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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김씨와 흉노
황원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서기전 200년 한 고조 유방(劉邦)이 백등산전투(白登山戰鬪)에서 흉노(匈奴)에게 대패한 이후 서기전 121년 한 무제 유철(劉徹)이 흉노를 정벌할 때까지 약 80년 동안 중국의 실질적 주인은 흉노였다.
흉노는 두만선우(頭曼單于)와 묵돌선우(冒頓單于) 때 전성기를 누렸다. 흉노는 서기전 174년 묵돌선우의 명령을 받은 우현왕(右賢王)이 월지(月氏) ․ 누란(樓蘭) ․ 오손(烏孫) ․ 대완(大宛) ․ 대하(大夏) 등 서역 26국을 점령하여 실크로드의 지배권을 장악한 이후, 서기전 210년 진시황(秦始皇) 사후 중국 본토가 유방과 항우(項羽)의 초한전(楚漢戰)으로 대혼란에 빠진 틈을 노려 중국 북서부 지역까지 휩쓸었다. 묵돌은 투르크어로 ‘용감한 자’를 한자로 음사한 것이므로 모돈이 아니라 묵돌로 읽는다.
전성기의 흉노는 서쪽으로 아랄 해, 서남쪽으로 티베트 고원, 북쪽으로 바이칼 호와 이르티시 강, 동쪽으로 요하, 남쪽으로는 황하와 위수 유역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이룩했다.
사실 중국의 역사는 흉노로부터 시작되었고, 중국 역사 5천 년 가운데 3천년은 흉노의 역사라고 해야 옳다. 흉노에 이어 중국사를 뒤흔든 선비(鮮卑) ․ 저(氐) ․ 갈(羯) ․ 강(羌) ․ 몽골(蒙古)도 모두 흉노에서 갈라진 흉노의 일파였다.
흉노는 서기전 20세기를 전후하여 스키타이로부터 청동기를 받아들여 중국에 전했고, 서기전 4세기 무렵에도 스키타이로부터 철기를 받아들여 이를 또 중국에 전했다.
서기전 2070년 우(禹)로부터 시작하여 서기전 1700년 걸(桀)까지 이어진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는 흉노족의 나라였고, 서기전 1600년 탕(湯)으로부터 시작되어 서기전 1046년 제신(帝辛) - 주(紂)까지 이어진 은(殷) - 상(商) 왕조는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나라였다. 하나라 시조 우왕은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 황제(黃帝)의 후손이니 오늘날 한족(漢族)들의 조상이 실상은 흉노족이다. 이 황제와 맞서 싸운 치우(蚩尤)는 중국인들이 동이족이라고 부르는 나라 고조선의 군장 - 단군(檀君)의 한 사람이었다.
흉노란 명칭은 전한시대부터 나온 말이다. 본래는 훈 또는 훈느인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중국인들이 이들을 비하하는 뜻의 글자인 오랑캐 흉(匈)과 노예 노(奴) 자를 쓴 것이다. 훈(Hun)이란 영어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돌궐(突蹶)은 투르크족을 가리킨다.
오늘의 헝가리는 흉노족이 조상이었고, 터키는 돌궐족이 조상이었다.
중국사에서 하 ․ 상에 이어 세 번째 왕조인 주(周)를 세운 민족도 흉노족의 일파인 융적(戎狄)이었다.
중국이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겪는 동안 흉노는 일찌감치 스키타이로부터 철기를 받아들여 그 막강한 힘으로 중국 북방을 휩쓸었다.
서기전 3세기 무렵의 흉노는 드넓은 영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최고 통치자인 탱그리고도 - 대선우(大單于)를 중심으로 하여 3개 부로 나뉘어 있었다. 탱그리고도가 직접 다스리는 선우정(單于庭)과 그 양옆의 좌지(左地) ․ 우지(右地)이다. 좌지는 흉노의 제2인자인 태자가 좌현왕(左賢王)으로서 맡았고, 우지는 유력 귀족인 우현왕이 맡았다.
