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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합당한 사람
마가복음 10:13~16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행하신 모든 사건은 대단한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키고도 남을 만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계신 곳은 언제나 사람들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갖가지 병자를 고치셨기 때문에 집안에 또는 친척이나 이웃 가운데 병자가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께 데리고 나오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익을 바라고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축복해 주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누가 아이들을 데리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부모들이 그랬을 가능성이 컸겠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녀를 공회당으로 데려가서 랍비의 안수를 받기도 했고, 일반적으로는 부모들이 집에서 자기 자녀에게 안수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존경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자기 자녀를 예수님께 안수를 받도록 했던 것이 어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가기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제지를 받고 혼이 났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생각에는 그렇지 않아도 바쁘고 피곤하신 예수님에게 쓸데없이 아이들까지 데려온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어른들 문제도 크고 중요한 것이 많은데 하찮은 아이들 때문에 시간을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기에 유대인들은 로마와 그리스 문화로 일컬어지는 가치관에 익숙하였습니다. 로마나 그리스 사회에서 가장 큰 덕목 중 하나는 ‘힘’으로서 강한 것이 선(善)이고 약한 것이 악(惡)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약함의 상징인 아이가 어른의 중심에 설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선생님을 염려해서 어린아이가 가까이 오는 것을 막았는데 예수님은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막 10: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것에 ‘꾸짖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옳고 그름에 의하여 비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노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는 제자들이 정작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의 모습이 어린아이와 같아야 함을 모르고 잘못을 범하는 모습에 대하여 주님은 불쾌하게 여기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감정의 표현을 드러나게 된 것은 바로 어린아이들의 특성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 있고 이런 아이의 모습을 지닌 자가 천국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상상력이 풍부합니다.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어린아이의 품성을 지닌 자를 귀하게 여기고 축복하시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천국은 아이들과 같이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들어갑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무한한 상상의 세계가 실제로 펼쳐지는 곳입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시면 천국에 대한 꿈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이 되어 천국을 소망 중에 바라보고 그리워합니다. 천국에 대한 확증으로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중학교 2학년이었던 셋째 형이 라디오 안에는 아주 작은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연극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 후로는 라디오를 대하면 형이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갖가지 상상의 날개를 편 적이 있었습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환상의 세계는 저를 무척 즐겁게 하였습니다.
어린이이기 때문에 이런 상상력이 풍부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의 상상력은 “한계를 뛰어넘는 생각”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천국은 우리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엡 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각하는’에 대하여 영어 성경에서는 ‘imagine, think’라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모셔 들이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서 활발하게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믿음으로 천국이 그려지고 그 나라에 대하여 생각하며 소망을 갖게 됩니다. 이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굳게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천국에 합당한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게 됩니다.
천국에 합당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사람을 말합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은 사실상 무한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본체이시기에 그분에게 한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지닌 사람은 예수님의 영, 성령으로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자라도록 하는데 주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를 겨자씨 비유에서 잘 말하고 있습니다. 막 4:31-32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이 비유에서 주목해야 하는 구절은 역시 겨자씨가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씨이고 시력이 좋지 않은 분들은 맨눈으로 식별이 안 될 경우도 있습니다.
너무 미미하고 볼품이 없는 씨가 바로 겨자씨입니다. 겨자씨는 외견상으로 보면 심히 작고 볼품이 없지만, 그 안에는 신비하고 놀라운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여기서 ‘공중의 새들’이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기보다 오히려 자라난 겨자 나무의 크기가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했음을 보여 주는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깃들인다’ 는 ‘카타스케노 κατασκηνόω’는 말은 단순히 비나 바람을 피해 잠깐 쉬어간다는 의미이기보다 거주지로 정하고 장막을 세우듯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입니다.
내 안에 임한 예수님의 생명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에서는 성령의 도움으로 밖에서는 천사들의 돌봄으로 자라서 많은 사람이 깃들 정도의 넉넉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린아이에게는 이런 잠재력이 있습니다. 지금은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아이들의 심령에 떨어진 주님의 복음은 성장할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막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어야 구원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드는 것이 같은 뜻인 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든다는 얘기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영어 성경에는 receive가 쓰였습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영접하다'로 번역했는데 결국 예수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영접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마 23:27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외식이란 자기들이 가진 선입견과 율법의 지식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의미를 가리고 있고, 더 나가서는 그리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을 막아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어린아이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만듭니다.
천국에 합당한 사람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신앙이 자랍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굳건하게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심을 하는 버릇을 회개하시고 내 논리와 내가 살아온 경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거부하는 모든 것을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간직하십시오!
세 번째는 천국에 합당한 사람을 주님은 축복하십니다.
제자들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오는 자들을 꾸짖으며 가로막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막 10:16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축복하다’는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 예수님께서 지속적으로 축복을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이 아이들을 축복하려고 오랜 시간을 할애하셨음을 뜻합니다. 어린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이 단순히 머리에 손을 얹는 안수 기도만을 원하였는데 예수님은 이 아이들을 일일이 안아 주시고 거기에 축복 기도까지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안수 기도는 짐승에게 자기의 죄를 옮겨 번제물로 드릴 때 사용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축복을 위한 안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48장에 보면 야곱이 자기의 두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머리에 손을 얹어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축복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말년에 12 아들을 앉혀놓고 아들마다 특징 있는 축복을 내려줍니다. 12명에게 축복의 예언을 하며 기도를 하였는데 그 기도대로 이뤄졌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꾼을 뽑을 때 안수 기도를 합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울 때 온 회중 앞에서 여호수아를 나오라고 하고 그 머리에 안수해서 일꾼으로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을 그렇게 뽑았습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안수했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안수를 해서 일꾼을 세웁니다. 그 다음에는 병자 안수가 있습니다. 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안수하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눈이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에게 모두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축복기도를 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변함없는 마음으로 축복하십니다. 이 축복에서는 죄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것과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믿음으로 세우실 것에 대한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존재로 세움을 받게 하시겠다는 위임의 내용이 담겨 있는 안수 기도였습니다.
천국에 대한 환상을 지니십시오! 그 나라에 대한 즐거운 상상은 우리로 강렬한 소망을 갖게 하고 신앙에 열심을 내게 하는 활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은 자고 깨면서 나도 알지 못하는 새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를 즐거워하십시오! 이런 모든 것들이 조화롭게 이뤄나갈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천국에 합당한 사람인지를 점검하여 보십시오!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게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아니면 내 짧은 지식으로 복음을 거슬리거나 의심하고 있습니까?
그전에 제가 섬기는 교회에 70대의 이 집사님과 50대의 장 집사라는 분이 제 차를 타고 가면서 뒤에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평안도 분으로 1.4 후퇴 때 남한으로 넘어오셔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고, 남편과 일찍 사별(死別)하여 외로움에 빠져 있을 때 친구의 권유로 신앙을 갖게 된 분이십니다.
그분이 이렇게 장 집사에 묻습니다. “장 집사야! 너는 어케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믿어지네? 나는 야 믿어 볼라구 그러는 데두 그거이 안 믿어진다 야”그러는 겁니다. 이분의 말을 듣고 50대의 장 집사가 “집사니~임! 무조건 믿으셔야 돼요! 그러구~ 성경을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저도 성경의 말씀이 안 믿어졌는데 무조건 믿습니다. 믿습니다. 했더니 믿어지더라고요” 그러시는 겁니다.
여러분! 성경의 말씀이 믿어지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가 믿어집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천국에 합당한 사람으로 세움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