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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낮은 목소리로 굽어보기
저- 안미영 평론집
출-시와 에세이
독정-2020.1. 13
· 소리는 살라있는 목숨과 같다. 목숨이 끊어지면 소리도 없어진다. 소리는 곱지도 추하지도 않으며 덧없는 떨림에 지나니 않는다. 아울러 소리는 무국적이어야 한ㅇ다. 소리는 본시 제 각각의 길이 있으며 늘 새로운 것이다, 관념적이긴 하나. 이런 소리의 성격은 작가가 지향하는 문학의 운명. 안간의 운명을 보여준다.
김훈 소설에서 낭만주의는 워형질의 인간, 탐미주의 세계관이 나타난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데뷔작에서부터 <칼의 노래> <화장> <현아 노래>까지 인물은 사회적 인간이기 이전 원형질의 인간이다. 사회가 만든 인간의 가치가 아닌 동물 모습을 보여준다. 현의 노래에서 왕이나 이사부, 우륵 등은 똥, 오줌을 자리고 죽음은 비장하지 않고 동물적이다. 김윤식은 김훈을 신석기적 글쓰리라 한다. 김훈 소설에서의 탐미주의는 현존하는 사회 질서를 벗어난 곳에서 나타난다. 김훈은 자아와 세계 간의 관계를 상호보완의 관계가 아닌 철저한 대립고ㅑ 충돌, 걷대 관계로 본다. 독자는 긴장과 갈등을 통해 흥미를 느낀다. 김소진과 기형도가 문학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반추하려 했다면 김훈은 당대 현실을 배제한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에서 음악 소리는 죽음 애도하는 울음소리 순장자들의 죽음 두려워하는 아비규환과 혼용된다. 노래는 들리지 않고 소리만 난무한다.
· 공선옥의 <유랑가족>
실천문하교사 2005년-
제 3세계 노동ㄹ자, 고향(농촌)을 떠난 사람을 비롯, 이주 노동자들과 소비능력을 구비하지 못환 사람들이 고향을 대체하는 소비의 장, 돈이 풍부하게 유통되고 있는 곳을 찾아 떠난다. 돈은 당장 직면 생계 필수 물질이며 소비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중국 조선족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후, 전라도 시골에서 서울 가리봉동을 옮겨, 돈 없는 데서 살기 싫은 건 중국이나 한국이나 한가지였다며 미국 시민권을 가진 교포, 나이 많은 장애인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들어갈 꿈을 꾼다. 달곤 처는 남편도 사랑도 자식도 다 필요 없이 그저 믿을 것은 돈 밖에 없다고 했다. 수몰지구에서 수몰되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실체로서 고향만이 아니다 정서적 연대감도 수몰(사장)된다 .고향 떠난 빈곤한 노마드(원하는 목적을 위해 떠돌아다니는 사람)에게 족한 것은 돈이 아니고 애정을 비롯한 연대감이다. 가난한 삶이 가정을 지켜낼 수 있는 무기는 사랑뿐이지만 부자들의 사랑보다 더 눈물나는 사랑이다. 공선옥의 유랑가족은 유랑할 때가 비교적 안정되었다. 마지막 이야기 <먼 바다>에서 마누라가 집 나가 홀아비가 된 종만은 숨놀 보상금으로 영녀 다방녀의 빛을 갚고 데려온다. 27살 영녀는 17살 종만의 아들과 종만의 노모 틈새에서 집 나갈 궁리함 한다. 영녀 보상금으로 돈을 다 써버린 종남은 국화하우스로 보상을 꾀하며 남은 돈을 황덕팔에게 주었으나 덕팔은 영녀를 데리고 도망간다. 종만은 보에 빠져죽고 노모는 실성한다. 공선옥의 유랑은 일상이고 삶이다. 공선옥은 이 땅의 노마드를 유랑과 정주, 죽음 세 차원으로 조명하며 과거 인간, 음지의 인간이 아닌 현재 이웃의 삶으로 포용해 내었다. <겨울의 정취>를 다룬 이야기에서 ‘울화 많은 어른’과 ‘슬픔 많은 아이들’에게 현실은 ‘풍경’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다. <가리봉 연가>에서는 노래방에서 연가를 부른 명화가 길을 나서며 죽는다 <그들의 웃음소리>에서 웃음 실성이다. <남쪽바다 푸른 바다>에서는 독자의 감미로운 정취가 아니라 태풍에 바다에서 죽은 선량한 이웃을 만난다. 이 땅의 현실이 얼마나 척박한지 보여준다. 유랑민이 자유를 찾아 길을 나선다., 순례자 한은 유랑민의 평화를 찾기 위해 도피의 성격을 띠고 순례자 여행. 