선우정은 현재의 내몽고 포두시 일대, 좌지는 오늘의 중국 동북부 일대. 좌현왕의 좌지 동쪽에는 예(濊)와 맥(貊)이, 그 동쪽에는 고조선이 있었다. 우현왕의 우지는 현재의 중국 감숙성 일대였고, 그 서쪽에는 이란계인 월지와 흉노에서 분파된 강족 등이 있었다.
탱그리는 흉노 말로 하늘이란 뜻이고 고도는 아들이란 뜻이니 곧 천자(天子)를 가리킨다. 뒷날 중국인들이 자기네 황제를 두고 천자라고 하는 것은 이 흉노의 탱그리고도를 훔친 것이다.
흉노의 천자, 탱그리고도의 성씨는 연제씨(孿鞮氏)이며, 귀족으로는 호연씨(呼衍氏)와 수복씨(須卜氏)와 난씨(蘭氏) 등이 있었다.
중국에서 진시황이 죽고 유방과 항우의 초한전이 벌어질 무렵 흉노의 최고 통치자 탱그리고도는 두만선우였다.
두만선우에게는 총애하는 연지(閼氏)가 있었는데 그 연지가 아들을 낳았다. 연지는 선우의 처첩을 가리키는 칭호이다. 그런데, 그때 두만에게는 장성한 맏아들로서 이미 태자로 책봉한 묵돌이 있었다.
총애하는 연지의 아들에게 정신이 빠진 두만은 이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맏아들인 묵돌을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두만은 묵돌을 월지에게 인질로 보냈다. 그러는 한편 군사를 보내 월지를 공격토록 했다. 그렇게 되면 배신에 분노한 월지가 묵돌을 죽일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이 닥쳐오자 묵돌은 월지의 준마를 빼앗아 타고 본국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자기의 속셈과 달리 태자가 죽지 않고 돌아오자 두만은 할 수 없이 묵돌을 기병 1만 명을 지휘하는 만기장군(萬騎將軍)에 임명했다.
묵돌은 1만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매일같이 훈련에 힘을 쏟았다. 묵돌은 명적(鳴鏑)을 만들었다. 명적은 쏘면 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는 신호화살이다. 묵돌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이제부터 내가 명적을 쏘거든 모두가 그것을 향해 쏘아라! 만일 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죽일 것이다!”
그러고는 부하들과 함께 사냥을 나갔다. 묵돌이 명적을 쏘는데 이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묵돌은 사정없이 그 자들을 죽였다.
얼마가 지난 뒤에 묵돌은 자신의 애마를 향해 명적을 쏘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부하들 가운데는 차마 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 묵돌은 이번에도 사정없이 그 자들을 죽였다.
또 얼마 뒤에 묵돌은 이번에는 자신의 연지, 애처에게 명적을 날렸다. 역시 이번에도 차마 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 묵돌은 이번에도 사정없이 그 자들을 죽였다.
어느 날 부하들을 거느리고 사냥에 나갔다가 이번에는 두만선우의 애마를 쏘았다. 이번에는 부하들 모두가 그 말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묵돌은 그제야 부하들이 자신의 명령에 잘 따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 두만선우가 아들 묵돌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 기회를 엿보던 묵돌은 두만을 향해 명적을 날렸다. 부하들이 모두 훈련받은 대로 두만을 향해 화살을 쏘니 두만은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어 죽어버렸다.
묵돌은 기세를 몰아 두만선우의 연지들과 동생들, 신하들 가운데서 평소 자기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모두 죽이고 대선우 - 탱그리고도 자리에 올랐다. 그렇게 해서 흉노에서 묵돌선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것이 중국에서 진시황이 죽은 다음해인 서기전 209년의 일이었다.
묵돌이 아비를 죽이고 대선우가 되자 동호(東胡)에서 사신을 보냈다. 동호 왕이 사신 편에 이르기를 묵돌이 가지고 있던 천리마를 달라고 했다. 묵돌이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다.
“동호가 나의 천리마를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대처했으면 좋겠는가?”
신하들이 말했다.
