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기법(10)-맥주 세 병 안주 하나
-피동은 소인이다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수필가는 언어와 더불어 사는 사람,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수필가는 인간이 더럽힌 글의 얼굴을 닦아주고, 멍든 글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글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길을 터주는 존재다. 글은 세계 인식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세계를 구성하기도 한다. 글이 어긋나면 세계도 어긋난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세계를 꿈꾸는 자라면, 마땅히 글을 사랑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야 할 것이다.
나는 최근, 섬세하고 따뜻한 수필을 쓰는 한 작가의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간혹 학자나 신문기자, 어설픈 작가가 쓴 글을 읽으면서 문장이 이래서야 정말 큰일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문인들조차 문장을 바르게 쓰지 못한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일부 사람들만의 일이 아닌 것 같다. 이미 등뼈가 굽은 물고기처럼 바르게 고치기도 힘든 국적불명의 비문이 문단에도 횡행하고 있다.
최근 우리말의 구조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은 비인칭 주어의 남용과 피동형, 수동형, 사역형 문장이 엄청나게 증가하는 현상이다. "남은"이라 하면 될 것을 "남겨진"이라고 피동형으로 표현하여 주체를 사물처럼 취급한다. 이런 현상은 객관성을 중시하는 논문/보고서 양식을 좇아가거나 외국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프리초프 카프라의 『생명의 그물』을 번역한 책을 보면, "지속가능한 사회란 미래 세대의 번영을 파괴시키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사회를 뜻한다." 같은 문장이 곳곳에 나온다. 원문에 충실한다 하더라도 "지속가능한 사회란 미래 세대의 번영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요구도 충족하는 사회를 뜻한다." 정도는 되어야 하고, 좀더 바르게 하자면 "지속가능한 사회란 한 세대가 미래 세대가 번영할 기반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욕구도 충족하는 사회를 뜻한다."처럼 주체를 분명히 해야 마땅하다. 글을 좀 안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잘못된 문장을 함부로 쓰다 보니, 저 아래 동네 목욕탕에는 "현금이나 귀중품은 반드시 보관시켜 도난당하지 맙시다."라는 국적불명의 문장을 버젓이 걸어두고 있다.
요즘 책을 읽다 보면, '-되다, -지다, -시키다, -버리다', 심지어, '-되어지다'가 용언에 무차별로 붙어 있어 난감할 때가 많다. 이런 문장은 독자를 심리적으로 억압하면서 암암리에 특정 사실을 강제하기 때문에, 독자가 문장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기가 어렵다. 자연히 독자는 용언이 강제하는 사실에 종속되어 창조적인 읽기를 할 수가 없다. 지은이 또한 통사론적 비문이 되지 않도록 주체와 객체의 자리를 바꾸어야 하고, 문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비일상적 형태의 문어체를 애써 만들어야 하니 여간 불편하지 않을 성싶다. 그럼에도 그런 문장을 써야 안심이 될 만큼 우리말은 이미 심하게 오염되어 있다. 행위의 주체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객체가 주인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우리가 사용하는 말도 물질만능주의 시대의 제물이 된 셈이다.
피동형이나 수동형으로 표현하지 말라. 피동은 소인이다. 소심한 애인이란 말이다.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이것은 어느 사회 평론집 제목이다. ‘세상을 열다에서 열다는 타동사이다. 그리고 이것의 피동(被動)형은 열리다이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피동형 보조 동사~지다가 붙어서열려지다라는 표현이 쓰이고 있다. 따라서열려지다는피동+피동의 형태로 이루어진 겹피동형표현인 셈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언어 생활에서 크게 잘못된 습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은 피동 지향적인 언어 표현 습관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오류를 범하는 표현이 바로 ~지다라는 보조 동사의 쓰임이다. 트다/터지다, 깨다/깨지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지다는 피동의 뜻으로 쓰이는 보조 동사이다.
(1)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짐에 따라 사람들은 문화활동에서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되찾으려 한다. 누구에 의해서 이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것일까? 행위의 주체는 행방이 묘연하고, 오직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서 변형된 현상일 뿐이다. 사회가 복잡하고,다양하다는 것은 우리가 사회적 현상을 보고서 스스로 내린 판단이지 실제 그런 움직임을 뜻하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피동형 보조 동사를 붙여서 표현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습관이다. 예문 (1)의 경우 복잡하고 다양하여와 같이 능동형 표현으로 고쳐 쓰는 것이 좋다.
(2) 이와 같이 자유와 평등은 양분되어 생각되어질 수 없고 서로를 보충해 주는 상보적 관계가 더욱 적당할 것이다.생각이 되어지다는 표현은 인공 지능을 달고서 사람으로부터 조작을 당하고 있는 로봇에게나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상, 즉 목적어에 해당하는자유와 평등을 주어로 꺼내어 쓰다 보니 이와 같은 수동형 표현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문 (2)의양분되어는양분하여로, 생각되어질은 생각할로 고쳐 써야 한다. 이 밖에도 피동형 보조 동사 ~지다를 무리하게 사용한 예는 얼마든지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는 ~한 것으로 보여진다, 나타나진다따위와 같은 억지 표현도 종종 눈에 띈다.
(3) 하지만 이러한 객관적 서술 방식은 역사적 사료들을 단순히 시간적 흐름에 열거해 놓았기 때문에 내용이 건조해지고 딱딱해지며, 역사적 사료들 하나 하나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예문 (3) 역시 피동형으로 쓸 이유가 없는 문장이다.건조하고딱딱하다는 것은 역사적 사료를 읽는 사람의 느낌이지 구체적인 동작이 아니다.건조하고 딱딱하며와 같이 표현해야 자연스럽다.
(4) 예술 사진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담겨져 있고 보는 사람들이 그 주제를 받아들임으로써 감동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예문 (4)와 같은 피동형 표현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의 구조를 보면 주어가예술 사진이다. 따라서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 관계도 적절하지 않으며주제가 담겨져 있고의 피동형 표현이 문제가 된다. 이는주제를 담고 있고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예문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말의 표현 중에 피동형 표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갈수록 사람들이 능동적인 표현보다는 피동적인 표현에 익숙해져, 능동형으로 써야 할 것을 피동형으로 바꾸어 마치 그것이 옳은 표현인 양 더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잘못된 언어 습관이 마치 유행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번지고 있다.
언어 사용 습관은 알게 모르게 우리들 의식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피동형 표현을 자주 쓰는 사람은 의식 자체가 수동적, 피동적일 수밖에 없으며,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소극적인 삶을 살기 쉽다. 능동적인 사람과 수동적(피동적)인 사람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 인간상인가? 당연히 능동적인 사람 쪽이다. 그렇다면 언어 표현에 있어서도 되도록 능동적인 표현을 쓰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능동태에서는 행동이 직접 표현된다. “존은 실험을 했다.” 수동태에서 행동은 간접적이다. “실험은 존에 의해 실시되었다.” 가능하면 능동태로 쓰라. 당신의 글은 더욱 직접적이고 힘차게 된다. 단락은 더욱 간결하게 된다. 아래 예문에서 보듯이 수동태는 비교적 미약하고 부자연스럽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