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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안 가도 되는 증상이라는 거
2006년 3월에 팀이 결성된 이후, ‘4번출구’만의 작업실이자 연습실이 작년 7월에야 처음 생겼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 연습실을 먼저 들여다보기로 하고, 큰 길 옆 골목의 건물 1층에 마련된 그들의 연습실로 들어섰다. ‘그룹’ 또는 ‘밴드’라고 부르는 음악인들의 연습실 내부는 대부분 비슷한 모습이다. 공간이 넓든 좁든 간에, 각종 악기들과 앰프들의 위용(?)에 늘 꽉 채워진 느낌부터 앞선다. “너무 좁죠?” 만남의 주인공 한찬수 씨가 웃으며 물었다. 다섯 명의 멤버들만으로도 가득 채워질 만한데, 취재를 위한 이방인과 각종 촬영장비까지 찾아들었으니 누군가 한두 명은 앉을 곳을 갖지 못할 듯했다.
‘4번출구’가 그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여러 계기가 있었지만,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가장 큰 요인은 다섯 명의 멤버 모두 시각장애 1급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찬수 씨는 그런 설명이 밴드 이름 앞에 수식어처럼 따라붙는 것이 싫다고 했다. 음악활동을 하는 밴드 그 자체로 바라봐 주면 좋겠다는 의미였다. 밴드 이름이 왜 ‘4번출구’인지, 그동안 어떤 활동을 했는지, 음악적 지향점이 무엇인지 등은 이미 여러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알려졌으니까, <함께걸음>은 그 이외의 내용들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연습하기로 약속된 시간이 아직 2시간 남았기에, 다른 멤버들이 없는 공간에서 편하게 대화 나눌 여건은 충분히 마련된 셈이었다.
‘4번출구’의 리더이자 어쿠스틱 기타 담당인 한찬수 씨는 시각장애 1급이지만, 2004년에야 비로소 장애등록을 한 중도장애라고 했다. RP라고 표현하는 망막색소변성증인데, 2003년까지는 대기업에 18년 간 근무한 뒤 퇴사했을 만큼 사회생활 또한 남들과 같이 했단다. 다만 어릴 때부터 또래와 달랐던 건 밤눈이 몹시 어두웠다는 거, 그래서 야맹증이 심하다는 정도로 단순히 받아들이며 생활했다고 한다. 그럼 자신의 증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언제 알게 됐던 걸까? ‘정확히’는 아니지만 병명 자체를 처음 듣게 된 건, 병역을 위한 신체검사통지서가 나왔던 19살 때의 일이란다.
“겁이 나더라고요. 밤에 전혀 활동할 수가 없는데, 군대를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굉장히 막막해졌어요. 그래서 걱정하고 있을 때 안과를 소개 받게 돼서 가게 됐는데, 이리저리 검사를 한 의사선생님이 딱 두 마디를 하더라고요. ‘군대 안 가도 된다. 내일 당장 OO대학병원에 가서 병사용 진단서를 떼서 제출해라.’ 병명이 뭔지도 얘기 안 하고, 다른 설명도 없이 딱 그렇게만 말씀하신 거예요.”
왜 안 가게 되는 건지도 모르고 일단 군대를 안 가도 된다는 게 너무 좋아서 그 대학병원에 간 뒤 진단서 1장을 받아왔는데, 거기에 적혀 있던 자신의 병명이라는 걸 처음으로 접하게 됐단다. ‘망막색소변성증’ - 그런데 그걸 알게 됐는데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고 한다. ‘아, 야맹증을 전문용어로 그렇게 말하나 보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며 넘겼다는 것이다. 낮에는 나안시력이 1.0이나 나올 정도로 괜찮았고 밤에만 고생했기 때문에, 한찬수 씨는 ‘누구나 다 그렇게 밤에는 잘 안 보이는가 보다.’ 하며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단다. 그럼 자신의 두 눈에 정말 문제가 있다는 건 언제 떠올리게 된 걸까?
내가 실명(失明)하게 된다고?
“걷다가 그 전봇대 줄에 걸려 넘어진 거예요. 넘어진 제 모습에 친구는 재미있다고 깔깔대며 웃는데, 저는 제가 왜 넘어졌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해가 완전히 떨어진 상황이 아닌 어둑어둑할 때라서 다시 일어나 자세히 살펴보니까, 전봇대 줄이 거기에 있는데 그게 보이지 않았던 거죠. 친구한테 물어보니까 자기는 잘 보인대요. 그런데 다시 자세하게 들여다보니까 아주 희미하게 보일 뿐, 정말로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 저의 밤눈이 정말 어둡다는 거 그리고 그 증상이 아주 심한 모양이구나 하는 실감을 그때 처음 얻게 됐죠.”