“천리마는 우리의 보물입니다. 어찌 동호 오랑캐 따위에게 함부로 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묵돌이 웃으면서 말했다.
“동호는 우리와 이웃한 나라다. 어찌 말 한 마리를 가지고 이웃 간에 사이가 벌어질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천리마를 동호 사신에게 내주었다.
흉노가 자기들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여긴 동호의 왕이 얼마 뒤에 또 사신을 보내어 이번에는 묵돌의 연지 한 명을 보내달라고 했다. 묵돌의 처첩 가운데 한 명을 달라는 것이었다. 묵돌이 또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나의 연지를 한 명 달라고 하는구나.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신하들이 입을 모아 반대했다.
“저런 천하에 죽일 놈들을 봤습니까? 저 놈들이 우리를 얼마나 깔봤으면 대선우의 연지를 보내라고 하겠습니까? 절대로 보내서는 안 됩니다!”
묵돌이 또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동호는 우리의 이웃인데 이웃 사이에 어찌 여자 하나가 아깝다고 해서 우의를 상할 수 있으랴!”
그러면서 연지 한 명을 동호의 사신에게 딸려 보냈다.
이에 더욱 교만해진 동호 왕은 이번에는 군사들을 이끌고 변경을 침범했다. 흉노와 동호 사이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1천여 리의 황무지가 있었다. 양국 군사들이 그 황무지 양쪽에 진치고 대치했다. 동호 왕이 묵돌에게 사신을 보냈다.
“이 황무지는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땅이다. 이 땅을 우리에게 준다면 군사를 물려 돌아가겠다.”
묵돌이 신하들과 상의했다.
“어흠! 동호의 요구를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가?”
몇몇 신하가 대답했다.
“이곳은 버려진 황무지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고, 우리에게도 필요가 없으니 그냥 저 놈들에게 주어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자 묵돌이 눈을 부릅뜨고 노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그렇지 않다!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찌 단 한 치의 땅이라도 함부로 남에게 내줄 수 있단 말이냐?”
그러고 나서 땅을 주자고 한 대신들의 목을 베었다. 묵돌은 전군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번 전쟁에서 후퇴하는 자들은 한 놈도 남김없이 죽이고 말 것이다!”
묵돌이 군사를 휘몰아 동호를 치자 흉노를 얕잡아보고 경계를 게을리 하던 동호는 단 한 번 싸움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묵돌은 동호의 왕을 죽이고 숱한 백성과 가축을 이끌고 개선했다.
동호와의 전쟁에서 대승한 묵돌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이번에는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려 월지를 치고, 그 남쪽으로는 누번을 쳤으며, 오늘의 북경 지방인 연(燕)까지 침공하여 옛날 진시황 때 몽염에게 빼앗겼던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했다.
흉노는 기마군단만 해도 30만 명이 넘는 동북아시아의 최강대국이 되었다.
묵돌이 죽은 다음에는 태자인 계육이 뒤를 이어 즉위하니 그가 노상선우(老上單于)이다.
서기전 201년, 한고조 6년 가을에 흉노는 중국의 마읍(馬邑)을 점령하고 오늘의 산서성 태원시 서남쪽 진양까지 밀고 내려갔다.
이에 앞서 초한전에서 승리하여 한나라 황제로 즉위한 유방은 개국공신 한신(韓信)을 중원의 영천에서 먼 서북쪽 진양으로 옮기도록 명했다. 제국이 안정되기 시작하기가 무섭게 왕권안보를 위해 토사구팽을 시작했던 것이다.
한신이 차지한 한(韓)나라는 본래 전국시대부터 중원의 중앙에 자리 잡은 요지였는데 이제 흉노와 이웃한 북서쪽 변경으로 쫓아버린 것이었다. 한왕 신은 이 명령을 받자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별일이군! 별 볼일 없던 시골뜨기가 벼락치기로 출세하여 황제가 되더니 이젠 나를 변경으로 내쫓아? 제가 항우에게 이긴 것이 다 누구 덕분인 줄 아는 거냐?