자기 희생적 성격을 띠고 개인의 삶을 뒤로 한채 (자기 아이가 급성신우염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도 혼자 남은 11살 아들에게 가지 못하고) 영주 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영주네 잡에가 상주역을 하며 영주에게 친지를 찾아주기 위해 긴 여정을 수행한다. 그러나 자기희생적 고행도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는 가혹한 현실이다. 우리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연대의식이다. 연대감은 고향같은 근본 공간을 통해 정서적 동질성을 존속했고 고향 상실인의 빈곤한 노마드를 이해함으로 이 땅을 생명 공간으로 창출해나가야 한다.
·또 하나의 역사와 생명 공동체
방현석 <랍스터를 먹는 시간>창비사 2003.
<문학은 생명이다>
‘문학은 밥이다’가 우리를 유혹한다면 ‘문학은 생명이다.’는 명제는 우리를 각성시킨다. 문학을 통해 밥을 구할 때 우리 삶은 구차해지며 문학 생명을 잃을 수 있다. 문학이 생명이며 동시에 받도 되면 좋지만 밥은 생명의 수단이지만 목적이 되지 못한다. 문학의 의의는 밥과 구분되는 생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생태계에서 한 개체의 생사는 필연으로 다른 개체들에게 영향 미친다. 생태계의 연대 사슬은 생명 생래적 운명인 공존공생을 보여준다. 생명이 중시하는 유기체이듯, 문학은 독자들에게 생기를 준다. 문학의 생명은 단선적이지 않고 영속적이다.
<겨우살이>는 학교의 규칙, 사회의 법이 안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앗아간다. 방현석은 소수 권력 위해 다수 희생당하는 사회는 인간 생기와 생명을 위협한다고 경고한다.
<랍스터를 먹는 시간>
에 나아 우엔 티 라엔, 본 반 러이와 팜 반꾹과 같은 ‘산자’의 표상을 빌어 ‘죽은 자’를 위해 피운 향이 타오르고 있다. 작품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진혼제가 된다. 방현석은 죽은 자들의 사인을 둘러싸고 살아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베트남 마을을 배경으로 형을 증오한 건석을 추궁. 베트남 마을을 배경으로 양민 학살한 한국군을 추궁. 베트남에서 건너온 형이 성장하고 한국 노동운동에 희생자가 되기까지, 나는 배다른 형을 혈육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가 이제 형의 나라에 와서 자신을 반성한다. 형이 공장에서 죽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집에서 동생에 의해 형은 죽어가고 있었다. 형의 죽음은 단순히 육체의 사멸이 아닌 나의 의식에 잔존. 죽은 형은 아직 살아있어 단순히 죽은 존재가 아니라 나의 의식 속에 더욱 견고하게 살아남아 내 삶을 견인한다. 내 일생과 의식을 좌우한다. 베트남 노동자를 바라보는 내 의식 안에 죽은 자들 사인에는 한국 현대가사 개입, 형 건창을 죽인 게 단순 시위진압대가 아니듯, 베트남 양만 학살도 단지 한국 군인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 민족의 문제이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을 주목하는 작중 인물을 통해. 이제 이 문제는 민족의 문제이기 이전 피해자의 구분 없이 원환적으로 얽혀있다.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의식이 혼종되어 있다. 작중 인물들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식민지화 하려든다. 이복형제인 나와 형은 한국과 베트남을 대표한다. 한국은 미국에 대한 탈식민주의를 지향하고 동시에 베트남에 대해 식민주의를 견지한다. 나는 베트남 현지 공장에서 노사(베트남과 한국)의 관계로 재기되는 식민자의 모습을 목격한다.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미국과 한국에 대한 베트남의 관점은 논외로 하더라고. 베트남은 식민지와 피식민자로서 한국의 두 얼굴을 비추어준다. 죽었다고 다 없는 것이 아니고 살았다고 다 있는 것이 아니다. 방현석 눈에 보이는 모든 실체가 현존재로서 진의를 발하는 것이 아니듯,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진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생명 영속성과 역사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자동차는 물소 떼를 만나 속력을 낼 수 없을 때 팜 반 꾹은 “이 길은 우리 것이 아니야. 