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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대첩□
진주성 혈전 1
임진왜란 3대 대첩이 아닌 것은? 하는 문제 기억나냐? 교과서 속의 3대첩은 행주,진주, 한산대첩이지만 행주 대첩의 지휘관 권율도 자신의 공으로 행주보다는 이치 전투를 들었고 그 외에도 ‘대첩’들은 많은데 꼭 그걸 3대첩이라고 정한 근거가 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물론 3대첩의 의미는 절대로 작지 않지. 한산대첩과 행주는 가전사에 나왔었으니 생략하고 오늘 얘기할 진주성 전투로 들어가 보자고.
일단 충무공부터. 여기서 말하는 충무공은 이순신이 아니야.역시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장군을 말하는 거지. 진주목사 김시민이야. 그는 오늘날 독립기념관이 서 있는 충청도 천안시 목천면 출신이야. 요즘 병천 순대로 유명.... 음 이 얘기할 때는 아닌 거 같고 아버지 김충갑은 조광조의 문인으로서 퇴계에게서도 사사받았던 이름 높은 유학자였지. 그 형제들도 다 과거에 올랐다고 했으니 공자왈 맹자왈 소리와 먹 냄새가 집에 그득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집안에 좀 별종이 태어났으니 그게 김시민이야.
전설에 따르면 이 소년 김시민은 아홉 살 때 동네 가축들을 괴롭히던 큰 뱀 (이무기?)을 활로 쏘아 잡았다고 하고 수 백년 뒤까지도 그 동네 사람들이 “김시민 장군이 활 쏘아 뱀 잡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고 하니 만만한 소년은 아니었던 것 같아. 이 소년은 문방사우보다는 활과 친했고 시를 쓰고 경전 읽기보다는 칼을 휘두르며 말 달리기를 더 좋아했어. 그래서 과거도 문과가 아닌 무과로 풀린다. 작가 김성한의 <임진왜란>에 보면 그 어머니가 노발대발하여 “문과 집안에 무과가 웬 말이냐”고 하여 무려 10여년간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 불같고 칼 같은 성격을 자식에게 물려 준 모양이야.
군관으로 있던 김시민은 병조판서와 트러블을 일으키게 돼.병조판서는 일도 일이지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면서 감히 판서 앞에서 하나도 기가 죽지 않는 군관에게 부아가 치민다. 그래서 아마 이런 류의 말을 한 거 같아. “대가리에 쓴 전립(조선 시대 군모)벗어 버려라. 너 같은 넘이 무슨 군관이라고.힘만 세고 미련한 놈은 장수 자격 없다.” 직장 생활에서 흔히 있는 깨짐이고 사후 욕 한 사발과 술 한 잔으로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굴욕인데 김시민은 그야말로 하늘같은 판서 앞에서 깽판을 쳐 버린다.
그는 전립을 벗어 땅에 내동댕이치고는 밟아 버리면서 이렇게 부르짖었던 거야. “이 전립 따위가 아니라면 장부가 남에게 모욕 받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뭉개진 건 애꿎은 전립만이 아니었겠지. 병조판서의 위엄도 같이 짓밟힌 거지. 하늘같은 병조판서 앞에서 ‘배를 짼’ 김시민쯤 되면 판서에게 이렇게 얘기했을지도 모르지. “말조심하셔유 판서 나으리. 벼락이라는 게 하늘애서만 치는 게 아니우.” 한동안 김시민은 백수가 된다.
