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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문화유산자료 스크랩 청백리 오리 이원익 기념관
叔榮 추천 0 조회 44 06.08.15 19: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오리 이원익 박물관과 기념관 

[답사일 2006. 3.25(토)  한국의산천 우관동 ]

 

지금은 KTX 고속철이 있는 광명시 역사 앞쪽 서독산, 예전의 오리동 구름산 아래는 오리 이원익 선생이 하사 받은 옛 집, 묘소, 신도비, 영정등이 남아있고 박물관과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2006 우관동 

▲ 박물관 입구에는 산수유꽃이 피는 중

 

ⓒ2006 우관동 

▲ 이원익 선생의 충열 박물관 입구 

 

이 박물관은 조선 시대 3대 임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과 그 후손의 삶의 자취를 그대로 보존해놓은 곳이다.

이원익은 황희 맹사성과 함께 조선의 3대 청백리로 꼽혔을 만큼 청렴결백한 관리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청렴함이 드러난 일화는 '조선실록'에도 기록돼 있다. 

인조 9년(1623년) 정월 10일, 임금이 승지 강홍중을 보내어 이원익을 문안한 뒤 "그가 사는 집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강홍중은 "두 칸 초가가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재상이 된 지 40년인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청렴하고 결백하며 가난에 만족하는 것은 고금에 없는 것이다. 내가 평생에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은 그 공로와 덕행뿐이 아니다. 이공(李公)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삼아 본받을 바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5칸짜리 집 한 채를 이원익에게 하사했다. 하지만 이원익은 "신을 위해 집을 지으니,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는 한 가지"라며 수차례에 걸쳐 받기를 사양했다고 '조선실록'은 전하고 있다.

 

ⓒ2006 우관동 

 

▲ 관감당(觀感堂)ⓒ2006 우관동  

 

관감당은 이원익이 은퇴한 후 인조가 하사했으나 이원익이 네 차례에 걸쳐 받기를 사양했다는 5칸짜리 집이다. 계속된 사양에 인조가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신민이 보고 느끼도록 하려는 것이니, 경은 굳이 사양하지 말고 거기에 살라"라고 하자 이원익이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어서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2006 우관동   

종택

문 오른쪽에는 이승규, 이종민, 이장호 등 이 교수의 3대 직계손의 문패가 달린 종택이 버티고 있다. 이 집은 1960년대 말 이 교수가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까지 이원익의 후손이 대대로 거주하던 곳이다. ㄱ자 형의 안채와 ㅁ자 형의 행랑채가 배치되고, 그 옆에는 ―자형 사랑채가 달린 형태다. 종택은 20세기 초 경기 지역 상류 주택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1917년에 완성된 안채는 가구의 짜임이나 기둥의 이음 등이 매우 정교하다.

 

오리 이원익이 손자 수약(守約)에게 쓴글

 

너희 아버지는 전후 고을을 맡을때마다 청렴과 간명으로 백성을 보호한다고 알려졌었다. 너는 네 아버지의 아들이니 마땅히 마음에 새겨 집안의 명성을 떨어트리지 말라.

 

1. 세상을 다스리는데에는 백성을 사랑하는것보다 더한것은 없다. 몸을 닦는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것보다 더한것이 없다.

2. 천하를 실정을 안후에 천하를 다스릴수있다.

3. 일에 다다라서는 포악함과 성냄을 경계하고 서서히 일의 실정을 파악하라

4. 사람을 다스림에 있어서 상벌이 있을 수가 없으니, 착한자에게는 상을 주라, 상을 주었으니 오랫동안 잊지말아야 한다. 악한자는 벌을 주어야 한다. 벌을 주었으니 시일이 지나면 (나쁜일에 대해서) 꼭 생각치 말라.

5. 한 이익을 일으키는것이 한폐단을 제거하는것만 못하고, 한일을 내는것이 한일을 더는것만 못하다.

