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잠/박수봉
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떨어진 슬리퍼 삐져나온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빠진 앞니로 자주 입술을 깨문다
도화지에 선이 하나 지날 때마다 모래바람이 불어 닥치고 부러진 농구대가 운동장에 처박힌다 반쯤 무너진 건물 속에선 찐득한 울음이 새어 나온다 별을 총총 박으며 사막을 건너던 어린 낙타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먹구름을 찢으며 나타난 검은 새의 죽지 아래서 굉음이 쏟아진다 뿔뿔이 화폭을 빠져나가지 못한 아이들 신발이 벗겨지고 팔다리가 잘린 채 널브러진 혁명의 잔해가 무정물로 갇혀 있다
연필이 지나가다 부러진 자리 죽음보다 오래 견딘 생이 앓아눕는다 어느 담벼락 모퉁이에서 시작된 모래폭풍이 수십 년간 불어대는 끝없이 메마른 땅 핏빛 여백 사이로 두려움이 번진다
아이의 연필에서 죽은 아이가 미소를 짓는다 살아서는 울고 죽어서 웃는 도화지 안의 세상 연필을 쥔 손끝에서 죽음이 기쁘게 피어나고 있다
시산맥 刊 <편안한 잠> 시집에서 |
첫댓글 진정 편안한 잠이 될 수 있을까?
읽으면 읽을수록 글의 깊이는 양파처럼 겹겹이 벗겨진다
훌륭한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