그런데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고 전쟁 협박도 끊이지 않으면서 무관들의 남부 지역 배치가 이뤄지면서 김시민의 이름이 거론된다. 1583년 여진족 니탕개가 일으킨 난 때 참전했던 무장들은 거의 모두 기용된다. 이순신, 김시민, 원균, 이억기 등이 그 ‘니탕개 리스트’ 출신들이지. 그는 진주판관으로 임명돼서 진주로 내려간다. 그때 그의 부임 행차를 보고 모친은 김시민을 용서하고 만나 주었다고 해. “문관만 벼슬인 줄 알았더니 무관도 괜찮구나.” (김성한의 <임진왜란> 중)
즉 진주목사가 아닌 진주판관으로 진주에 온 김시민. 전쟁이 터지고 진주 목사 이경은 지리산으로 몸을 피했는데 판관도 그를 따라야 했지. 이경이 산에서 병사한 뒤 진주목사에 오른 그는 그때껏 쌓아온 무장으로서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해. 당시 왜군은 경상 좌도를 주로 장악하고 있었는데 점점 낙동강 넘어 서쪽으로 슬금슬금 발을 들이밀었지. 이들을 혼내 준게 경상 우도의 의병들, 즉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대였는데 김시민은 이들과 함께 연합작전을 펼치며 고성, 창원 일대까지 들어온 일본군을 격파해. 이런 일이 반복되자 경상도 주둔 일본군은 진주를 주목하게 된다.
“진주에노 조선군의 배후 기지이자 주력부대가 있다데스. 거기다 진주만 차지하면 젠라도로 진출하는 것도 대끼리 쉬워진다데스.” 이렇게 돼서 진주성 공격을 위한 3만 원정군이 편성되게 돼. 지금까지 일본군이 소규모 선발대나 별동대의 낙동강의 잔물결이었다면 이제 대군의 쓰나미가 본격적으로 경상 우도를 덮치게 됐지. 이 부대를 이끈 왜장 호소가와 다다오키의 후손이 일본의 수상이었던 호소가와 모리히로라는 건 하나의 팁.
조선군의 주력부대가 있다는 건 일본군의 오버였어. 김시민의 휘하에는 3천 8백명 정도의 군대가 있을 뿐이었거든. 김시민이 꾸준히 훈련시키고 실전에도 여러 번 단련된 정예병이긴 했지만 일본군의 1/5에서 1/7 정도의 수였지. 일본군은 거침없이 진주로 쇄도한다. 그 와중에 창원에서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이끄는 조선군이 막아 봤지만 괴멸당해. 유숭인도 괜찮은 지휘관으로 이순신이 경상도 해역에 출동했을 때 유숭인이1천여 기병대를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난중일기에 남기기도 했지. 하지만 유숭인도 대군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어. 남은 군대를 이끌고 진주성 동문 앞에 이른 유숭인 부대는 당연하게 외친다.
“성문을 열어라. 경상 우병사 영감이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 성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어. 군졸들이 경상 우병사 현신을 여러번 외쳐도 진주성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어. 마침내 경상 우병사 유숭인이 직접 나선다. “진주 목사 나오라. 나는 유숭인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그제야 진주 목사 김시민이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왜 성문을 열지 않는 거요?” 유숭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어. 이미 일본군은 뒷덜미를 움켜잡을 듯 다가서고 있었고 자신의 패잔병 부대는 더 이상 도망갈 힘도 없을 만큼 지쳐 있었으니까. 하지만 김시민은 성문을 열지 않아. “성은 제가 지킬 테니 밖에서 응원해 주십시오.” 병사는 종2품, 목사는 정3품. 벼슬도 병사가 위였고 특히 전시에는 병마절도사는 경상우도의 모든 병력의 총사령관이었어. 그러나 목사가 병사를 내쳐 버리는 순간.
만약 유숭인이 차후에 문제삼는다면 김시민은 전시 명령 불복종으로 참형에 처해져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어. 하지만 김시민은 고개를 젓는다. 유숭인이 거느린 1천 군대가 절실하기도 했지만 눈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려. 이유는 다양할 수 있겠지.
가장 큰 것은 자신이 조련하고 함께 싸운 군대의 지휘권에 혼란이 일어난다면 치명적이라는 계산이었을 거야. 창원성을 맥없이 잃은 유숭인의 역량도 미심쩍었을 게고, 유숭인 부대를 성에 들일 때 일어날 혼란 때 일본군이 들이닥친다면 싸우지도 못하고 성이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도 감안됐을 것이고. 하나 더한다면 김시민은 일종의 시위를 한 것이지 않을까. 일본군이 온다는 소식에 공황 상태에 빠졌던 성 사람들에게 “나도 목숨을 걸었다. 행여 성 사수에 방해될까 병사 영감을 내쫓았다.”는 메시지를 주려던 것이 아닐까. 유숭인 부대는 일본군에 포위돼서 전멸 당한다. 일찍이 병조판서 앞에서도 배를 쨌던 김시민은 그 참혹한 최후마저 성 안의 사람들의 각오를 다지는 데에 이용했는지도 몰라. 이제는 싸울 수밖에 없다.