6. 읍중에 일이 있거든 노련한 관리와 연로한 인민에게 널리 물어서 인정에 합하기를 힘써야 하고, 남에게 거만을 부리고 스스로 민심을 떠니게 해서는 안된다.

7. 백성은 마땅히 어루만져 돌봐야 하며, 관속을 대하는것도 각박하게 해서는 안된다. 

8. 모든일은 때에 따라 마음을 다해야 한다.   

 

ⓒ2006 우관동  

 

관감당의 뜻은 오리 이원익이 살아온 일생이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된다 하여 백성에게 보고 느껴야할 것이라는 뜻으로 받은 사액이다.

 

탄금암

관감당 앞에는 이원익 생전에도 있었던 약 400년 수령의 측백나무와 탄금암(彈琴岩)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측백나무 밑자락에 놓인 평평한 생김새의 탄금암은 이원익이 살아 있을 때 그곳에서 거문고를 타던 곳이라 하여 이름을 탄금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2006 우관동 

 

이원익 선생 기념관

충렬박물관에서 약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기념관(입장료 성인 500원)

ⓒ2006 우관동 

 

ⓒ2006 우관동 

ⓒ2006 우관동 

ⓒ2006 우관동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정장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

 

조선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오리 이원익은 태종 5대손이다. 왕족은 4대까지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던 당시 법규로 인해 가문에서 처음으로 과거시험에 응시, 합격해 벼슬길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선조 때 청백리에 뽑혔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성품이 원만해 정적에게도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 이원익의 생애

명종2년 (1547년) 태어나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선조 2년(1569년) 22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제수 받았다. 이후 군기 시판관,사간,교리,호조참의,안주목사,예조판서,우의정을 지냈으며, 선조,광해군,인조에 걸쳐 6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인조 12년(1634년) 향년 88세로 사망하였으며, 사망 후에는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고 문충(文忠) 이란 시호를 받았다.

 

 

ⓒ2006 우관동  

 

선조 6년(1573년) 성절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가서 이름을 떨쳤으며 선조 20년 안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약곡 1만 여석으로 기민을 구호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도 순찰사,제도도체찰사가 되어 왜군과 맞서 싸워 많은 공을 세웠다.

그공으로 선조 37년 호성공신으로 완평부원군에 봉해졌다.

 

ⓒ2006 우관동  

 

1608년 대동법을 시행토록하여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줄였고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시켜 국가경제를 윤택하게 하였으며 군병 방수제도를 개혁하여 농민들의 신역(身役)을 크게 경감했다.

선조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광해군때 대비폐위론을 반대하다가 홍천으로 유배되었으며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사면되면서 재차 영의정에 올라 민심수습에 큰공을 세웠다. 

 

ⓒ2006 우관동 

ⓒ2006 우관동 

 

이원익이 세상을 떠난 후 효종 9년(1658년),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현재의 경기 광명시 소하2동에 그를 배향하는 삼현사를 세웠다. 이후 삼현사는 충현사(忠賢祠)로 불리다가 숙종 2년(1676년)에 임금이 직접 충현서원(忠賢書院)이라고 이름지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006 우관동 

오리 이원익은 죽음을 앞두고 남긴 유서에서도 후손에게 검소함에 대한 당부를 남기고 돌아가셨다.

ⓒ2006 우관동 

 

 

 

주말이다

떠나라 !
낯선곳으로
그대 하루 하루의 반복으로부터 !!

 

 

낯선 곳

                  -  고  은 -

 

떠나라

낯선 곳으로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

 

단 한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아기가 만들어 낸 말의 새로움으로

할머니를 알루빠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그리하여 낯선 곳조차 새로움이 되는 곳

그 낯선 곳으로

 

떠나라 그대 온갖 추억과 사전을 버리고

빈 주먹조차 버리고

 

떠나라

떠나는 것이야말로 그대의 재생의 뛰어넘어

최초의 탄생이다.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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