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20-21]
조덕삼(趙德三, 1867-1919)과 이자익(李自益, 1879-1958)➃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는 각자 훌륭한 자손을 길러냈습니다. 먼저 조덕삼 장로의 경우 3대째 장로 집안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들은 독립운동가 조영호 장로, 손자는 4선 국회의원을 지낸 조세형 장로(1931-2009)입니다. 조덕삼은 교회를 섬긴 일 외에도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1906년 자비로 유광학교를 설립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한글과 역사와 성경을 가르쳤고 매일 아침 예배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아버지 조덕삼을 이어 교장을 맡은 조영호 역시 학생들에게 나라를 사랑하도록 가르쳤고 1910년 8월 29일(국치일)을 잊지 않도록 태극기를 그리도록 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와 학생들은 그려서 숨겨둔 태극기를 꺼내 만세를 외쳤습니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감옥에도 갔지만 석방된 후 만주 북간도까지 가서 독립군에 협력했고, 이 시기에는 아버지 조덕삼의 사망(1919년 12월 17일) 소식을 듣지 못해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큰 아들이었던 조영호는 이듬해 돌아왔고, 유언을 받들어 이자익 목사를 향해 “목사님, 아버지처럼 목사님을 잘 섬기겠습니다”라고 했으며, 아버지 뒤를 이어 유광학교 교장을 맡았습니다. 유광학교를 동광학원(東光學院)이라 개명했고, 1926년에는 금산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호주 장로교 선교부 요청으로 이자익 목사가 경남 거창으로 옮겨 목회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대신 스위코드 선교사(D. A. Swicord, 서국태)가 임시로 당회를 맡았습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면서 조선어 사용도 금지시켰고 학교마다 가미다나(소형 신사) 설치명령을 내렸으며, 교회마다 국민정신총동원 야소교장로회 지부를 조직하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