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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6
벼랑 끝 기도 / 조수현 목사
" 셋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의 앞에 이르러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컨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인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
즐거운 설날 연휴도 지나가고 이제는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기도해야 하는 때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건 생활을 하며 열심히 기도해야 하는 사순절 기간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지난번 연합 구역예배 때에 같은 본문으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만 기도 기간을 한 주일 앞두고 기도의 필연성과 그리고 방법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고자 오늘 이 본문을 택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다. 열왕기하 1장 1절에 보면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아하시야왕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아합왕이 전쟁터에 나갔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죽었습니다.
그러자 설상가상으로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치며 고분고분하던 모압이라는 나라가 반역을 하고 들고일어났습니다.
거기에다가 2절을 보십시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세 가지 악재가 한꺼번에 겹쳐 왔습니다. 살다 보면 이렇게 모든 일들이 뜻대로 잘 안되고 어려운 일들이 겹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여기 아하시야왕이 당한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한가지도 어려운데 세 가지가 한꺼번에 겹쳤으니 얼마나 그 형편이 어렵겠습니까? 가정적으로는 집안에서 막강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국가적으로는 모압이 반기를 들고일어났고, 개인적으로는 이층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여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점점 상태가 중해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러한 아하시야의 죄어드는 듯한 인생의 구덩이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몰아가신 것입니다.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왜 이러한 고난의 구덩이에 집어넣으셨는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제는 하나님을 찾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코너로 몰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방법을 예나 지금이나 많이 쓰고 계십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코너에 몰렸는데도 아하시야왕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요, 하나님께 항복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 와서 두손들며 하나님께 자복하고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오히려 죄에 죄를 더하여서 우상에게로 달려가서 자신의 병이 낫겠는가를 물어 보려 한 것입니다.
원래 아합 집안이 늘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를 즐겨 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코너로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병이 낳겠는가 오히려 우상에게 가서 물어 보려고 한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아 나온다면 그 사람은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려움을 당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그 동안에 신앙생활을 잘 안하던 사람일지라도 이러한 경우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코너로 몰아가시는데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이제 그의 삶은 거두어지는 법입니다. 그는 결국 엘리야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준엄한 예언을 듣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왕하1:3-4)
이제는 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의지하였던 아버지는 죽고, 나라에 반란이 일어나고, 자신은 사고를 당해서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이런데도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이제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우리가 꼭 무엇이 필요해서 달라고 요청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요, 내가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신앙심이 좀 떨어졌을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나의 신앙심을 올리실 작정으로 우리에게 기도의 제목을 주시기도 합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면 보통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서 기도를 하면서 주님을 부릅니다. 결국 그 어려움은 나중에 다 해소되고 남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신앙심이 더 두터워졌다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을 더욱 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효과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방법을 아주 많이 쓰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건강하고 모든 일들이 잘 되어 가고 집안에 어려움이 전혀 없으면 그 사람에게 전도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 사람은 저절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오는 때는 바로 어려움이 닥쳤을 때입니다. 성인이 되어서 갑자기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경우입니다.
인생의 지독한 어려움이 닥치자 결국은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께 나와서 도와 달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잘 믿다가 낙심한 사람들. 신앙이 시들해진 사람들. 그 사람들이 저절로 그냥 다시 신앙이 회복되고 예수 잘 믿게 되는 법은 드뭅니다. 대부분 어떤 계기가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됩니다.
바로 그 계기를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십니다.
바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아하시야 가정도 꽤나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이제 아합을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정하시고 전쟁터로 보내어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 그의 아들 아하시야는 건져 보시려고 시도를 하셨습니다. 왕으로 즉위를 한 아하시야에게 모압이 반란으로 대적을 하는 나라의 어려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2층 난간에서 떨어져서 심하게 다치는 사고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하시야는 그 삼중고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상에게로 가 버렸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십니다. 그는 죽게 됩니다. 이것이 열왕기하 1장의 첫 번째의 메시지입니다.
세 가지의 어려움을 주면서 아하시야왕의 반응과 행동을 보고 계시던 하나님께서는 아하시야가 절박한 위기를 당해서도 우상을 계속 의지하자 이제는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어서 최후 통첩을 하십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인생이 절박한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세상의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중한 죄라는 것을 이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을 당하게 하는 무서운 죄였습니다.
기도 안하는 것이 뭐 얼마나 대단한 죄인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나님을 찾으라고 이렇게 몰아가시는데도 기도를 안하는 것은 그 사람을 거두어 가실 정도로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라고 어려움을 주셨는데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사실 뭔가 굉장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 잘못된 것이 바로 죄입니다.
엘리야로부터 하나님의 선언을 들은 아하시야왕은 이번에는 오십부장과 그리고 그에게 딸린 50명의 병사들을 보내어서 그 엘리야를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아마도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를 데려와서 어떤 도움을 얻으려고 해서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조금 깨닫고 하나님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상에게 물어 보려고 했다가 차단 당하자 이제는 다행히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찾은 것입니다. 그를 데려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기도의 자세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여기 성경에 우리가 좀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 등장합니다. 조금 깨달은 아하시야가 이번에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서 자기의 부하 오십부장과 그에 딸린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냈습니다.
엘리야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서 왕의 말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나와서 그 오십부장과 오십명을 그 자리에서 다 불살라 버렸습니다.
