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신응식(申應植)
본관 : 아주 신씨
신체 : 160cm, 50kg
출생 : 1935년 4월 6일
충청북도 충주군 노은면 연하리
(現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 상입장마을)
사망 : 2024년 5월 22일 (향년 89세)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마두1동 국립암센터
직업 : 시인, 평론가, 교수
상훈 : 은관문화훈장(2001년 수훈)
학력 : 노은공립국민학교 (졸업)
충주사범학교병설중학교 (졸업)
충주고등학교 (졸업)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 / 학사)
가족 : 아버지 신태하(申泰夏), 어머니 연인숙(延仁淑)
아내 이강님(李康姙) [1940년 2월 5일 ~ 1971년 9월 30일. 전주 이씨]
종교 : 불교
데뷔작 : 갈대 (1956)
신경림은 1935년 봄 충북 충주군 노은면 연하리에서 4남 2녀의 맏아들로 태어난다.
충주군은 나중에 중주시와 중원군으로 분리 되었다가 행정통합으로 다시 중주시가 되었다 현재는 충주시 노은면
본명은 응식(應植)이고, 경림은 문예지에 작품을 투고하던 시절부터 쓰던 필명이다.
1989년 3월, 신경림을 비롯한 남북 작가 회담 대표들이 경찰에 연행되었을 때의 일이다.
한 명씩 조사를 받던 중에 형사가 “신응식.” 하고 부르자 그것이 신경림의 본명인 줄 모르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 때 신경림이 불쑥 일어나더니 쑥스러운 표정으로 “나여.” 하고 나선다. 긴장이 감돌던 좌중에서는 와르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신경림네는 시골에서 살았지만 농촌의 그만그만한 집안은 아니었다.
한학을 한 할아버지의 형제들은 모두 개화주의자로 일찍이 한글 전용과 농촌 계몽 운동에 앞장섰으며 후손 중에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시인의 아버지는 면 서기와 농협 서기로 일했는데 술과 친구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독립 운동에 비밀 자금을 지원하던 명문가 출신으로 한학에 밝고 꼼꼼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당숙이 하나 있었는데 일자 무식이었으나 악단의 단장을 맡고 연극과 소리, 피리 불기 등 예능에 재주가 많은 이였다.
신경림은 어릴 적에 이 당숙과 즐겨 어울린다.
1943년 신경림은 노은국민학교에 입학한다.
4학년 때 그는 당숙과 어른들의 얘기 속에 낙원의 이미지로 나오곤 하던 목계에 가게 된다.
그는 이 때 본 목계의 풍경을 공책 한 귀퉁이에 글로 남기는데, 이것이 선생의 눈에 띄면서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1948년 충주사범병설중학교에 입학해 정춘용 선생을 만난 것은 그의 문학 인생에 커다란 행운으로 작용한다.
담임이자 문예반 지도 교사이던 정춘용은 일찍이 신경림의 시재(詩才)를 알아보고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정춘용 선생의 권유로 그는 나중에 졸업만 하면 취업이 보장되는 사범 학교를 그만두고 충주고등학교에 들어간다.
그가 사범 학교를 그만둔 더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이 전교에서 풍금을 칠 줄 모르는 단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범 학교 학생이 풍금을 칠 줄 모른다는 것은 결격 사유에 들었다.
중학교 시절 신경림은 집안에 굴러다니던 이광수 · 김동인 · 현덕 · 이기영 · 김내성 등의 문학 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댄다.
6·25는 그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터진다. 피난살이를 하던 그의 가족은 9·28수복 뒤 곧바로 집을 찾았다가 낭패에 빠지기도 한다.
1·4후퇴 때 다시 피난을 간 그는 미군 하우스 보이로 몇 달을 지낸 끝에 가족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전란중에 시인의 집안은 좌익과 우익의 틈바구니에서 해를 입고 풍비 박산의 비운을 겪는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집안에서 운영하던 광산은 폐쇄되고,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당숙이 목숨을 잃기도 한다.
9·28수복 후 너무 성급하게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을 피해 또 한번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등 학교에 들어간 시인은 학업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한 나절씩 남한강가를 배회하는가 하면 국어 시험지를 백지로 내는 등 문제 학생이라는 딱지가 붙을 지경이 된다.
그러나 당시 국어 교사이던 유촌 선생은 처벌 대신 시 다섯 편을 써오라는 과제를 내리는데, 이 과제물을 매개로 신경림은 뒷날 평론가가 되는 유종호와 처음 만나게 된다.