임진왜란을 통틀어, 아니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현실주의자 곽재우, 후일 2차 진주성 혈전 때 지는 싸움은 안하겠다고 끝내 입성을 거부했던 그는 이즈음 진주성 지원에 나서고 있었는데 이렇게 한 마디 했다고 해. “온전히 성을 지킬 수 있을만한 계책이다. 진주 사람들의 복이로다.” 김시민은 용맹하고 불같은 성격의 무장이었지만 곽재우의 현실 감각도 갖추고 있었어.
그는 화약 수백 근을 미리 만들어 놨고 심지어 일본군의 조총을 본뜬 개인화기도 만들어 놨으며 하다못해 끓는 물을 적에게 들이붓기 위해 물을 끓일 솥까지 걸어 두고 있었어. 행주산성은 사실 원치 않는 싸움터에서 어쩔 수 없는 싸움에 내몰려 악으로 깡으로 이긴 전투였다면 진주성은 임진왜란 중 몇 안 되는 준비된 공성전이었고 그 전투는 전쟁의 모든 양상을 다 보여 주게 돼. 마침내 1592년 음력 10월 5일 일본군이 진주성을 향해 치닫는다.
진주성 혈전 2
1592년 음력 10월 4일 진주성에 입성을 거부당한 유숭인 부대는 일본군과 성 밖에서 싸우다 전멸한다. 일종의 전초전이었다고나 할까. 성 안 사람들은 그 최후를 알았고 다음은 자신의 차례라는 걸 직감했어. 진주는 경상 우도의 고을 가운데 거읍이기도 했고 호남으로 향하는 관문이었어 오늘날에도 남해고속도로가 진주를 통과하거니와 진주 다음은 하동, 하동 넘으면 바로 전라도 구례지.
일본군도 경상도 점령군 태반을 동원하거니와 조선군도 사활을 걸고 있었어. 일본군이 진격할 즈음, 일찍이 “일본이 쳐들어 올 리가 없습니다.”라고 장담했다가 죽음을 당할 뻔 했던 학봉 김성일은 경상도 초유사로서 사방에 전령을 띄워 의병들의 진주 집결을 호소해. 이에 곽재우를 비롯해서 경상도 의병은 물론, 최경회 등이 이끄는 전라도 의병들까지도 진주로 향해.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주의를 어지럽히고 기습으로 타격을 줄 요량이었지. 즉 진주성은 외로운 성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3만이라는 일본군의 바다에 둘러싸인 섬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지.
10월 5일 일본군의 주력이 진주성을 완전히 에워쌌다. 진주성 가 봤니? 남강을 해자로 삼고 쌓았고 평지성 같지만 지형을 잘 이용해서 공격이 그리 쉽지 않다는 느낌을 주는 성이다.물론 성벽 태반은 조선 시대 그 성벽이 아니지만 말이야. 일본군은 남강을 제외한 삼면에서 성을 바라보면서 칼을 갈았지.
아마 병졸들끼리는 내기도 했을 거야. 처음에는 “조선군이 도망을 간다 안간다.”로 내기했을 것이고 도망가지 않자 “함락하는 데에 하루 걸린다 이틀 걸린다.”가 이슈였겠지. 일본군 소부대가 아니라 작심하고 편성한 대규모 본대가 패한 적은 6개월 전 부산포 상륙한 이래 없었어. 그런데 일본군은 조선군이 예상 외로 많다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김시민이 백성들에게까지 군복을 입혀 성 위를 돌아다니게 하면서 병력을 과장했거든.