화가 난 한신은 내친 김에 진양에서 더 북쪽인 안문군 마읍으로 도읍을 옮기겠다고 청원했다. 음흉한 유방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그런 와중에 흉노가 쳐들어왔고, 마읍에서 포위된 한신은 역부족에 세 불리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유방이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더니 한신을 구해야겠다면서 몸소 30만 명이 넘는 대군을 거느리고 출전했다. 서기전 200년 겨울이었다.
때는 북풍한설 몰아치는 한겨울. 제대로 된 겨울옷도 입지 못한 군사들은 10명 중 두세 명은 얼어 죽었다.
마침내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묵돌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는 것이었다. 유방은 쾌재를 불렀다. 옳거니! 그러면 그렇지. 네까짓 오랑캐 놈이 별 수 있겠느냐? 이 황제께서 친히 납셨으니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것이 당연하지…. 유방은 군사를 휘몰아 흉노군을 추격했다.
유방은 정치적으로는 음흉한 인물이지만 군사적으로는 무능하고 어리석은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묵돌선우의 단 한 번의 속임수에 넘어갔던 것이다. 한군은 32만 명이었지만 본군은 모두 후위에 있었다. 유방이 거느린 군사는 수천 기에 불과했다. 겨우 수천 기의 군사로 유인책에 넘어가 묵돌의 기마군단을 추격했던 것이다.
유방이 유인책에 말려들자 묵돌은 매복시켜두었던 40만 기마군단을 동원하여 유방의 군대를 겹겹이 포위했다. 유방은 평성 인근 백등산에 포위된 채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전멸의 위기를 맞아야 했다.
그렇게 포위당한 지 7일이 흘렀다.
이때 유방의 측근 진평(陳平)이 계책을 바쳤다. 유방은 곧 그 계책에 따랐다. 유방은 나무를 깎아 여자 모양을 만들고 거기에 울굿불굿한 비단옷을 입혀 멀리 적진에서 묵돌의 처 연지가 이를 보게 만들었다. 그러고 연지에게 밀사를 보내 이렇게 일렀다.
“우리 황제께서 미인을 뽑아 곧 묵돌선우에게 보내려고 합니다.”
많은 뇌물을 받고 또 이런 말을 들은 연지가 묵돌에게 포위를 풀도록 간곡히 애원했다. 연지를 끔찍하게 사랑하고 아끼던 묵돌은 그 말을 듣고 마침내 포위를 풀었다. 그것이 고비였다. 만일 그때 묵돌이 포위를 풀지 않고 그대로 공격을 가했다면 유방도 그것으로 끝장나고 한나라도 그날로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묵돌은 영리한 지도자였다. 여기서 유방을 살려주는 대신 더 많은 것을 얻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또 유방을 죽이고 한나라를 멸망시킨다 한들 중국을 모두 점령하여 다스릴 능력도 없었다. 그것은 먼 뒷날 몽골족과 여진족, 키타이(요) 등이 할 일이었다.
백등산에서 구사일생하여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유방은 유경(劉敬)을 사신으로 보내 3개 항의 조건에 합의하고 흉노와 화친했다. 그 조건이란 첫째, 한 왕실의 공주를 흉노 선우의 연지로 시집보낸다. 둘째, 황금 1천량과 함께 해마다 막대한 양의 비단과 솜과 술과 쌀 등 식량을 바친다. 셋째 양국의 교역을 늘리고 형제관계를 맺는다. 물론 형은 승자인 흉노였는데, 명분만 형제관계였지 사실은 주종관계나 마찬가지였다.
흉노와 한의 관계가 역전된 것은 무제 유철이 제위에 오른 뒤부터였다. 유철은 즉위 이듬해인 서기전 140년에 대장군 위청(衛靑)에게 20만 대군을 주고 흉노를 치게 했다. 흉노와 싸우지 말라는 고조 유방의 유언을 어긴 것이다. 그러나 위청은 첫 출전에서 흉노에게 대패했다.
