어 온 관행이었다.(2사무 21,15-22 참조)
골리앗의 등장에 사울과 그의 군대는 “너무나 무서워 어쩔 줄 몰랐다.”(17,11.24)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이 전쟁터에 오게 된다. 당시 베들레헴이 사울의 통치 영역이었기에 세 명의 형은 소집되어 군대에 있었다. 다윗은 20세 미만이라(민수 1,3;26,2 참조) 문맥상 평화시에 궁에 머물며 사울의 악사 노릇을, 전쟁 때엔 아버지 집에서 양떼를 지킨 듯하다.(16,14-23; 17,12-15 참조) 골리앗과 싸우기를 자원한 다윗은 ‘너는 아직도 소년이 아니냐?’라는 사울의 염려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임금님의 종은 아버지의 양 떼를 쳐왔습니다.…저는 이렇게 사자도 죽이고 곰도 죽였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저 필리스티아 사람…그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전열을 모욕하였습니다.…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저를 빼내 주신 주님께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의 손에서도 저를 빼내 주실 것입니다.”(17,34-37)
다윗은 자신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체험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밝힌다. 그는 골리앗에게 40여 일을 시달리고 무서움에 짓눌려 싸우고자 나서는 이가 없는 무력한 상황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한다. ‘할례 받지 않은 필리스티아 사람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전열을 모욕한다.’(17,26.36)는 표현은 이 전쟁을 두 민족의 세력 다툼이 아니라 신앙을 건 성전(聖戰)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고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강력하고 거대한 투사를 이길 존재는 신적 존재뿐이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의 응답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이 요청되는 상황인 것이다.
다윗은 온갖 무기를 동원해서 그를 도우려는 제안을 거절한다. 다윗이 무릿매(돌팔매)로 거인을 이기겠다고 작전을 세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돌멩이조차도 다윗의 무기는 아니었다. 돌팔매라는 것이 적중하기도 하지만 빗나가기도 하지 않는가. 게다가 단 한 번으로 정수리를 맞히리라는 보장도 없고, 또 그것으로 쓰러질 정도의 타격이 될지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다윗이 거절한 것은 인간의 능력이고, 그가 선택한 것은 하느님의 힘이었다. 다윗의 무기는 하느님의 구원 체험과 깊이 연결된 믿음에 있었다. 하느님이 다윗을 선택하시듯, 다윗도 이 중요한 순간에 하느님을 선택했던 것이다. 기선을 제압하고자 모욕하는 골리앗에게 다윗은 같은 방식으로 상대하지 않는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17,45-47)
다윗은 전쟁의 승패와 관련해 언제나 ‘주님’을 주어의 자리에 놓는다. 전투의 목적은 ‘하느님을 알게 하는 것’에 있다. ‘너를 내 손에’가 ‘너희를 우리 손에’로 확장되는 다윗의 관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해,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그분 힘으로, 그분 백성을 위한 것임을 드러낸다.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에게 내렸던 하느님의 영은 다윗의 이러한 선택을 통해 그 힘을 발휘한다. 다윗은 거인의 이마를 맞혔고, 그는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쓰러 진다.(17,48-50) 사람들에게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으로 보이지만 골리앗은 다윗이 아니라 하느님께 패배한 것이다. 다윗은 하느님의 힘을 선택하고 맡김으로써 마치 열매를 거두듯 골리앗에게 승리를 거두어 들였다. 전쟁의 승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살아 계신 하느님이 드러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살아 계실 때 뿐이다.
삶에서 느닷없이 등장하는 고난이 마치 도전장을 내미는 골리앗처럼 우리를 압도할 때가 있다. 많은 경우 그 앞에 당당히 대면할 힘은 우리 안에 없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고 당신의 사람들을 지키신다는 다윗의 살아있는 믿음이 아닐까.
“그가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호소하여 주님께서 그의 오른팔에 힘을 주셨던 것이다.”(집회 47,5)
[월간빛, 2023년 2월호, 송미경 베로니카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