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아름다운 인생 그시절노래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트로트◇개별곡 스크랩 최고의 가수 나훈아
비타민 추천 0 조회 157 12.12.05 20: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나훈아 : 1947년에 태어났다. 1966년에 가수로 데뷔했다. 1976년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였던 김지미와 동거했다. 40년 동안 2500여곡의 노래를 부르고, 800여곡을 직접 작곡했으며, 그 노래들을 “200여장의 앨범에 담아 2000만장의 앨범을 판매”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4일 동안 열린 1만 1천석 규모의 40주년 기념 공연을 전회 매진 시켰다. 1975년생 김선아, 1970년생 김혜수와 스캔들이 났다는 루머가 돌았다. 생중계된 기자회견에서 “전국민의 숨을 죽이게 했”다. 나훈아는 전설이 아니다. 나훈아는 톱스타다. 42년째.

송대관 : 가수. 나훈아와 오아시스 레코드에서 무명 시절을 함께 보냈다. 나훈아가 ‘천리길’,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으로 데뷔 직후 빠르게 인기를 얻은 반면 송대관은 오랜 무명 시절을 견뎌야 했다. 송대관에 따르면 당시 나훈아는 의리가 많아 성공한 뒤에는 오아시스 레코드사에 들를 때마다 자신에게 중국 음식을 사고, 지방공연마다 자신을 데려가기도 했으며, 송대관 보다 일찍 성공한 후배 가수가 송대관을 무시하는 듯하자 그를 대신 혼내주기도 했다고. 아버지가 무역업을 해서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고, 그 자신도 “고생하지 않고 인기를 얻었다”고 할 정도로 빠르게 스타가 된 탓인지 나훈아는 넉넉한 인심에 호방한 성격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한 때는 집 한 채에 20만 원씩 하던 시절 오아시스 레코드 사장 손진석에게 “판이 잘 팔려서 회사 갈 때마다 50만원, 100만원씩 받으면” 그 돈을 모두 친구들 밥 먹이는데 쓰기도 했다고. 이런 인간적 매력에 태권도와 야구 등으로 다져진 몸, 까무잡잡한 피부와 선 굵은 외모가 더해져 나훈아는 1971년 <선데이 서울>에서 ‘섹스 어필’하는 가수라고 표현할 만큼 화제가 됐다. 당시 가수를 꿈꾸던 조방헌이라는 청년은 영화배우 태현실과 가수 남진과 나훈아에서 이름을 한글자씩 따서 태진아라는 가명을 짓기도 했으니, 나훈아는 한국 스타 산업의 출발이었던 셈.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남진 : 가수. 1970년대 나훈아와 함께 가요계를 양분했다. 인기를 뒤로 한 채 월남으로 파병갔던 남진이 나훈아가 인기라는 소식에 휴가를 얻어 ‘사랑이 스쳐간 상처’를 발표, 나훈아의 ‘두 줄기 눈물’을 제치고 가요 차트 정상을 차지하면서 라이벌전이 시작됐다. 남진은 제대 뒤 1972년 팬클럽을 창단, 그 해 6월 4천여명의 팬들과 야유회를 떠나며 세를 과시했고, 나훈아는 “나와 당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입을 옷”이라며 아기 옷을 보낸 팬의 편지를 비롯, 하루 100여통의 팬레터를 받았다. 그들이 1972년 같은 장소에서 연 리사이틀은 나훈아가 5만, 남진이 3만 관객을 동원했고, 당시 TBC-TV의 간판 쇼프로그램 <쇼쇼쇼>가 남진-펄시스터즈와의 조인트 리사이틀을 열자 MBC는 나훈아를 지원하는 등 방송사의 자존심 싸움까지 끼어들었다. 나훈아는 한 때 남진보다 두 살 어린 자신의 나이를 동갑으로 올렸고, 자신이 남진의 사주를 받았다는 한 정신이상자가 나훈아를 깨진 사이다 병으로 습격, 나훈아의 목이 찔리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남진은 결백한 것으로 밝혀졌다. 1970년대에는 사석에서 같은 자리조차 있지 않았던 두 사람은 1980년대에 화해했다. 1983년 나훈아가 자신이 운영하던 ‘은성 카바레’에 남진을 섭외, 여기에 남진이 선뜻 응해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서로 과거의 감정을 털어냈다고.