서기전 129년에 왕회(王恢) ․ 이광(李廣) ․ 공손하(公孫賀) ․ 한안국(韓安國) 등에게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치게 했다. 왕회는 대군을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마읍에 들어가 산에 매복하고 기회만 기다렸다.
그때 흉노의 탱그리고도는 노상선우의 아들 군신선우(軍臣單于)였다. 군신선우는 부하들을 이끌고 마읍 일대를 약탈하다가 한의 대군이 매복한 사실을 알게 되자 급히 퇴각해버렸다. 그렇게 해서 왕회의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왕회는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투옥 당했다가 결국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 이듬해인 서기전 128년에도 흉노와 싸웠고, 서기전 126년에야 비로소 위청의 30만 대군이 하투(河套, 하남 오르도스)에서 처음으로 승리다운 승리를 거두었다. 3년 뒤에는 그곳에 삭방군을 설치했다.
서기전 121년 3월. 표기장군 곽거병(霍去病)이 1만 군사를 이끌고 농서지방으로 쳐들어갔는데, 그해 가을에 흉노 훈야왕(渾邪王)이 우현왕인 휴저왕(休屠王)을 죽이고 한에 투항했다.
곽거병에게 패전한 사실을 보고받은 대선우가 훈야왕과 휴저왕을 불러들여 죽이려고 했다. 이에 훈야왕과 휴저왕은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합의했는데, 도중에 휴저왕이 변심을 하자 모의한 사실이 탄로날까 두려워한 훈야왕이 휴저왕을 죽이고 항복했던 것이다. 휴저는 휴도가 아니라 휴저로 읽는다. <사기(史記)>에 도(屠)는 저(儲)로 읽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곽거병은 휴저왕의 아들 김일제(金日磾)와 김륜(金倫)과 이들 형제의 모친 연지와 많은 포로를 잡고 그들이 모시던 제천금인(祭天金人)을 가지고 개선했다. 제천금인이란 금으로 만들어 예배드리고 모시던 불상(佛像)이었다.
당시 김일제의 나이는 열네 살이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처음부터 김일제는 아니다. 중국이든 한국이든 김씨라는 성은 이 김일제로부터 비롯되었다. 제천금인(祭天金人), 김일제가 금인을 만들어 모시고 예배했기에 한무제 유철이 김씨 성을 내려준 것이었다.
곽거병이 개선을 보고하자 유철은 김일제를 궁중의 말을 기르는 황문에 배치시키고 금인은 감천궁에 두도록 했다. 김일제는 얼마 뒤에 황문의 책임자 황문시랑으로 승진했다. 김일제는 흉노답게 말을 잘 길렀고, 또 유철에게 충성을 다 바쳤다. 그래서 유철은 얼마 안 가서 김일제를 시중부마도위 광록대부로 승진시켜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다.
김일제에게는 농아(弄兒) ․ 상(賞) ․ 건(建) ․ 달(達) 네 아들이 있었다. 유철은 김일제의 아이들을 궁중에서 자라게 하면서 아꼈다. 그런데 맏아들 농아는 유철의 총애를 믿고 천방지축으로 굴었다. 궁녀들을 희롱하고, 심지어는 황제의 목에 매달려 까불기도 했다. 그때마다 김일제는 노한 눈을 부릅뜨고 아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면 농아는 황제에게 아버지가 화를 냈다며 고자질을 했고, 유철은 왜 어린아이에게 화를 내느냐면서 오히려 김일제를 나무랐다.
그런데 이 농아가 자라서는 자주 궁녀들을 희롱하며 음행을 벌이니 이를 보다 못한 김일제가 농아를 죽여 버리고 말았다. 농아가 보이지 않자 유철은 김일제에게 농아의 행방을 물었다. 김일제는 그제야 자초지종을 모두 고하고 용서를 빌었다. 유철은 이야기를 다 듣고 슬퍼하면서 탄식했다. 유철은 김일제라는 비상한 인물을 다시 보게 되었다.
