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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7-10)
“나”라는 복음성가를 작사한 뇌성마비 시인 송명희씨의 이야기가 국민일보의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오래 전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태어날 때 의사가 태안에 있는 아기 뇌를 집게로 잘못 건들어 소뇌가 손상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체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소뇌가 제기능을 다하지 못함으로 그녀는 일생동안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살게 됐습니다. 당시 송명희는 집안이 너무나 가난한 탓에 분유한 병 제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일곱살 때까지는 누워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열 살이 넘어서야 겨우 밥숟가락을 스스로 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결핵으로 시달렸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스러운 나머지 그녀는 자기가 태어난 것을 저주했습니다. 사춘기 때는 몇 번이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었던 그 믿음때문에 그녀는 그냥 죽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7살 때 큰 결단을 했습니다. 이제 죽더라도 하나님을 만나고 죽어야겠다며, 하루에 몇 시간씩 목숨을 걸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신을 왜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했는가? 하나님의 뜻을 절규하면서 찾았습니다. 그결과로 그녀는 기도가운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어둠속에서 빛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 "하나님을 믿으라.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죽으리라." 글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거듭났습니다. 자기가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그 후 시간을 정해 놓고 계속 기도하는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시가 터져 나왔습니다. 사실 그녀는 학교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특별하게 문학적인 재능을 타고 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가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알았습니다. 시는 예술가 중에 예술가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온몸을 뒤틀며 시를 썼습니다. 비록 몸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소뇌는 손상됐지만, 사고와 감각을 담당하는 대뇌는 더욱 왕성하게 활동한 것입니다. 바로 이때 쓴 시가 바로
"나"였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의 갖고 있지 않은 것 가졌으니, 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나, 나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나,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가만히 음미를 해 보십시오.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뇌성마비로서 남이 가진 것의 90%를 못가진 자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자 무엇이라고 감사합니까? 남이 갖지 못한 것 내게 있고, 내가 가진 것, 남이 없는 것을 비교하면서 오히려 "주님, 나는 세상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없어도 예수님 한 분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눈으로 보고 그 분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항상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예라고 생각합니다.
송명희 자매는 그 이후에 계속 시상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녀는 시를 써서 극동 방송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시에 곡이 붙여졌습니다. 그녀의 시에 곡을 붙여 '그 이름'이라는 음반이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그녀의 시를 묶어 시집을 펴냈습니다. 시집과 음반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전국 각지의 교회에서 장애를 극복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송명희씨를 초청했습니다. 그녀는 뒤틀린 입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간증했습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지금까지 수천여 회의 국내외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종합 예술 선교단인 "함께 선교단"을 만들어 문화 선교 활동도 벌였습니다. 머리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던 여린 뇌성마비 장애인 소녀가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를 돌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진정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기자는 송명희 시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송명희 시인보다 더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동시에 누가 과연 송명희 시인보다 더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올림픽 공원에는 순백의 웨딩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는 신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화려하게 치장한 그 어떤 신부도 휠체어에 앉아서 고개를 흔들며 절규하듯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이웃을 걱정하는 그녀보다 아름다울 수 없었다.“ 저는 이러한 그녀의 모습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환경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면 그곳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 약점이 있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만 생각하면 불평불만이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무엇이 남들보다 없어도 하나님 나에게 주신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을 아십니까?