저 아이들의 아버지들이 열고 물소들이 넓힌 길을 이 차가 지금 가고 있는 거야.”한다. 비약하자면 이 땅 역사는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과 자연이 만든 것이다. 죽었지만 살아있는 그 생명의 힘이 죽은 듯이 살아가는 우리를 각성시킨다.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서 방현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과거와 소통하는 주술적 힘을 보여준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가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방현석은 죽은 자의 삶을 사는 살아남은 자의 목소리를 빌어 생명은 일회적이자 않으며 영속적으로 그 힘을 확장시킬 수 있음을 재연한다. 식당에서 베트남 참전 상이용사가 나에게 “한국군이 내 다리를 이렇게 만들었다.”하자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나에게 말하지 말라”하지만 내가 하지 않은 일도 나와 관련이 있어 나는 알아야 하고 책임져야 한다. 우리 세대가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한 것이 아니라도 우리는 잔혹하게 학살된 베트남 양민을 알아야하고 우리가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지지하지 않았더라도 무참히 죽음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이라크 양민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으로 파괴된 세대가 스스로를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지난 세대를 답습하는 다음 세대의 관행은 절망적이다. 과거 상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념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의문으로 베트남이든 아라크든 한국이든 우리에게 초점이 되어야 할 대상은 생명이다. 책임 있는 나라. 책임 질 수 있는 나는 결국 생명 문제에 귀결된다. 작중 인물들에게 자부심과 경멸은 생명에 대한 책임의 유무로 구분, 역사로 접어둔 문제를 소환, 우리에게 책임을 환기시킨다. 과거든 현재든 책임지지 않으면 나를 비롯한 이웃 생명은 위협받는다. 방현석은 등단 이후 줄곧 노동소설을 쓰며 낮은 자가 대상이었고 그의 목소리는 늘 젖어있었다. 대상 전달 작가의 목소리가 커지고 빨라질수록, 독자는 대상의 실체가 들려주는 소리를 못들을 수 있다. 희미하다는 것은 약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영속적이고 도래되어야 할 것이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페르소나는 특정 이물의 성격이다. 독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27살 사형수와 일흔 넘은 수녀. 수도자. 화자, 교수이자 미혼여성(자살미수자) 문유정을 설정하여 다른 사람을 죽이려는 것이건 자신을 죽이는 것이건 살아내야 하는 생을 훼손한다는 점에서 삶에 대해 동일한 태도를 가진다. 사형수와 자살미수자는 그들 삶의 황폐한 현실을 용서하지 않는다. 사형수 정윤수와 자살미수자 문유정은 삶을 버리고 파기하려하지만 그들이 증오한 것은 생이 아닌 더 잘 살아보려 했던 삶에 대한 의지가 좌절되면서 생을 경계하고 부정했던 것이다. 모니카 수녀는 정윤수에게 평화를 주는 것처럼 조카 문유정에게도 자기를 돌아볼 평화를 준다. 그 평화는 마술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천천히, 어렵게 만들어져 종국에는 수녀 없이 문유정과 사형수 두 사람이 서로 만나면 서 상대의 상처를 치유해준다. 두 사람의 서로의 치부를 볼여 주고 서로 상대에 해단 치유자가 된다. 