서기전 90년. 망하라(莽何羅)와 중합후(重合侯) 형제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모반을 일으켜 무제 유철을 암살하려고 했다. 망하라는 유철이 잠든 사이에 암살하려고 새벽에 칼을 들고 유철의 침실로 다가갔다. 그 순간 소변을 보러 일어났던 김일제가 이를 보고 달려들어 망하라를 껴안고 뒹굴며 소리쳤다.
“망하라가 모반했다!”
무제가 놀라 잠에서 깨어났고 시위무사들이 칼을 빼들고 달려왔다. 무사들이 망하라를 칼로 치려고 하자 김일제가 다칠까 염려한 유철이 이를 말렸다. 결국 망하라 일당은 일망타진되어 처형당했다.
서기전 87년 무제 유철은 8세의 어린 아들을 태자로 삼고 시중 곽광(霍光)을 대사마 대장군으로 삼아 뒷일을 부탁하고 죽었다. 곽광은 곽거병의 이복동생이다. 이에 앞서 유철은 김일제에게 뒷일을 부탁했으나 김일제는 “신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하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하고 사양했다.
무제 유철에 이어 등극한 소제(昭帝)는 대사마 곽광, 상서사 거기장군 김일제, 좌장군 상관걸(上官桀)과 상홍양 등이 보좌했다. 이들 네 사람 중 곽광을 제외한 세 사람이 흉노 출신이다.
김일제의 네 아들 가운데 맏이 농아는 김일제에게 죽고, 둘째 상에게는 국(國)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국 이후는 대가 끊어졌다. 막내 달도 기록이 없고 이름만 전한다. 그런데 셋째아들 건의 후손들은 왕실에서 크게 득세했다.
김일제의 손자이며 건의 아들인 당(當)은 투후(套侯)로서 양평후(陽平侯)에 봉해졌고, 당의 둘째딸 정군(政君)은 효원황후(孝元皇后), 원제(元帝)의 부인이 되었다. 투후란 내몽고와 섬서성 일대인 오르도스의 제후란 뜻이다.
그런데 김당의 8남 4녀 중 둘째아들 만(曼)의 아들이 바로 한나라를 뒤집어엎고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이다. 본래 김망인 그의 성이 왕씨가 된 것은 중국 사가들이 황제 자리를 이민족에게 빼앗긴 치욕을 숨기기 위해 역사를 왜곡 날조했기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아버지 만과 형 영(永)이 일찍 죽어 망은 어린 시절을 어렵게 지냈지만 공손하고 검소한 자세로 어머니와 형수의 시중을 들었다. 또 조카인 광(光)을 양자를 삼아 친자식 이상으로 아끼고 길러 정작 아내의 불평을 사기도 했다.
망은 대장군이던 백부 봉(鳳)이 병들자, 지극정성으로 간병하여 그를 감동시켰다. 봉이 죽은 뒤 상(商)과 근(根)의 추천과 백모인 황태후의 후원으로 순조롭게 출세한다.
망은 대사마가 되면서 군력을 휘두르게 된다. 애제(哀帝) 때에 정계에서 물러났다가 복귀하고, 영시 원년(서기전 16년)에는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다. 망은 애제가 죽자 대사마 동현(董賢)으로부터 옥새를 강탈하여 중산왕 간(衎)을 옹립하니 그가 평제(平帝)이다. 망은 다시 대사마가 되었다.
망은 유학과 예언에 근거한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백성의 지지를 얻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그 결과 두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또 딸을 평제의 황후에 책봉하고 안한공(安漢公)이 된 뒤, 14살이 된 평제를 독살하고 광척후(廣戚侯) 유현(劉顕)의 아들 유영(劉嬰)을 황태자로 세워 스스로는 가황제(假皇帝)· 섭황제(攝皇帝)로서 섭정에 나섰다.
그러던 망은 고조 유방의 영혼에게 선양을 받았다면서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신(新)이라고 했다. 망은 주(周)나라 시대의 치세를 이상으로 삼았지만, 현실성이 없는 전매제도 등 각종 급진 정책은 곧 파탄을 보게 되었다. 또 고구려(高句麗)가 괘씸하다고 하여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로 부르기도 했다.