저는 그 은혜를 깨닫고 나서부터 진정으로 하나님앞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많이 가졌다고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건강한 사람 중에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자기 뜻대로 다 소원성취하는 사람 입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진짜 감사는 누구에게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면 진정한 감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예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도 남모르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7절) 사도바울을 괴롭히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육체에 가시가 있다는 것은 육체를 괴롭히는 질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부인 터툴리안은 이 육체의 가시를 사도바울에게 있었던 안질이나 두통, 몸에 안고 있는 어떤 질병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안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다메섹 도상에서 햇빛보다 더 강한 빛을 본 후유증으로 안질을 앓고 있었을 것이라 주장하였습니다. 그 증거로 그가 서신을 기록할 때에 대부분 대필을 시킨 것과 (갈 4:15)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는 말씀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육체의 가시로 많은 고통을 당했으며, 이것이 복음을 전할 때 조롱받는 원인이 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8-9절]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그런데 주님의 응답은 가시를 제거해 주신 것이 아니라,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9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스 대신 노라는 기도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감사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오히려 감사하는 제목으로 바뀐 것입니다. ♪ 찬양중에 "날 구원하신 주 감사"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1.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로운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2.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크신사랑 감사해
3.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해처럼 높으신 은혜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사도바울은 기도응답 후에 여전히 가시가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 가시로 인해 감사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 감사를 가시감사라고 불렀습니다. 장미꽃 감사가 어린아이의 감사라면 가시 감사는 성숙한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차원 높은 감사인 것입니다. 열 손가락 중 한 손가락에만 가시가 박혀도 그것에 신경이 쓰여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열 가지 감사할 일이 있어도 한 가지 섭섭한 일이 생기면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한 가지 힘든 일이 열 가지 감사를 꽉 틀어막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 가지 장미꽃 감사보다 한 가지 가시 감사가 더 어렵고 귀한 감사인 것입니다. 장미꽃으로 열 번, 백 번 감사하는 것보다 가시로 인해 고통받을 때 한 번 감사하는 것을 하나님은 더 크게 감동하실 것입니다. 가시 감사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감사입니다.
또 바울은 진심으로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주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러한 가시들은 우리들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육체의 질병문제, 자녀문제, 사업문제, 여러가지 말할 수 없는 아픔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가시는 이 땅에 사는 한,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도 있고 여러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시때문에 불평을 하기도 하고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바울은 이 가시속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오히려 감사합니다. 어떻게 가시가 감사로 바뀌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가시를 통해 세 가지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1. 자만하지 않고 겸손해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의 육체를 직접 찌르는 것은 사단의 사자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일을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고통의 가시가 있을 때 그 가시를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아야 합니다.
또 우리에게 고통이 휘몰아칠 때 인생의 큰 불행으로 해석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련으로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표현할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이 자신을 찌를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라는 말은 스스로 교만하지 않도록, 다른 말로 말하면 겸손하라고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계시가 너무 컸습니다.
2-4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사도 바울은 환상가운데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신비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입으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교만할까 봐 그에게 찌르는 가시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 올라가 신비한 체험을 했지만 땅에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게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아가 너무 강했습니다. 믿기 전에는 율법의 의로 흠이 없을 정도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의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가요한이 저지른 한번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고 자기 선배요, 멘토인 바나바와 끝까지 다투다가 결별할 정도로 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교만한 조건이 많았습니다. 그는 대 신학자요, 흠이 없는 의인이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자였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교만할 조건은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족보를 말할 때 (빌3:5-6)"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라고 했습니다.
그는 가문으로 보나, 학문으로 보나, 영적 체험으로 보나 감히 아무도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시를 주어서 그로 하여금 겸손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든지 은혜로 받지아니하면 그것때문에 교만해집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그 머리때문에 교만해서 안하무인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편 잘 만났다고 남편 자랑, 자식 자랑, 사위 자랑 많이 합니다.
물론 한 번 정도 자랑하는 것은 괜찮지만 앉을 때마다 자랑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디에서 교만병이 들고 있는지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시는 하나님께서 바울이 교만해지는 위험을 막아주는 유일한 처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죄악이기때문입니다.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저들이 교만해질까 봐 40년의 광야 길을 걷게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통해 너를 낮추시고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믿음으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가시로 인해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시 때문에 하나님앞에 엎드려 기도하였고, 결국 주님의 뜻을 발견하였습니다.
