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과 임진강 도보(두 번째-3)
(포천 화적연∼운산전망대, 2022년 8월 27일∼28일)
瓦也 정유순
어제 좀 많이 걸었는지 밤새 곤한 잠을 자고나니 몸이 가뿐하다. 조반을 마치자마자 오늘의 출발지인 한탄강유네스코세계지질공원 표지석이 있는 비둘기낭폭포캠핑장에 도착하여 <비둘기낭폭포>로 내려간다. 실은 어제 저녁에 들려보았으나 땅거미가 질 무렵이라 조금 어두웠고, 폭포 아래까지 내려가는 데크계단도 잠겨 있어서 오늘 아침에 다시 와보는 것이다. 비둘기낭 폭포는 영북면 대회산리에 위치한 현무암 침식 협곡으로 불무산(佛舞山, 663m)에서 발원한 불무천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비둘기낭폭포>
비둘기낭이란 이름은 주변 지형이 비둘기 둥지처럼 움푹 들어간 주머니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비둘기낭 폭포라 부른다. 또 다른 설은 예전부터 산비둘기가 폭포 주변의 동굴에 서식하고 있다고 하여 비둘기낭이라 불린다고 전해진다. 예전 한국전쟁 당시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아 마을주민의 대피시설로도 사용되었고, 군인들의 휴양지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201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많은 관광객들에게 그 아름다움과 비경을 전하고 있다.
<비둘기낭 협곡>
하식동굴 중 한탄강에서 제일 큰 비둘기낭폭포는 하천의 흐름에 의해 만들어지는 동굴로서 절리나 침식에 약한 부분이 깎여 나가면서 만들어 지는데, 지금도 침식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동굴이 더 커지고 있다. 이곳에서는 지질·지형학적으로 하식동굴, 협곡, 두부침식, 폭호 등 하천에 의한 침식 지형을 관찰 할 수 있고, 주상절리, 판상절리 등 다양한 지질구조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한탄강에 흐른 용암의 단위를 한눈에 관찰 할 수 있어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있으며 천연기념물(제537호, 2012년 9월)로 지정되었다.
<비둘기낭폭포>
비둘기낭폭포에서 떨어져 고인 물은 소(沼)를 이루다가 한탄강으로 흐른다. 그 물을 따라 한탄강주상절리길 1코스인 <구라이길>로 접어든다. <구라이길>은 굴과 바위의 합성어로 <굴아이>로 변음 되었다가 <구라이>가 된 것 같다. 일설에는 수풀이 우거지는 여름철에는 협곡이 굴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한탄강주상절리>
<구라이골>
이곳은 한탄강의 지천에 형성된 소규모 현무암 협곡으로 서로 냉각과정이 서로 다른 3가지의 용암을 잘 관찰할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하부와 중부는 주상절리가 잘 발달되어 있는데 하부가 중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고 불규칙하게 발달했으며, 중부는 직경 20~30cm의 주상절리가 규칙적으로 발달했다. 상부의 최상부는 2~3겹의 용암껍질층이 관찰되고 그 아래 주상절리가 발달해 있으나, 중부의 주상절리에 비해 직경이 크게 나타난다고 한다.
<한탄강주상절리>
구라이골을 더듬으며 협곡을 빠져나와 영로대교 아래에서 숨고를 요량으로 잠시 앉아 뒤를 바라보니 어제 힘들게 했던 수리봉이 품에 안아줄 듯 다가온다. 포천시 창수면 운산리와 관인면 중리를 연결하던 옛길은 한탄강에 잠겨 끊어지고 그 위로 영로대교를 건설하여 삶과 문화를 연결한다. 영로대교는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에서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을 잇는 일반국도87호선의 교량이다.
<한탄강 수리봉>
그리고 이 길은 조선시대 한양과 함경도 방면을 잇는 경흥로(京興路)였다. 이 길이 더 유명해진 것은 조선 태조 이성계는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양위하고 고향인 함흥에 머물러 있을 때,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부왕을 도성으로 모시고자 사신을 여러 번 보냈는데, 태조는 이를 괘씸하게 여겨 사신들을 죽이거나 가두어 버렸다.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자 이 길은 심부름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함흥차사(咸興差使) 길이 되었다.
<한탄강 영로대교>
다시 경흥로를 벗어나 주상절리길로 들어서서 얼마를 걸었을까? 협곡을 따라 굽이치던 물길은 아주 눈에 익숙한 모습을 나타낸다.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물 흐름 자체가 한반도 모형이다. 지형(地形)이 한반도 모습을 나타내는 경우는 많이 보아왔는데, 수형(水形)이 한반도를 그리는 모습은 처음 같다. 항상 세상을 걸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자연이 만들어 주는 선물은 위대하고 경외(敬畏)롭다.