망 재위 18년에 적미(赤眉)의 난이 일어났고, 이어서 각지의 농민과 호족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남양군(南陽郡)에서 옹립된 유현(劉玄, 경시제)을 토벌하러 보낸 백만대군이 곤양전투에서 경시제 휘하의 유수(劉秀, 광무제)에게 패배하자 이를 계기로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여 한나라는 대혼란에 빠진다.
결국 망은 그 혼란 중에서 두오(杜呉)에게 살해당하고 신나라는 멸망했다. 서기 23년의 일이었다.
김망의 신이 멸망하고 광무제(光武帝)가 후한을 건국하자 권세를 누리던 흉노 김씨, 김일제와 김륜 형제의 후손들은 각자 살 길을 찾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옛날 조상들이 살던 감숙성과 섬서성의 흉노 본거지로 돌아갔는데, 서기 86년 소제(昭帝) 때 이곳에 살던 흉노족 5만여 명을 산동성으로 대거 강제 이주시켰다.
김망의 몰락 이후 일부 세력이 요동을 거쳐 한반도 동남부까지 내려갔다. 그곳 서라벌과 김해 지역은 아직도 청동기시대에 머물고 있었다.
서기 42년에 김수로(金首露)를 우두머리로 하는 흉노 일파가 김해 지역으로 내려와 선주하던 아홉 칸의 마을을 제압하고 가락(伽洛) - 가야(伽倻)를 건국했다.
서기 65년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9년 3월에 김알지(金閼智)를 우두머리로 하는 흉노족 일파가 서라벌로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지, 즉 알타이족이라고 했다. 알타이는 그들이 원래 살던 곳의 산 이름이지만 그 본뜻은 금(金)이었다.
일족 내의 근친상간, 근친혼이 성행한 것도 신라 김씨 왕조만의 독특한 풍습이었다. 이것도 흉노족의 풍습이었다.
- …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판독불능)지(枝)가 영이(英異)함을 담아 낼 수 있었다. 투후 제천지윤(套侯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하였다.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
여기서 ‘투후’는 김일제를 가리킨다. ‘오르도스의 제후’란 투후 호를 받은 사람은 김일제가 처음이다.
또 성한왕은 문무왕비 외에 김인문묘비명 ․ 흥덕왕릉비 ․ 진철대사탑비문(眞澈大師塔碑文) ․ 진공대사탑비문(眞空大師塔碑文) 등에도 등장한다. 이들 비문에 따르면 성한왕은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로 나타나며 태조(太祖)라고 불리기도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성한왕이 아닌 김알지(金閼智)가 신라 김씨의 시조로 나온 것과 다르다. 문무왕비문에는 성한왕을 태조(太祖)라 하고 성한왕이 문무왕의 15대조라 하며, 흥덕왕비문에도 성한왕을 태조라고 하고 흥덕왕이 그의 24대손이라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金庾信) 편에는 ‘신라인들이 스스로 소호금천씨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씨라 한다고 했으며, 유신 비문에도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종손이다’라고 되어 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한다.’고 나온다.
한무제는 망하라 일당을 토벌한 공으로 김일제를 투후에 봉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김일제는 무제에 이어 즉위한 소제의 나이가 어리므로 봉을 받지 않았다. 소제가 즉위한 뒤 1년 쯤 지나서 김일제는 병상에 눕게 되고 위독해졌다. 대장군 곽광이 상주하여 김일제는 병상에 누운 채 제후의 인수(印綬)를 받았다. 그리고 이튿날 죽었다.
김일제가 죽은 뒤 맏아들 상이 투후를 계승하였다. 또 그 뒤 선제(宣帝)에 이어 제위에 오른 원제(元帝) 초에 김일제의 차남인 건(建)의 손자 당(當)을 투후로 봉하여 김일제의 뒤를 잇게 했다. 다시 김일제의 4대손인 당의 아들인 성(星)이 투후를 계승했다.
문무왕과 김유신 등 신라 김씨들은 흉노족 김일제를 자신의 조상이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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