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사령부는 안 된다”
주문진 모래밭에 천막을 쳤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 말 대공세를 펼쳐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을 막았다. 함경남도 장진호로 진출했던 미 해병사단이 철수하고 있는 모습이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제공]
1951년 4월 13일 오전의 일이다. 나는 전날 내가 오래 몸담았던 국군 1사단의 사단장직을 떠나 부산에 내려왔다. 국군 1군단장 진급 신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12일 밤에는 10개월 만에 전쟁으로 헤어졌던 가족을 처음 만났다. 아침에 경남도지사의 관사에 갔다. 그곳은 전쟁으로 옮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곳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 과분한 칭찬을 해줬다. “국군의 명예를 살려 평양 선두 입성을 훌륭하게 해냈어”라며 말을 꺼낸 이 대통령은 곧 내게 별 두 개의 소장 계급장을 달아줬다. 대통령 집무실을 나와 나는 곧장 수영만의 비행장으로 갔다. L19기가 그곳에 있었다. 새로 부임하는 1군단의 비행기였다. 잠시 날아 도착한 곳은 강릉의 비행장이었다.
당시 1군단에는 두 개의 사단이 있었다. 함경도 북쪽으로 진격하면서 전과를 올렸던 역전의 수도사단과 전쟁 경험이 별로 없는 11사단이었다. 1101 야전공병단도 함께 있었다. 군단치고는 매우 초라한 병력이었다.
더구나 내가 몸담았던 1사단이 미군 1군단의 지휘 아래 포병과 전차를 배속 받았던 것과는 달리 이들 사단에는 105㎜ 야포 18문을 지닌 포병 1개 대대만이 화력을 떠받치고 있었다. 국군 대부분은 이렇게 초라한 화력으로 적군의 포화에 맞서온 것이다.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정도의 화력과 병력으로 수적으로 압도적인 중공군을 막을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앞선 것도 사실이다.
부대 상황을 대강 파악한 다음 나는 강릉에 있는 군단 사령부를 주문진으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당시 군단사령부는 강릉 시내의 법원 건물에 있었다. 여러 가지로 업무를 처리하기에 편했지만 나는 이동을 지시했다. 그것도 주문진의 해변 솔밭으로 옮기라는 지시였다.
군단 참모들은 ‘뭔가 잘못됐다’는 표정이었다. 주문진으로 옮긴 군단 사령부는 천막 안에 자리 잡았다. 모래사장 위에 만들어져 있어서 식사를 하는 도중에 밥알과 함께 모래가 씹히는 경우가 많았다.
“이게 무슨 고생이냐” “강릉에 있던 사령부를 왜 옮겼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는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런 소리를 전해 들으면서도 모른 체했다. 단순하게 사람을 불편한 환경으로 몰아가 군기(軍紀)를 잡으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골탕 먹이는 스타일이 아니다.
내게는 일관되게 지키는 원칙이 있다. 병사는 도시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도시는 병사를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다. 앞에서도 소개한 내용이다. 도시에 있는 병사는 각종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다. 안일함과 편안함을 추구하기 쉽고, 환락을 찾아 헤맬 수도 있다. 따라서 군기를 유지하기 어렵다. 군대는 도시에서 떨어져 있어야 한다.
부임 뒤 나는 곧바로 이를 실행했다. 참모와 부관, 본부대원들의 불만이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졌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리고 내 뜻을 관철했다. 원칙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소신을 지키고 이를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지휘관에게는 필요하다. 게다가 그때는 적군이 언제라도 전선을 밀고 들어올지도 모르는 전쟁 상황이었다.
나는 부임하자마자 여러 가지로 바빴다. 당시 미 공군기들은 북한의 동쪽 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동해에서 떴다. 미 제5순양함대가 이끌고 있는 두 척의 항공모함에서 비행기가 이륙해 북쪽으로 넘어가 폭탄을 퍼붓고 다시 돌아오는 방식이었다. 정상적으로 작전을 마쳐 폭탄을 다 쏟아 부은 공군기의 경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적의 대공포 사격에 맞거나 폭격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귀환해야 하는 비행기가 문제였다. 이런 비행기는 항공모함의 갑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착륙할 때 폭탄이 터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비행기의 경우 지상의 활주로가 필요했다. 그래서 미 해군이 새로 부임한 내게 “비행장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 작업에도 상당한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지금의 속초 비행장은 그 과정에서 기초를 닦은 것이다.
그런 여러 가지로 정신없이 10여 일이 지났다. 그 중간에 가끔 북한군이 공격을 해왔다. 그러나 6·25전쟁 초반에 이미 와해된 뒤 급히 다시 편성한 북한군은 실력이 보잘것없었다. 공격력이 중공군에 비해 많이 떨어져 아군이 포진한 지역을 깊이 뚫지는 못했다. 우리의 반격에 맥없이 물러나는 식이었다.
서부 전선에서 총력을 펼치던 중공군이 우회했다. 춘계(春季)공세를 펼치면서 서울을 다시 점령하려다가 미군의 화력에 밀린 중공군이 이번에는 동부 전선으로 공격을 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지시대로 그들은 장비와 화력이 약한 국군이 방어하는 지역을 골라서 때리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전선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