바로 유촌 선생의 아들이며 고등 학교 선배인 유종호가 신경림이 낸 시를 읽고 그를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맺어진 인연은 나중까지 이어져 문단에서 유종호는 시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대학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그는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며 어렵게 서울 생활을 유지한다.
1956년 신경림은 이한직의 추천으로 진보적 성향의 문예지 『문학예술』에 「갈대」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이즈음 그는 금서를 읽던 친구가 진보당 사건으로 검거되는 일을 겪는다. 그는 이 일로 말미암은 충격과, 평소 품고 있던 문단에 대한 불신이 겹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한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까지 신경림은 평창 · 영월 · 문경 · 춘천 등지를 떠돌며 광부 · 농부 · 장사꾼 · 인부 · 강사 등으로 지낸다.
하루는 술자리에서 정권을 비난하는 말을 몇 마디 했다가 붙잡혀 가서 29일 만에 풀려나기도 한다.
이 시기에 그는 시와 점점 멀어지면서 사회 과학 서적은 더러 봐도 문학 서적은 읽지 않으며, 소중히 간직해온 시집과 문학 잡지를 몽땅 버리기까지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서 비롯된 무력감 내지 절망감, 그리고 동료 시인들에 대한 불타는 듯한 질투심이 그를 이런 식으로 흐르게 만든다.
1965년 신경림은 충주의 한 사설 학원에서 영어 강사 노릇을 하며 영어로 된 『공산당 선언』의 문장을 가르치는 위험한 짓을 하는데, 어느 날 시내에서 거지 몰골로 쏘다니던 김관식과 만난다.
술을 걸친 김관식은 막무가내로 “네가 안 쓰면 나도 안 쓰겠다.”며 그의 꺼져가는 시심에 불씨를 지피고, 시골 생활에 적당히 지쳐 있던 그를 서울로 불러 올린다.
김관식의 강권으로 충주에서 짐을 싸들고 서울 홍은동 김관식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 시인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 쓰기에 몰두한다. 마침내 『농무』의 시편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
꽹가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 철없이 킬킬 대는구나 /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
서림이처럼 해해 대지만 이까짓 /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신경림, 「농무」, 『농무』(창작과비평사, 1975)
1970년 신경림은 오랜 침묵을 깨고 유종호의 소개로 『창작과 비평』에 시 몇 편을 발표하는데, 「농무」는 이 가운데 한 작품이다.
민중적 화자를 내세워 민중의 현실과 정서를 생생히 보여주는 그의 빼어난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은 당대 문단에 신선한 충격파를 던진다.
이 때만 해도 문단 일각에서는 그의 시를 ‘이상한’ 시로 치부하며 애써 무시하려는 기류가 흐르기도 한다.
그러나 1973년 3백 부 한정판으로 자비 출판한 시집 『농무』가 서점에 깔리자마자 싹 팔려 나가면서 신경림이라는 존재는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크게 주목받게 된다.
신경림과 민요의 긴 인연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의 일이다.
이 무렵 민중적 화자를 내세워 그들의 삶과 언어로 그들의 정서를 표현하려는 시인의 태도는 더욱 굳건해져 민중이 스스로 쓰고 읽는 시를 지향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찾아낸 것이 바로 민요다.
시인은 자신이 쓸 시의 전범을 민요에서 찾고, 민요의 전통을 차용해 민중성을 넓혀나간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무 /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 석삼 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신경림, 「목계장터」 전문, 『새재』(창작과비평사, 1979)
1979년 봄, 신경림은 민요와 『농무』의 민중적 서정이 어우러진 두 번째 시집 『새재』를 내놓는데, 여기에 실린 「목계장터」는 특히 절창이어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목계장터」는 민요의 기본 율조인 4음보의 가락을 바탕에 깔면서 3음보 가락을 적절히 배치해 지루함을 조절하고 있는, 이 시대 민중 문학이 거둔 또 하나의 뜻깊은 성과다.
단형 소품 서정시 32편에 장시 「새재」가 실려 33편으로 구성된 『새재』에서는 시인의 신념과 민중적 가락이 이전보다 더욱 구체성을 띤 채 펼쳐진다.
신경림은 두 번째 시집 『새재』를 펴낸 지 이태 만에 제8회 ‘한국 문학 작가상’을 받는다.
첫댓글 시인의 생애, 사상과 행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