또 두 번째로 오십부장과 오십 명을 보내었는데 그들도 엘리야 선지자 앞에서 다 불살라 버림을 당했습니다. 너무나도 무서운 장면이 나옵니다.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단지 아하시야왕의 심부름을 할뿐인데 두 차례에 걸쳐서 도합 100명이 불살름을 당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100명의 사람들이 이처럼 순식간에 죽임을 당했다면 이 사건으로 오고 오는 세대 사람들에게 주는 아주 중요한 교훈이 내포되어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첫 번째 오십부장이 산꼭대기에 있는 엘리야에게로 와서 말하는 그 말을 보십시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이것은 명령하는 말입니다. "왕의 명령입니다. 엘리야여 내려오시오!"
지금 왕은 절박한 순간을 맞이해서 도움을 요청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왕은 오십부장을 보내어서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둥병을 고치러 엘리사 선지자의 집에까지 왔는데 그의 마음에는 엘리사 선생이 마중 나와서 자기에게 절하고 자기를 영접할 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오십부장이 아하시야의 심부름으로 와서 엘리야를 데려가려는 태도를 보십시오.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지금은 왕이 말씀의 명령을 할 때가 아닙니다. 도와 달라고 간청을 할 때입니다. 이러한 고압적인 태도의 요청은 일언에 거절된다는 것을 본 사건은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 오십부장과 오십 명을 살라 버렸습니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역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오십부장과 그 오십 명을 살라 버렸습니다.
세 번째로 다시 오십부장과 오십 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오십부장은 태도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열왕기하 1장 13절입니다. "왕이 세 번째 오십부장과 그 오십 인을 보낸지라 셋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의 앞에 이르러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컨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인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그는 무릎 꿇었습니다.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간구합니다.
"나의 생명과 이 오십인의 생명을 귀히 보소서"
참으로 절박한 기도의 모습입니다.
지금 이 오십부장은 자신의 생명이 촌각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납해 주시지 않으면 자신도 역시 불살라집니다. 그러므로 이 오십부장은 생명을 걸어 놓고 하나님 앞에서 살려 달라고 애원의 간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이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음성이 내려왔습니다. "엘리아야 저 오십부장을 따라서 산에서 내려가라" 생명을 걸어 놓은 기도. 바로 벼랑 끝에선 기도의 모습입니다.
바로 아하시야왕이 이렇게 기도했어야 했었습니다.
아하시야왕은 그의 생명이 이미 벼랑 끝에 걸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해 주시지 않으면 그는 그 병으로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 번째의 오십부장의 마음을 가지고 완전히 무릎꿇고 엎드려서 간구하여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기도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의 오십부장은 이렇게 했더니 과연 위기의 순간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은 살려주셨습니다. 아하시야왕이 바로 이러한 태도로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습니다.
여기 오십부장은 자기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기의 기도에 자기의 부하 오십 명의 생명도 같이 달려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보통 나뿐만 아니라 나에게 딸린 모든 식구들의 운명까지도 달려 있습니다.
첫째로 어려움이 생겼을 때는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둘째로 기도할 때는 꿇어 엎드려 생명을 걸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우리는 살고 하나님께서 응답 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죽는다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절박성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에 생과 사가 걸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도들을 보면 들어주시면 좋고 안 들어주시면 말고 이런 식이 아닙니다. 자신과 그리고 또한 오십 명의 생명이 걸려 있는 절박성을 인식하고 한 기도들이 대부분입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절박성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안타까운 아하시야왕 그는 첫째로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로 그는 생각을 돌이켜서 엘리야를 불러오려고 하였으나 자신의 생명이 벼랑 끝에 달려 있음을 인식하며 하나님께 무릎꿇고 매달려 간구를 하지 못했습니다.
아하시야왕은 아마 죽어서도 이것이 한이 되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니까 부자와 나사로의 말씀에서 나오는 부자가 죽은 후에 지옥의 고통에서 어떤 한을 품고 더욱 몸부림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이 땅에서 살 때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의 형제들이 또한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옥의 고통에서도 부자는 그것이 한이 되어서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하시야왕은 즉위 2년만에 그렇게 해서 기도 한번 간절히 해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는 죽은 후에 지금까지도 그것이 한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왜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했을까?' '내가 왜 하나님께 내 생명을 살려 달라고 목놓아 간절히 원없이 부르짖지 못했을까?'
우리는 종종 학창시절에 우리가 공부를 좀더 열심히 못한 것에 대해서 평생 한을 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식들은 공부를 잘 시켜 보려고 애를 씁니다. 공부 안한 것이 평생 한이 됩니다.
또한 부모님 돌아가셔서 안 계신 분들은 이번 설에도 부모님 생각이 나셨을 것입니다. '내가 왜 부모님 살아 계실 때에 좀더 효도를 못했을까?' 이러한 것들이 한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안하면 그보다도 더욱 심각한 후회와 한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왜 이 땅에서 예수를 좀더 열심히 믿지 못했을까?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기도하라고 몰아가실 때에 왜 내가 좀더 간절히 원없이 생명을 걸어 놓고 기도하지 못했을까?'
전세계에 200에 가까운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전 신문을 보니까 세계에서 1997년도에 분쟁이 일어날 소지가 다분한 곳은 저 이라크 이란 지역과 그리고 우리 한반도라고 미국의 어떤 기관이 단정했다는 보도가 실려 있었습니다. 정말로 올해는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우리 나라의 위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간절히 생명 걸어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가정을 위해서, 나의 자녀들을 위해서, 나의 교회를 위해서, 나의 사업을 위해서, 정말로 목숨 걸어 놓고 기도해야 하는 때가 다가왔습니다.
정말로 내 기도에는 내 나라와 교회와 우리 식구들의 운명까지도 달려 있다는 절박성을 가지고 이번에는 벼랑 끝에선 마음으로 원없이 간구하시는 기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