그렇다면 자신의 증상을 제대로 정확하게 알게 된 건 언제였을까? 시간이 훌쩍 지나간 이십대 후반 무렵이란다. 큰 회사에 입사를 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 회사 내 도서관의 자료실에 갔다가 우연히 어떤 백과사전을 보게 됐단다. 그래서 이름만 알고 있던 자신의 병명을 찾아 읽어봤는데, 거기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야맹증으로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시야가 점점 좁아지고 종국에는 실명에 이르는 병이라는…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그냥 야맹증 정도로 알며 살아왔는데 실명까지 한다고?’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무척이나 착잡했지만, 한찬수 씨는 믿지 않기로 했단다. 설마 자신한테 그런 일이 닥칠 리는 없을 거라는 불안한 믿음과 함께.
“그런데 가만히 저 자신을 돌아보니까, 제 시야도 사실은 어렸을 때부터 정상 시야가 아니었던 거예요. 저는 이상하게 유난히 발밑에 있는 물건들을 잘 차고 다녔어요. 하도 그렇게 잘 차고 다니니까, 어릴 때는 애가 조심성 없고 덜렁대는 산만한 아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가 정말 조심성 없고 산만한 아이인 줄 알았죠. 제 시야가 극히 좁은 영역에서만 보인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던 거예요.”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에 닥쳤다. 서른 살 무렵이 됐을 때, 갑자기 시력이 더 떨어지고 물체들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떠올린 생각은 단 하나, ‘이게 바로 진행성이고 결국 실명까지 한다던 그 망막색소변성증이구나….’ 치료책이 없고 현대의학으로도 고칠 수가 없는 병이라던 백과사전의 내용이 떠올라서, 그는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는데도 병원에 갈 생각 자체를 안 했단다. 결국 코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까지도 안 보이는 지경에 이르자, 알고 지내던 지인이 병원 특진 예약을 해놓아서 갈 생각도 없던 진료실에 들어가게 됐다고 한다.
“의사선생님은 정말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야, 진짜 이 정신 나간 이런 사람을 다 봤나. 어찌 이 지경이 되도록 병원에 안 오고 직장생활을 했다는 말인가.’ 정말로 저한테 정신이 나갔다고 그렇게 표현하셨죠.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사실은 저한테 이런 병이 있는데, 이건 현대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이라서 지금 진행하고 있는 거라고요. 솔직하게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의사선생님은 ‘아니, 이렇게 미련한 사람을 다 봤나. 아는 게 병이라고, 괜히 어줍지 않게 알아가지고 이 결과가 이게 뭐냐?’ 제가 왜 그렇게 심하게 혼났는가 하면, 제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건 망막색소변성증 환자들한테 가장 많이 오는 합병증인 백내장에 걸린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걸 까맣게 모르고, 그냥 본래 증상이 악화되는 걸로만 치부하고 있었던 거죠.”
한참 야단(?)을 맞고 당장 수술 날짜를 잡으라기에, 앞뒤 따질 것도 없이 서둘러 백내장 수술을 받았단다. 수술 뒤에 그는 세상에 다시 한 번 태어나는 기분이라는, 완전히 새롭게 재탄생하는 그 실감을 그때 절실하게 체감했다고 한다. 백내장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였던 건데, 그걸 싹 걷어내고 나니 다시 돌아온 시력은 0.7에 이르렀다는 것!
직장은 퇴사, 그런데 상생의 배려가 함께
수술 이후 10년 정도의 기간은 그의 표현 그대로 ‘그럭저럭 생활할 만’했는데, 서서히 망막색소변성증이 진행하고 있다는 진짜 실감이 느껴지게 됐다고 한다. 아주 천천히 점점 더 시야가 좁아지고 있다는 것,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빠지는 게 아니라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이다. 직장생활 하는 데도 불편한 점들이 계속 더 많아져서, 그는 자신의 병명을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다 밝혔단다. ‘내가 사실 이렇게 시야가 좁고 잘 안 보인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 인사를 안 하더라도 이해해라.’