강진 : 가수. 나훈아의 ‘땡벌’을 리메이크했다. 나훈아가 20여 년 전에 작곡한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 아내와 함께 나훈아를 찾아갔고, 강진의 성의에 마음이 움직인 나훈아는 직접 녹음까지 하며 이 노래를 강진에게 지도했다. 나훈아가 40여 년 동안 스타로 남아있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꾸준히 사랑받는 그의 자작곡이 원동력이다. ‘무시로’, ‘잡초’, ‘갈무리’ 등 그의 히트곡 중 상당수가 그의 자작곡이고, 그는 공연에서 자작곡 시간을 따로 둘 정도로 곡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 나훈아는 어린 시절 영향 받은 민요에 자신의 창법을 결합, 국내에서 트롯, 혹은 뽕짝 특유의 꺾기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그리고 그는 “뽕짝이 단지 2/4박자의 리듬을 나타내는 소리이지 뜻을 가진 말이 아니고, 트로트는 어원이 영어 ‘Trot’에서 비롯된 말이며 이것 역시 음악의 2/4박자의 리듬의 뜻을 나타내기에” 뽕짝이나 트롯대신 ‘아리랑’이라는 말을 쓰자고 주장한다. 물론 국악 관계자들은 “일본의 황민화 정책에 활용되면서 시작된 트롯을 아리랑으로 부르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그의 주장을 반박하지만, 그만큼 나훈아는 자신의 음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음악을 연구한다.

김지미 : 영화배우. 나훈아와 1971년부터 교제를 시작, 1976년부터 1982년까지 6년 동안 결혼생활(동거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혼인신고는 했었다)을 하며 연예계 최고의 스캔들을 일으켰다. 둘의 결혼이 ‘스캔들’이 된 건 김지미의 결혼이 세 번째였고, 나훈아가 7살 연상의 김지미와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의 아내와 이혼했기 때문. 나훈아는 1973년에 은퇴와 함께 아내와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밝혔지만 지구레코드와 전속 연장계약을 맺으며 은퇴를 번복하고 극비리에 공군에 입대했고, 1976년 제대를 몇 개월 남겨둔 상태에서 이혼하고 김지미와 동거를 발표해 연예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 후 나훈아는 가수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훈아가 태양레코드와 2억 원에 계약을 맺고 가요계 복귀를 선언한 것을 계기로 불화설이 돌자 “(기왕 불화설이) 소문난 김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기며 이혼했다(김지미와 최무룡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며 이혼했다). 나훈아는 “여자는 혼자 살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김지미에게 가진 돈을 모두 주고, 서울 청량리의 ‘맘모스 카바레’에서 한 달에 1억 원씩 받기로 하고 노래를 부르기로 계약한 뒤 한 달 치를 선불 받아 3분의 2를 김지미에게 줬다. 나훈아는 김지미를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준 여인”으로 평하고, 김지미 역시 이혼 뒤 나훈아에 대해 어떤 안 좋은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 나훈아는 재기에 성공, 1985년 당시 신인가수였던 여성과 결혼, 평탄한 삶을 살았다. 최근까지는.

 


배종옥 : 탤런트. KBS <우리가 남인가요>에 출연하던 당시 처음으로 드라마 타이틀을 작곡했던 나훈아와 ‘아담과 이브처럼’함께 불렀고, 이 인연이 이어져 나훈아의 콘서트에서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나훈아는 2000년대 이후 자신의 공연에서 당시 인기 여성 스타들을 초대해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있었는데, 2002년에는 배종옥이, 2003년에는 1983년 영화 <3일밤 3일낮>에서 나훈아의 딸로 출연한 장서희가, 2005년에는 김선아가 함께 노래를 불렀다. 특히 김선아와 함께한 2005년 공연은 MBC에서 <나훈아의 아리수>라는 이름으로 방영, 전국 시청률 17.8%로 영화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등을 제치고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인기 여성 연예인부터 화려한 특수효과, 그리고 나훈아의 지치지 않는 무대를 볼 수 있는 나훈아의 콘서트는 한국에서 중년이상의 관객들에게 문화적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옷 로비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나훈아의 공연 티켓은 장관 부인들에게 제공될 선물 중 하나로 거론됐고, 호텔 업계에서 한 명당 15만 원 가량 하는 나훈아의 디너쇼는 ‘그랜드 힐튼 호텔의 1020석을 4일 연속 매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공연이다. 또한 나훈아의 공연을 보는 관객 중 70%는 늘 입소문을 듣고 온 새로운 관객이다. 나훈아는 과거 공군 복무 시절 군 위문 공연에서 2시간 10분 동안 혼자 무대를 이끌고, 자신의 기자회견마저 마치 콘서트를 보여주듯 강렬한 ‘퍼포먼스’로 장식하는 그의 무대 장악력은 그의 공연에 빨려들도록 만든다. 또한 그는 1972년 남진과 공연 경쟁을 펼치면서 기존 트로트에 당시 유행하던 팝과 포크, 전통 북치기와 가극 ‘갑돌이와 갑순이’까지 넣은 진보적인 공연 마인드를 선보였고, 그 뒤부터 꾸준히 자신의 공연을 발전시켜 공연에서 대형 거북선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홍시’를 레게로 편곡하며, 안드레아 보첼리의 음악까지 소화하는 그만의 블록버스터 콘서트를 완성시켰다.

