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이 글은 우리 가족이
한 식구로서, 동지로서 겪었던
생생한 기록이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하루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우리가 사는 동북지방은 공산당 정권이 제일 먼저 들어섰다.
공산당은 정권을 잡으면서 토지개혁부터 실시했다. 지주와 부농들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모든 농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했다. 덕분에 농민들은 자기의 땅을 갖게 되어 인간이 살아가는데 기본인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그때는 인심이 후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너무나 짧았다. 중공은 여러 단계에 거쳐 토지를 공유화한 후 인민공사(人民公社), 대약진(大躍進),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등 정치 태풍을 몰고 와 중국을 살벌스러운 사회로 만들었다. 공산당은 모든 사람에게 세뇌교육을 시켰다.
중공은 스스로를 하늘에 비기며 순천자존 역천자망(順天者存 逆天者亡)이라며 인민을 위협했다. 그 뜻은 하늘(공산당)에 순종하는 자는 살고 하늘(공산당)
에 역행하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다. 그처럼 공산당은 인민에게 절대 충성을 강요했다. 공산당과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잡아들이고 숙청했다. 나도 그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다.
모택동이 죽자 중국은 기나긴 암흑의 터널을 지나 모쪼록 빛을 보게 되었다. 내 일생에 이렇게 좋은 세상이 올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변화된 현실에 만족하며 감사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였다. 공산당은 1989년도 6윌4일에 북경천안문 민주화 학생운동을 탱크로 유혈진압한 후 그 마수를 기독교인들에게 뻗었다. 나는 한동안 미국의 이바울(이성윤) 목사님의 위탁을 받고 개척 교회에 건축헌금을 조달하는 일을 맡아 했다. 그런데 6.4 천안문 사태로 이바울 목사가
중공에 의해 영구 추방 당했다. 공산당의 법망이 내게로 좁혀들어 오고 있다는 정보가 흘러 나왔다.
중국은 내가 49년이나 살아왔고 나의 아내와 아이들이 태어난 곳이다.
어지간하면 우리는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공산당에 위협을 느낀 나는 갑자기 원치않은 탈출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1989년8월1일 날, 우리는
운남성 따이주 징퍼주(雲南傣族景頗族)자치주에 속해 있는 미얀마와의 국경도시인 루이리(瑞麗)에 도착하여 여관에 자리잡았다.
이틑날 나는 아들과 함께 국경지대를 답사하며 최적의 탈출구를 물색했다.
8월3일(음 기사년己巳年7월2일)목요일에 우리 일가족은 루이리(瑞麗)와
완딩(畹町) 중간 지점에 있는
숲속으로 잠복했다. 우리는 중국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이름도 모르는 숲속에서 보내게 되었다.
숲은 열대 관엽 식물들이 우거져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아왔던 열대식물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니 감회가 깊었다. 우리는 먼저 대나무 숲에 자리를 잡았다. 삼복철이라 숲속은 무더웠다.
더위는 그늘이 있어서 그런대로 이겨낼 수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피에주린 모기떼들의 공격이었다. 우리는 풀을 뜯어서 한 웅쿰씩 쥐고 몸에 달라붙는 모기를 합동정신을 발휘하여 서로 쫓아 주었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뱀 한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우리 쪽으로 기어왔다. 뱀은 사람이 무서웠던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사라졌다. 모기와 뱀도 무서웠거니와 제일 무서운 것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람을 꺼리는데 골짜기에서 한 남자가 우리 쪽을 향해 걸어 오는 것을 딸이 발견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듯 일제히 땅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나는 잔뜩 긴장되어 그 사람의 향방을 예의주시했다. 아내는 오히려 차분하게 눈을 감고 그 사람을 다른 길로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숨막히는 시간이었다. 그 사람은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가 사라졌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나 긴장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우리는 그곳이 안전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좀더 깊은 숲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그곳에서 중국에서의
최후의 오찬을 먹으려고 음식 보따리를 풀었다.
아내가 치킨을 찢을 때였다.
왠 야윈 검둥개 한마리가 우리 쪽으로 달려오며 짖어 댔다.
우리와 가까워지면서 검둥개는 더 기승을 부리며 짖어 댔다. 그러나 개도 사람이 두려운지라 더 이상 전진하지는 않았다. 아내가 치킨이며 만두를 개에게 던져 주었다. 개는 먹을 것을 보더니 더 이상 짖지않고 게걸스레 먹었다. 생각밖에
한끼 잘 얻어먹은 개는 경계심을 풀고 우리 앞에 바싹 다가와 앉아서
꼬리를 흔들었다. 기쁘고 고맙다는 표시였다. 원수 같았던 개에게 작은 사랑을 베풀었더니 금방 친구가 되었다.