“아무래도 직장이라는 데가 그렇잖아요. 오며가며 사람들을 계속 마주쳐야 하는데, 게다가 상사들은 인사도 안 하는 저를 어떻게 보겠어요. 그랬기에 제 병명을 미리 다 밝히고 나서, 오히려 더 편안하게 직장생활을 했어요. 수출물류를 담당하는 무역 업무를 했는데, 18년 동안 한 부서에서만 근무를 했죠. 신입사원들이 들어오면 모든 교육을 제가 시킬 만큼 전문가가 됐던 건데, 2003년에 이르게 되자 더 이상 직장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시야가 좁아졌어요. ‘터널시야’라고들 하죠. 그 터널의 크기도 굉장히 좁아져서, 사람 얼굴을 쳐다보면 눈 따로 코 따로 입 따로 보일 상황에 이르게 됐어요. 물론 제가 정말 열심히 근무하긴 했지만, 회사의 배려 또한 참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어느 대기업인지 그 기업의 이름을 여기에 밝힐 순 없겠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양분법 논리에 매몰된 최근의 기업 행태를 볼 때, 한찬수 씨는 정말 ‘통큰’ 배려를 받으며 근무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2002년에 팀장으로 진급할 자격이 됐는데, 회사 측과의 많은 논의 끝에 퇴사를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회사는 그에게 1년 더 근무하도록 조치를 했단다. 퇴직준비를 위한 1년의 기간을 더 배려해 줬다는 의미가 된다. 그 1년은 그에게는 유종의 미를 거둘 기간이 됐고, 가정적으로는 그의 아내가 남편 대신 생활전선에 나설 준비를 갖추게 된 매우 ‘유의미한’ 시간이 된 셈이다.
열등감이 우월감으로 바뀌게 되다
“초등학교 때는 도화지 1장이면 크레파스는 대충 옆의 친구들 것으로 해결하며 넘어갔는데, 중학교 미술시간은 준비물을 준비 못해서 항상 혼나고 복도에 나가 서 있기가 다반사였어요. 집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준비물 살 돈을 달라는 말을 어머님께 못했거든요. 그래서 미술시간은 늘 혼나는 시간이었고, 그런 미술시간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런데 음악 얘기를 해달라고 했는데, 웬 중학교 시절 미술시간 얘기가 등장하는 걸까? 그 이유를 물으니까 그의 설명이 곧장 뒤를 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인데, 가장 싫었던 미술시간 바로 다음 수업이 우연히도 음악시간이었단다. 교실 안 자기 책상에 앉지도 못하고 복도에 서 있기 일쑤였던 미술시간은 너무나 괴로운 우울함뿐이었는데, 그 다음으로 연결된 음악시간에 막 노래를 부르고 나면, 왠지 가슴의 응어리 같은 게 조금씩 가라앉는다는 느낌을 점점 더 강하게 받게 됐다고 한다.
“무슨 악기를 다루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좋았어요. 노래를 통해 미술시간의 그 우울함이 사라지는 걸 느끼면서, ‘음악이라는 게 나한테는 이런 것이구나’ 하는 실감을 느끼게 된 거죠.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예요. 음악이라는 게 제 인생과 뭔가의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 시기가 그때였다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 악기는 언제 처음 손에 잡게 된 거냐 물으니까, 대학 재수를 하던 시절이었단다. 바로 위의 둘째 누나가 통기타를 생일선물로 사줬는데, 이게 불길에 기름을 들이붓는 결과를 낳았던 모양이다. 완전히 기타에 매료가 되어, 하루 12시간 이상 붙잡고 사는 나날이 계속됐다는 것이다. “그러니 재수 다음에 삼수를 했죠.” 하며 한찬수 씨는 한참 껄껄 웃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집 안에 있던 기타가 없어졌단다. 대학 입학 후 찾아오는 조건으로, 친척집에 보내졌다는 얘기였다.
한찬수 씨는 어릴 때부터 인생의 꿈같은 게 아예 없었단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너무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더욱이 생계유지를 위해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장사를 해야 하셨던 어머님의 사랑도 제대로 못 느끼다 보니, 하루 두 끼 식사도 어려웠던 당시에는 자신을 자극할 아무런 것도 없이 무의미하게 지냈던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도 없었는데, 교실의 다른 아이들하고 자신은 모든 게 다 다르다는 자괴감 같은 게 혼자만의 심각한 열등감을 낳게 만들었단다. 그 열등감은 그의 청소년기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가 됐고, 대학생이 된 이후까지도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틀을 어떻게 깨고 벗어나게 됐을까?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저한테 엄청나게 큰 변화가 생겨나게 됐죠, 제가 정말 심각한 열등감 속에서만 살다가, 열등감이 아닌 우월감으로 바뀌게 된 계기가 대학 때 일어나게 된 거예요.”
내 안에는 이미 내가 있다
“한 인간의 성격과 삶을 이루고 완성하는 게 유전이냐 환경이냐, 그 문제를 가지고 아직까지도 전문가들은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죠. 저는 그 두 가지 다 제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언젠가 어머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제 기억에서도 희미하게 사라진 아버님께서, 사실은 굉장한 끼를 가지고 살았던 분이셨다는 거예요. 음악적인 끼도 상당했답니다. 그런 걸 저는 전혀 모르고 살아왔죠. 그런데 그런 끼가 있었다 해도, 저를 지배하던 환경은 그런 끼를 발산할 최소한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잖아요. 그런 게 바로 유전이고 핏줄이라는 것인데, 그 모든 게 사실은 제 안에 이미 있었던 겁니다. 이미 있었는데도, 주어진 환경 때문에 분출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하며 살아왔다는 것이죠.”