주현미 : 가수. 나훈아가 1986년에 설립한 아라기획에서 나훈아와 함께 메들리 카세트 테이프를 발표했다. 당시 이 메들리 카세트 테이프는 ‘메들리 시장’을 석권했다. 나훈아는 현재 미국에서 별도의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등 수백억대의 자산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철저하게 팬들을 중심으로 한 나훈아의 마케팅이 밑바탕이 됐다. 그는 TV와 접촉을 끊고 공연에만 매달리면서 공연의 희소성을 높여 회당 억대의 개런티를 받고, 공연장에서 그의 팬에게 새로 발매된 DVD와 앨범, 각종 기념품 등 관련 상품을 팔아 다시 수익을 얻는다. 여기에 자신의 브랜드 파워를 이용해 음치 클리닉 비디오인 <대한민국 나훈아>등도 판매하고, 모든 관련 수익은 아라기획에서 관리한다. 그는 매체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독립적인 시장구조를 가졌고, 오직 공연과 앨범 같은 콘텐츠의 힘만으로 소비자를 늘려나갔다. 물론, 이것은 노래를 위해 하루에 4갑을 피던 담배를 끊고, 두 시간씩 운동을 하며, 필요하다면 공연에서 13억 원어치 다이아몬드가 박힌 옷을 입는 나훈아의 철저한 자기 관리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상벽 : MC. MC가 되기 전 경향신문과 주간경향에서 연예부 기자를 했고, 당시 나훈아가 괴한에게 습격당한 것을 취재하며 그와 친해졌다. 나훈아는 이상벽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하룻밤을 꼬박 그의 곁을 지켰고, 나훈아가 언론과 거의 접촉하지 않은 뒤에도 이상벽과는 함께 목욕탕을 가고, 미국 공연을 동행하며 우정을 나눴다. 이상벽에 따르면 나훈아는 “한국 최고의 스타가 제대로 대우를 받아야 다른 가수들도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해외 공연 시에는 늘 최고급 객실에서 묵고, 호텔 종업원들에게는 몇 백 달러씩 팁을 줬다고 한다. 나훈아는 평소 “스타는 하늘의 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공연 외에는 대중에게 자신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1980년대 이후로는 매체와의 접촉을 점점 줄여왔다. 그는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30%쯤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야 나머지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슈퍼스타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위치에 대한 확고한 의식과 여유가 있다.

또한 SBS <김혜수의 플러스 유>에 출연했을 당시에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들고 나와 자신의 탄탄한 몸매와 뽕짝의 음악적인 해설을 술술 풀어놓아 자신의 이미지를 순식간에 ‘옛날 트롯 가수’에서 젊은 오빠로 이미지를 바꿀 만큼 자기 연출에 능하다. 원하는 콘셉트를 100% 연출하기 위해 의상협찬을 받지 않는 철저한 자기 관리, 자신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신의 노래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냉정함, <비즈니스 위크>를 꾸준히 읽으며 사업감각을 유지하는 사업가적 마인드를 고루 갖춘 남자가 예술가와 스타의 기질까지 동시에 가지면서 데뷔 41년째에 기자들 앞에서 호령을 할 수 있는 톱스타가 됐다. 루머가 퍼지면서 나훈아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게 아니라, 나훈아에 대한 관심이 루머를 만들어냈다. 그는, 이미 톱스타였으니까. 42년째.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