죽음을 대면하는 방식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생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가면을 벗어버린 자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반면, 가면을 벗어버리지 않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막으려 한다. 누구에게나 공평히 찾아온 죽음은 우리들 삶의 반성적 틀이 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른 형벌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들은 타자에게 사랑을 주면서 스스로 치유될 수 있다는 생의 역설적인 힘을 깨닫는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인간에게 종교와 신이 위안을 준다. 평화를 주면서 스스로 절ㄴ망에 맞서는 능력을 기르고 인내를 기르도록 한다. 사형수 정윤수는 “돌이 빵이 되고 물고기가 사람이 되는 건 마술이고 사람이 변하는 게 기적임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마술이 아니라 기적에 동참한다. 인간으로서 인간됨의 본질을 자각하고 스스로 완성을 실현하는 게 종교이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상투적이지 않은 ‘진짜 이야기’를 발견한 것도 그녀가 스스로 변하는 기적의 대열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사형수는 자살미주자에게 샹의 의지를 일께워주고 자살미수자는 사형수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공지영은 삶과 죽음의 길목에 애국가를 설정 사형수 정윤수의 동생 은수가 프로야구 개막식에 울러 퍼지던 애국가를 유독 좋아했는데 그 애국가를 부른 사람이 자살미수자 문유정으로 설정한다.
“형, 우리나라 좋은 나라지, 나는 이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왠지 우리가 훌륭한 사람이 된 거 같애.”
동생의 이 말로 형 윤수는 세레 받기 전 문유정이 부른 애국가를 들으며 동생을 떠올린다. 애국가를 부르는 자살미수자와 애국가를 애창하는 사형수, 이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애국가는 그들 모두가 이 땅에 발 딛고 있는 공동체임을 일깨워준다. 부단히 이 땅의 현실과 만나려는 공지영의 현실에 대한 애정을 읽을 수 있다. 공지영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문유정을 통해 소설 쓰기의 의의를 “신문기하에는 사실은 있는데 사실을 만들어낸 사실은 없다. 사실을 만들어낸 게 진짜 사실인데 사람들은 거기에는 관심이 없다.”며 진실을 찾아내는 일 못지않게 진실을 표현하는 방법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자살미수자의 고백을 이 작품의 문체로 설정, 자살미수자의 불안하고 거친 진실이 장문의 고백체와 혼란스러운 구어체로 구사되고 사형수의 고통과 상처는 블루노트를 통해 간결하되 여운이 남는 문장으로 처리된다. 남성과 구분되는 여성성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모성성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살, 살아있는 것에 대한 수용이 아니라 죽음을 비롯하여 죽어가는 것에 대한 포용이다. 공ㅈ비여은 죽어가는 것을 살리려는 동시에 죽어가는 일이 지닌 공평성을 독자들에게 알리며 반성적 사유의 틀을 제공한다. 공지영은 궁극적으로 이 땅의 평화를 갈구한다.
· 땅은 잉여의 부를 축적하는 물질이 아니며, 단지 땅 자체가 서방 품만큼이나 강렬하게 유혹하는 외경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단지 좋은 뿐, 그래서 그 속에서 살고 싶은 마음일 뿐, 그 땅이 누구의 소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껏 인간은 인간을 대지의 주인으로 두어 인간끼리 대립, 전쟁했지만 이제 인간이 자연에 귀환할 필요가 있음을 쓴 소설이 김원일의 <불의 제전>이다. 김원일은 <마당 깊은 집> <노을><불의 제전>에서 자전적 가족사를 통해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소설사에 족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