방금까지 맑던 하늘이 천등번개를 치며 우리를 놀라게 했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살겠다고 이부자리도 챙겨 왔기에 비가오면 큰 낭패를 볼 수 있었다. 먹구름이 금방 비를 내릴 것 같았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내가 작전계획을 세밀하게 짜지 못해 숲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길어진 것이다.
열대의 낮은 특별히 길었다. 밤 열시가 되어서야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미지의 땅인 미얀마를 향해 출발했다.
우리가 걷는 길은 전부 논두렁 길이었다. 경사진 전답이라 논두렁이 높고 좁아서 걷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딸은 발을 헛디뎌서 논두렁 아래로 떨어지면서도 울지는 않았다.
울면 발각이 될까봐 어른처럼 모든 것을 참아냈다.
하늘의 비구름은 여전히
걷히지 않았다. 어둠은 갈 수록 더 짙어져 우리의 행진을
방해했다. 애들은 너무나 지쳐서 좀 쉬었다 가자고 했다 . 나는 앉으면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애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먹구름이 낀 하늘에 갑자기 거대한 반딧불 무리가 나타났다. 신기루와 같은 현상이었다. 반딛불이 별을 대적하랴는 말은 있지만 별은 멀고 구름에 가려서 도음이 안됐지만 반딧불은 가깝고 많아서 행진하는데 등불이 되어 주었다.
반딧불이 가끔 발등에 떨어지기도 했다. 딸은 따갑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정신작용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행진하니 미얀마 쪽 산에서 귀에 익숙한 뻐꾸기 소리가 들려 왔다. 뻐꾹 뻐꾹 소리는 마치 행진 나팔소리와 같이 지친 우리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좀 더 걸었더니 강이 나타났다.
이 강은 중국과 미얀마의 경계선인 완딩허(畹町河)
였다. 본래는 작은 시냇물 같았는데 여름장마에 물이 많이 불어서 강이 되었다.
나는 강의 깊이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강을 건너 보았다. 깊은 곳이라 봤자 허벅지까지 오는 수심이었다. 물살이 좀 셌지만 내가 건너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와 아들이 먼저 짐을 건네다 놓았다. 나는 강을 건너와 딸을 업고 건너쪽 강둑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울면 안된다고 단속한 후 다시 강을 건너 왔다. 이번에는 아내가 강을 건널차례였다. 아내는 강에 들어서기도 전에 지례 겁을 먹고 온 몸이 사시나무 떨 듯 했다. 나는 아내가 담이 큰 줄 알았는데 이렇게 겁이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다.
해외에 나가 사는 동포들은
출가한 여성들이 친정을 그리워 하듯이 모국을 사랑하며 그리워 했다.
1960년대에 조선의 복구사업을 지원한다고
중국의 많은 조선족들이
북조선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대부분 조선족들이 배고품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탈북하여 중국으로 돌아 왔다.
아내의 아버지도 그 시기에 애국심 하나를 품고 온 가족을 이끌고 북한의 복구사업에 지원해 나갔다.
그러나 배가 너무 고파서 살 수가 없었다. 애국심도 굶주림은 이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밤중에 살얼음 낀 두만강 푸른 물을 건너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아내로부터 이 이야기를 여러번 들었다.
그런 경험도 있는 아내가 이 작은 강에 그렇게 주눅이 들줄은 몰랐다. 나는 중국 땅을 다시 밟지 않으리라는 비장한 결의로 몸에 지니고 있던 호구부
(戶口簿호적등본)
를 찢어서 강물에 던졌다. 나의 이 무모한 행동이 훗날 무국적자가 되어 난민 판정을 받는데 크게 기여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와 아들이 좌우에서 아내의 팔을 잡고 강물에 들어섰다. 그런데 아내는 겁에질려 다리힘이 다 빠져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아내의 떨림이 내 온 몸에 퍼져 마치 내가 떠는 것 같았다. 우리 셋은 물살에 떠밀려 내려 갔다. 만약 아내가 우리의 필을 놓으면 그대로 강물에 떠 내려
갈 수밖에 없는 위기의 시간이었다. 그래도 아내가 우리의 팔을 끝까지 꼭 잡고 놓지 않아 강을 건너 미얀마 땅을 밟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우리는 물살에 너무 많이 밀려 내려와서 딸을 찾을 수 없었다. 딸이 시간이 길어지자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그 울음소리 덕분에 딸을 싑게 찾을 수 있었다. 딸은 어찌나 놀랐던지 말도 제대로 못하고 흐느끼기만 했다. 아내는 그런 딸을 와락 끌어 않으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우리는 다시 행진을 강행하여 칠전팔기 끝에 어느 간이 농막에 도착했다. 애들은 너무 피곤하여 눕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누가 와서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좀 있더니 거센 소나기가 퍼 부었다.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지금까지 잘 참아 준 것에 감사했다. 소나기가 지나간 후 물체를 식별할 정도로 날이 밝아 왔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끝내고 조국을 향한 첫 경유국인 미얀마에서 맞는 첫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