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나가리라
최 화 웅
봄햇살 담 너머 집안 깊숙이 들어온다. 그 자리에 한 떨기 자목련이 '숭고한 사랑'을 나직이 노래한다. 대지의 생명력이 그렇게 용솟음치며 다가온다. 어느 듯 맑고 밝은 청명(淸明) 지나 곡우(穀雨)에 때 맞춰 내린 시우(時雨)가 잠든 대지를 차례로 깨운다. 4월은 그렇게 계절의 감성으로 속삭인다. 참 좋은 계절이다. 그러나 지구촌은 코로나-19에 휩싸였다. 종교는 콜럼버스의 대항해시대 이후 침략과 정복, 전쟁과 분쟁, 감염병 바이러스가 인간을 혼란과 폐해에 빠뜨렸다. 최근에는 종교집회가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온상이 되었다. 그것을 불가에서 는 탐진치(貪瞋癡)라고 보지 않을까? 인간은 만물의 으뜸이 아니라 풀, 벌레와 더불어 지구의 구성원일 뿐이다. 4차 산업혁명 초입에 나타난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과 인공인간(AH, Artificial Human)이 우리 곁에서 둥지를 튼다.
우리 사회에는 가짜종교의 출몰과 표를 의식한 정치권의 궤변이 마구 나돈다. 마스크 한 장 사려고 장사진을 이루고 엉터리뉴스와 유언비어가 사회를 어지럽혔다. 정치권과 언론계는 자기이익을 쫓아 내뱉는 무책임한 막말이 갈등과 분열을 부추긴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한심한 꼴이 되었을까? 그 원인은 내가 이겨야 하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끝없는 욕망과 어리석음 때문이리라. 외신이 우리의 방역 의료체계와 사재기를 극복한 삶을 높이 사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곪을 대로 곪았다. 지난 날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라는 독백뿐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인간을 그렸다. 이럴 때 차라리 랜터 윌슨 스미스(Lanta Wilson Smith)의 시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를 읽으며 마음을 다독인다.
지난날 시집『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를 펴낸 시인 류시화가 이 시를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조용히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그대에게 미소 짓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할 때/ 근심 없는 날들이 스쳐갈 때면/ 세속적인 것들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이 진실을 조용히 가슴에 새기리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로 옮겼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면 교회의 반사회적 행태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하고 기존 교회 또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영어로 이단(異端) ‘헤러시(heresy)’는 원래 그리스어의 ‘하이레시스(hairesis)’에서 유래했다. 미국의 종교연구가 대럴 레이(Darrel W. Ray)는 저서 <신 바이러스(The God Virus)>에서 종교를 바이러스에 빗대기까지 했다. 교조주의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기는커녕 자신과 주변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특히 이단은 사회와 기존 종교의 교리가 텃밭이다.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옳고 그름 못지않게 무엇이 바르고 정의로운지를 스스로 가려야 한다. 한국갤럽이 4년에 한 번씩 종교를 믿는 이유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다. 그 결과 차이는 있으나 거의 비슷하다. 응답자의 60% 이상이 종교를 가지는 이유를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해서’라고 답했고 20%가 ‘죽은 뒤 영원한 삶’을 희망하였다. 그리고 10% 미만이 '복을 받기 위해서'와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라고 응답했다. 기독교가 모든 것의 중심이었던 중세에 철학과 과학, 예술은 신학의 시녀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미하는 보조 역할을 했을 뿐이다. 모든 것은 기독교 교리로 설명되었고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거나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면 종교재판에 회부되는 신중심주의었다. 종교가 인간의 생사를 좌우했다.
시인과 이야기꾼들이 다양한 지옥과 천당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지옥에 넣고 좋아하는 사람을 천당으로 보내지 않았던가? 호메로스가『오뒷세이아』에서 저승여행을 보여준 이후 단테가『신곡』에서 지옥의 모습을 라볼레드가 『가르강튀아』를 보카치오가『데카메론』에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고 미켈란젤로의『최후의 심판』이 상상력을 표현했다. 이것이 르네상스를 향한 변화의 출발이었다. 밤하늘을 붉게 물들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종교는 무엇이고 교회의 역할과 역기능을 다시 묻는다. 종교가 괜히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땀 흘려 일하지 않고 각종 헌금의 명목으로 남의 돈을 거두며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에게 새빨간 거짓말과 꾐을 언제까지 늘어놓을 것인가? 교회의 예배와 미사는 세상과 인간의 삶을 위한 것이라야 하리라.
코로나19의 창궐 시기에 우리 언론을 지켜본 영국 프리랜서 기자 사무엘 리사드는 “신뢰할 수 없는 출처에 의존하는 한국 언론이 형편없다.”고 평하면서 “기사에서 소설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뿐인가. 감염병이 온 나라를 휩쓰는 상황에서도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만을 외치며 주일예배를 강행해 교회가 역병의 온상이 되었다. 과연 교회가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믿음의 길’인지 묻고 싶다. 예수님이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라고 한 말은 타인과 화해하고 타인의 고통을 나누겠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마태복음 3장 2절에서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여라. 하늘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외쳤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그리고 생각을 가다듬어 생각해보자. 가식과 기만에 찬 정치와 종교가 우리 삶의 필요악(necessary evil) 일까? 새로운 기회가 우리 곁에 다가왔다. 어떠한 고난과 환란 속에서도 새시대를 위한 분별력의 선택에 떨쳐나서야 하리라.
첫댓글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가장 좋아하는 문구 입니다.
교회의 예배와 미사는 세상과 인간의 삶을 위한 것이라야 하리라.
곰곰히생각헤보십시오.
종교와 신도 인간이 만든 문화체계라면 예배와 미사 또한
당연히 인간의 생존와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지요... 이런 상황에서도 아집과 분열을 도모하는 종교와 언론, 정치를 보면 무엇이 정말 중한지 다시 한 번 묻고 싶습니다...
형제님, 그래서 우리가 먼저 중심을 잡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