대학 2학년 말 종강파티를 할 때의 일이라 했다. 행사를 진행하던 동기가 그동안 노래를 한 번도 안 한 사람까지 다 지명하며 노래를 시켰단다. 열등감 자체로 살아왔던, 그래서 존재감 자체가 없던 ‘1인’이 마이크를 잡고 생전 처음 남들 앞에서 불렀던 노래는 무슨 곡이었을까?
‘눈이 내리네’라고 번안되던 프랑스의 샹송가수 아다모의 곡을 프랑스 원어로 불렀단다. 제2외국어로 불어를 배웠던 고교 시절, 정말 멋졌던 불어 교생실습 선생님이 가르쳐 줬던 그 곡을 항상 남몰래 입 안에만 달고 살았었는데, 최초로 공개석상에서 자신감 넘치게 부르게 됐던 것이다. 모두의 경악이 폭발한 건 당연한 일이고, 이어진 앙코르곡으로는 7,80년대 요들송의 대가였던 김홍철 씨의 대표 요들송을 정말 제대로 불러 더 난리(?)가 났단다.
“김홍철 씨의 요들송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혼자서만 부르며 연습하던 노래였어요. 아다모의 곡 역시 한 번도 다른 사람 앞에서 부른 적이 없던, 저 혼자만의 입 안에서만 반복되던 노래였죠. 아마도… 그 예비역 형이 없었다면, 저는 저의 열등감을 벗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를 아예 찾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형은 저를 ‘전체’라는 구성원 안으로 이끌었거든요. 제 인생의 관점을 뒤바꾼 장본인이고, 제 인생의 엄청난 전환점을 만들어 준 계기가 바로 그 형이라고 지금도 간직합니다. 물론… 그 모든 가능성은 이미 제 안에 있었던 건데, 그걸 표출할 환경을 만나지 못하고 또한 몰랐던 거죠.”
음악은 편견의 벽을 허물어 준다
“저의 음악 인생은 사실 실명(失明)이 만들어 준 거예요. 2003년 회사를 그만 두고 2004년 장애 등록을 하고, 2005년 전후로는 제가 복지관의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거든요. 그때 보다 더 자세하게 기타를 배우고 싶어서 등록을 했는데, 다른 악기를 배우는 이들과 즉석 합주 비슷한 걸 하게 됐죠. 함께 연주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그런 일이 반복되다가 제안으로 나왔던 게 ‘아예 우리 같은 팀으로 같이 밴드 활동을 할까?’라는 의견이었는데, 모두가 흔쾌히 환영을 하며 의기투합을 하게 됐죠.”
복지관 안에 준비된 모든 악기로는 얼마든지 연주와 합주가 가능했지만, 문제는 개별적인 밴드를 만들 경우에 악기는 어떻게 마련하고 연습은 어디에서 하느냐는 현실적인 대목에서 번번이 발목이 잡혔다고 한다. 하지만 한찬수 씨는 지금도 항상 ‘4번출구’ 멤버들에게 강조한단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 그 말을 언제나 간직하며, 앞으로도 분명하게 뜻이 있는 곳이라면 길이 계속 열릴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단다. 왜냐? 전혀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밴드 활동을 위한 후원의 손길이 매번 다가왔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존재해서 ‘무언가’를 항상 채워주는 것과 같이, 정말 어려울 때는 희망의 불빛이 다가오곤 했다는데 글쎄, 그걸 단순한 행운이라고 치부해야 할까? 기나긴 얘기를 듣다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이미 준비된 자와 항상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기회의 여신이 그 눈길을 외면하지 않고 성큼 다가서기 때문이다.
“사랑은 국경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제가 볼 때는 음악도 똑같다고 봐요. 음악 앞에서는 권력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심지어 어떤 피부색을 가진 외국인이든 간에, 음악은 정말 모든 사람들을 다 평등하게 만들잖아요. 그게 음악입니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음악 자체를 싫어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아요. 음악은 모든 벽을 다 허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4번출구’의 활동 목적도 당연히 그런 이유를 포함하겠죠. 사회적 편견이나 갈등을 우리의 음악을 통해서 풀어낼 수 있다는 거, 우리는 우리의 음악으로 더 많은 벽을 허물어낼 겁니다. 기대하고 응원해 주시면 우리 모두가 기쁠 겁니다. 음악으로 함께 얘기 나눠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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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나누는 과정 중에 모든 멤버들이 하나씩 다 연습실 안으로 찾아들었다. 말 그대로 ‘꽉 찬’ 상황이었는데도, 모두들 팀의 리더 한찬수 씨의 얘기를 조용히 귀담아 듣고 있었다. 아마도… 평소엔 듣지 못했던 내용들이라서 경청했던 게 아닐까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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