10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약한 그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시로 인해 자신의 연약함을 보았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시로 인해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가시가 여러분을 찌르고 있습니까? 그 가시가 찌를 때마다 아프면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사람을 원망하거나 부모를 원망하거나 형제를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가시로 인해서 하늘의 능력을 덧입혀 주실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만 해결된다면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처럼 가시가 있을 때 그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믿음입니다. 어떤 분은 가시가 있는데도 기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지금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기도하라는 싸인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치료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라는 커다란 인생의 고난을 앞에 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예수님도 세 번씩이나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셨던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고난을 만날 때 무엇보다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야고보서에 보시면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기도로 다루지 못할 고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어떤 고난도 옮길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성경의 분명한 약속입니다. 역경이 다가왔을 때 기도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날에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아무리 믿음 좋은 사람도 가시가 찔리면 고통 가운데서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습니다.
아픔의 탄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렘33:3)"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가시 때문에 약해졌으나 그 약함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고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이 이제는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살펴볼 때 어떤 약함 때문에 탄식하십니까? 어떤 상처때문에 아파하십니까? 어떤 약점때문에 부끄러워 하십니까?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오십시오. 혼자 가지고 있는 한 평생 약점이 됩니다. 혼자 괴로워하는 한 평생 상처가 됩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큰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중국에 워치만니라는 유명한 영적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는 너무 너무 큰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런데 그 몸에 떠나지 않는 병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금식하고 철야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병을 고쳐 주시옵소서.' 그러나 그 병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고통 중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던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배를 타고 양자강을 지나가는데 큰 암초가 자기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배가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암초를 옮겨 주시옵소서. 그래야 이 배가 지나가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워치만니야, 이 바윗돌을 옮겨주랴 아니면 강물이 넘쳐서 넘어가게 하랴", "오 주여 강물이 넘쳐서 넘어가는 것이 편하옵니다." 강물이 넘쳐 지나가고 꿈을 깼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잠잠히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주여, 내 속에 있는 바윗돌과 같은 가시를 빼주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은혜로 넘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넘치게 주시면 분명히 내게 있는 환난이나 역경이나 곤고나 어떤 시련도 능히 넘어갈 것을 믿습니다. 주여, 이 종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기도하고 그는 평생을 그 은혜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찌르는 가시를 더 큰 은혜를 체험하고 더 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내게 있는 가시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찔리는 가시가 있을 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3. 약한 것들을 자랑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9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니" 여기 분명히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약한 것들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약함으로 인해 더욱 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손을 굳게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약한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깨어지기 쉬운 토기처럼 부족함이 여기저기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감추고 강하다고 아무리 외쳐도 강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러질 뿐입니다. 의사에게 가는 사람은 자기 몸이 병들었음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병들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건강을 장담하고 있다고 건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 앞에 자신의 참모습을 보면 주님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주님을 의지하면 됩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으로 인해 찬송하고 주님으로 인해 감사하고 주님으로 인해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가 (벧전 4:11) 말씀한 것처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약한 것을 자랑해야 됩니다. (고후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사도 바울이 전에는 강한 것을 자랑했습니다. (빌3:4)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육체적인 자랑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이 다 쓸데없는 자랑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약한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자랑했습니다. "나는 약한데 하나님은 강했고, 나는 부족한데 하나님은 은혜가 충만했고, 나는 하나님을 배신했으나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이것을 자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자랑거리가 많아지기 바랍니다. 그 자랑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며 희망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 살면서 누구나 가시가 있습니다. 저에게도 가시가 있고 여러분에게도 가시가 있습니다. 여러분, 값비싼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조개가 물을 먹기 위해서 입을 벌리고 있을 때 바닷속에 있는 모래 하나가 조개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럼 조개는 모레가 그 살속에 들어옴으로 쓰리고 아프기 때문에 아프다, 아프다 하면서 액체를 자꾸 내보내서 그것을 덮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월이 지나면 그것이 바로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날카로운 모래일수록 진주가 더 강하고 빛나는 진주가 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어떤 시련의 모래알이 나를 괴롭히고 찌를 때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은혜로 감싸고 또 감싸서 내생을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진주와 같이 빛나는 아름다운 생애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 누구나 가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가시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며 한평생을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그렇게 살수 없습니다. 가시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가시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합니다. 가시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은혜가 네가 족하도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늘 사도바울처럼 오히려 가시때문에 기도하고 가시때문에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은혜를 회복하고 그 은혜를 누리고 그은혜를 증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