<한탄강 한반도 수형>
서둘러 오전을 마감하고 점심식사 후에는 경기도 연천군의 재인폭포로 향한다. 재인폭포(才人瀑布)는 한탄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형 중의 한 곳으로 연천군 최고의 명소로 꼽힌다. 원래 평지였던 곳이 갑자기 움푹 꺼지며 북쪽의 지장봉에서 흘러 내려온 계곡물이 약 18m 높이에서 주상절리 절벽으로 쏟아지면서 폭포를 이루어 장관이다. 현재 폭포의 위치는 윗부분의 침식작용으로 한탄강에서 약 300m 이상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재인폭포>
우선 출렁다리에서 보이는 재인폭포는 현무암을 뚫고 자라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한 협곡 끝에 신비로운 자태로 자리했다. 위에서 떨어지면서 물보라를 이루며 부서지는 하얀 물살과 그 아래 쪽빛으로 펼쳐진 소(沼)는 보는 순간 마음을 사로잡는다. 소의 깊이가 무려 20m에 이른다고 한다. 쪽빛 소가 빚어내는 색의 조화가 거대한 동굴처럼 파인 현무암 주상절리와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고 쏟아지는 물소리가 경쾌하면서도 시원스럽다.
<재인폭포>
데크 길을 따라 폭포 뒤로 돌아서면 이름 그대로 선녀들이 목욕했다는 선녀탕이 나온다. 선녀탕은 현재의 재인폭포를 구성하는 현무암 주상절리 중에서 폭포 상류에 위치하며 풍화와 침식이 빨리 진행되어 만들어진 소이다. 즉, 선녀탕은 재인폭포 상부에서 물리적으로 가장 약한 곳이 침식되어 생긴 폭포호이다. 현재의 선녀탕은 작지만 재인폭포 주상절리가 오랜 세월 얼고 녹기를 반복 침식하여 붕괴되면 미래의 재인폭포가 형성될 곳이다.
<선녀탕>
재인폭포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인근 마을에 금실 좋기로 소문난 줄을 타는 재인 남편과 미인 아내가 살았는데, 마을 원님은 예쁜 아내에게 흑심을 품고 남편에게 재인폭포에서 줄을 타라는 명을 내린다. 줄을 타던 남편은 원님이 줄을 끊어버려 폭포 아래로 떨어져 죽었고, 원님의 수청을 들게 된 아내는 원님의 코를 물어버리고 자결한다. 그 후로 사람들은 이 마을을 '코문리'라 부르게 되었고, 현재의 고문리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재인폭포안내판 사진>
또 다른 이야기는 폭포 아래에서 놀며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던 재인이 사람들과 내기를 했다. "양쪽 절벽에 외줄을 묶어 내가 능히 지나갈 수 있소." 사람들이 믿지 못하겠다며 자신의 아내를 내기에 걸었다. 재인이 쾌재를 부르며 호기롭게 줄을 타자 아내를 빼앗기게 된 사람들이 줄을 끊어버려 흑심을 품었던 재인은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후로 이 폭포를 ‘재인폭포’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재인폭포 출렁다리>
슬픈 전설을 뒤로하고 다시 운산리전망대로 향한다. 이어지는 흙길을 계속 걸었다. 공사가 끝났는지 진행 중인지 모를 출렁다리는 홀로 출렁거린다. 출렁다리 밑을 지나 운산전망대에 오른다. 굽이치는 한탄강 협곡의 풍광이 너무나 멋지다. 주변에는 운산리캠핑장이 있으며, 옆으로 규모가 있는 운산리자연생태공원은 무언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려고 애를 쓰는 것 같다. 생태공원 어느 쪽에서는 황조롱이·붉은배새매·수리부엉이 등 맹금류들이 세상을 응시하며 노려보는 것 같다.
<운산리계곡>
<한탄강>
한탄강 일정을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영평향교 터를 찾아간다. 영평리(永平里)는 한 때 포천 북부지역의 중심지였으나, 1914년 행정 영평리선정비구역 개편 때 읍내면 대사리·광정리 전역과 읍내면 내상동·내하동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영평리라 하고 포천군 영중면에 편입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38선 이북 지역인 영평리 전역이 한국전쟁 때 실지 회복하여 포천군이 되었다가 포천군이 도농 복합 시로 승격하면서 포천시 영중면 영평리가 되었다.
<영평향교유허비>
영평향교(永平鄕校)는 조선 시대 영평군[현재 포천시 북부 지역]에 소재하였던 향교로 1938년 철폐되어 현재 터만 남았다. 향교는 조선 시대 공립학교로 지역 유생들의 강학공간으로 영평지역 내 많은 유생들은 영평향교에서 수학하였다. 영평향교는 1914년 포천과 영평이 최종적으로 통합된 이후 일제 강점기인 1938년 강제로 철폐되었으며, 2011년 영평향교 터에 유허비를 세워놓았다.
<영평초등학교(폐교)>
영평향교 터는 1910년에 개교한 영평초등학교가 차지했지만, 2010년 개교 100주년 기념탑만 세워 놓고 농촌인구의 절벽으로 폐교가 되었다. 그 옆으로는 포천시 향토유적(제39호)으로 지정된 군수들의 선정을 기린 <영평리선정비(永平里善政碑)>가 있다. 1919년 3·1운동 만세 때는 당시 영평면 주민 1,000여명이 시위를 벌여 영평면사무소를 습격했다고 한다.
<영평초등학교 100주년기념탑>
<영평리선정비>
https://blog.naver.com/waya555/222865385160
첫댓글 [영평초등학교폐교] 한때회사일로 횡성두루미골(냇가)
어느폐교된초등학교를보는것같아슬픈마음이든다.
길을 걸으며 시골의 빈 집과 폐교를 볼 때 마다
우리의 미래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요.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