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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2일(화) 창 27:30~40 후회와 회개의 차이 예산수정교회 새벽기도설교문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에서가 아버지 이삭의 분부대로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사냥에서 돌아와 별미를 드리며 장자의 축복을 요구합니다. 이에 이삭이 야곱에게 속은 것을 알고 두려워합니다. 에서가 눈물로 이삭에게 남은 축복이라도 요구하지만, 이삭은 에서가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간략한 내용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고 야곱이 나아가자 곧바로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옵니다. 그리고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 이삭에게로 와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축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이삭이 놀라서 “너는 누구냐?”(32절)고 다시 묻습니다. 에서임을 확인한 이삭은 33절에 심히 크게 떨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이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축복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이제서야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자신의 무지함에 대한 영적인 눈이 이 사건을 통해 떠지자, 야곱을 영적인 후사로 택한 하나님의 뜻이 이제야 깨달아지게 된 것입니다. 이삭은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하는 데, 에서는 많이 다릅니다. 야곱에게 장자의 복을 빼앗긴 것을 알게 된 에서는 34절에 소리 내어 울면서 야곱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더 나아가 야곱에게 분을 품게 됩니다. 또한 36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37절에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에서는 38절에 자신에게도 남은 복이라도 달라고 하면서 소리 높여 웁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삭과 같이 말씀을 깨닫는 자는 사건을 당하면 돌이키고 회개하지만, 에서처럼 깨닫지 못하는 자는 회개는 커녕 분을 품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의 속임수 때문에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한 에서의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고, 동생 야곱에 대한 질투심과 잃어버린 축복의 기회에 대한 아쉬움과 한탄의 눈물입니다. 에서는 후회만 하고 회개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회개란 단순히 마음으로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회개의 일부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마음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가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평안과 복을 느끼려면 진정한 회개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회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평안과 복을 맛볼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다시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호5:15]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회개란 나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때 죄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은 것이고, 회개란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다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기쁨으로 받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지 숨기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는 결단입니다. 이런 결단이 위기를 넘기기 위한 속임수라면 그것은 ‘거짓된 회개’이고, 이것이 ‘진실한 회개’라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겠다는 그 결심이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성경 (고후7:10)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후회와 회개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같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해 ‘마음과 옷을 찟고 돌아오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결국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새벽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란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그 말씀에 비친 자신의 한없이 부끄러운 모습으로 인해, 그 말씀이 성취됐다는 기막힌 사실에 괴로워하며 통곡했습니다. 그토록 자신했건만 결국 주님이 옳았고 자신은 틀렸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똑같이 실족했지만, 베드로는 살고 후회는 했지만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한 가룟 유다는 죽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베도로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려면, 주님의 말씀을 떠올렸어야 했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마 26:2)”. 유다는 그 말씀에 비친 자신의 부끄러운 행실에, 그 말씀을 성취한 것이 자신이란 사실에 마음을 찢고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말씀이 옳았고 어디 두고 보자 했던 자신이 틀렸음을 절실히 통감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마지막 순간조차도 예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이 ‘선량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는 끝까지 의롭습니다. 바로 가룟유댜의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회개, 즉 하나님이 중심이 아닌 ‘내’가 중심이 된 거짓 회개입니다. 그는 한 번도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했던 적도 없고 주님으로 부른 적도 없었습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자신의 실수를 후회하는 세상 근심 가운데 사망을 이룹니다.
비록 에서가 야곱에게 속았지만,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사건을 통해서 자기 죄를 보지 않기에, 아니 보려고도 하지 않기에 야곱에게 속은 에서가 하나님 앞에서 더 악한 것입니다. 결국 에서는 끝내 돌이키지 않고, 남 탓만 하다가 결국 원망의 눈물을 흘리고야 맙니다. 더 나아가 에서가 마음에 품은 이 질투와 미움은 41절에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41절)는 행동으로 발전합니다.
적용) 내가 말씀을 듣고, 여러 가지 사건을 당하면서 나의 죄를 깨닫기 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정죄와 시기심으로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말씀과 사건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면서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