대군 앞에서도 진주성은 조용했다. 일본군이 도깨비 가면을 쓰고 위력 시위를 벌여도 마치 사람 없는 성 같이 침묵을 지켰다고 해. 이건 그만큼 성민들이 긴장했다는 뜻도 되지만 성 전체가 일사불란한 통제 하에 있었다고 할 거야. 10월 6일 일본군은 읏쌰 읏쌰 거리면서 진주성 앞으로 쇄도해 왔어. 조선군은 고요히 있다가 적군이 가까이 왔을 때 화력을 퍼붓는다.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성능은 떨어지지만 근거리에서는 별 손색이 없는 승자총통이 불을 뿜었고 현자총통 등 대포들도 일본군을 한 번에 여러 명씩 날려 버렸지. 일본군은 간만에 뜨거운 맛을 보게 된다. 거기에 곽재우를 위시한 의병들이 계속 뒷덜미를 괴롭혔어. 자다가 모기 한 마리에게 당해 본 사람은 알지. 그 왱왱거림이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지. 하물며 수십 명의 의병들이 이리 치고 저리 부수고 도깨비처럼 불쑥 나타나 칼질을 하고 도망을 하면 3만 명 전체가 피곤하게 되는 법.
또 한 바탕의 전투가 끝난 뒤 김시민은 준비시켜 뒀던 악사들을 문루에 올린다. 향수와 감정을 자극하는 구슬픈 가락을 왜군들에게 들려 준 거야. 사람이란 게 단순하다. 고향 생각 가족 생각이라는 건 마치 복병 같아서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사람 정신을 사로잡을지 모르는 거지.
진주성을 공격한 일본군의 지휘관 중의 하나였던 호소카와만 해도 대단한 애처가로 유명했다고. 그 아내는 대단한 역적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스히데)의 딸이었지만 끝내 이혼하지 않고 버텼고 전쟁 중에도 무수히 러브 레터를 보냈다고 알려져 있지. 장수도 그럴진대 병사들은 어땠겠어. 공성전을 준비하는 와중에 김시민이 악사들을 대기시켜 둔 이유였지. 심리전. 뭐 별 것 아닌 것 같다고? 심리전은 원래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슬금슬금 힘을 빼는 권투의 보디 블로우 같은 거야. 북한이 삐라 풍선에 저렇게 악을 내는 거 보라모.
“제기랄 달이노 밝다. 마누라하고 애새끼들은 잘이노 있겠지.” “하 저 조센진들 음악은 내 마음 같소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던 일본군 지휘부도 당황한다. 이것들이노 지금이노 우리를 놀리고 있지 않소까. 하지만 산전수전 겪은 일본군들이 이 정도에 당황하진 않았어. 그들은 그들 나름의 심리전으로 진주성의 피리 소리에 맞선다. “아이들이노 끌고 와라데스.”
포로로 잡힌 조선 아이들이 끌려왔어. 그들에게 경상도 사투리까지 구사할 줄 아는 일본군들이 나서서 할 말을 교육시켰지. “느그 무슨 말을 하나 하모 말이다. 조선 팔도가 다 일본군한테 넘어갔는데..... 따라해 봐라. 옳지. 조선 팔도가 다 넘어갔는데 새장 같은 성에서 지끔 뭐하십니꺼. 외아라. 빨리 나와 항복하이소. 이대로 하는 기다. 허튼 소리 하는 자슥은 바로 모가지 뗀다. 내가 조선 사람으로 보이재? 나는 대마도 사람이다. 내가 딱 듣고 있을 기니까 알아서 해라.”
그런데 왜 아이들이었을까? 어른 포로가 없어서? 그건 아니었을 거야. 일본군 또한 심리전을 편 거야. 주변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해도 애가 다쳤다고 하면 한 번 더 들여다보는 게 사람들 마음이야. 아직 변성기도 안 지난 아이들이 쨍쨍거리며 항복하세요. 다 끝났어요 외치게 하는 게 훨씬 더 성 안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고 여긴 거지. 아이들은 성문 밖을 돌며 울부짖는다. “항복하이소. 아저씨들 제발 항복하이소.”
당연히 성 위의 조선군들은 울컥할 수밖에 없었어. 우선 아이들이 불쌍했을 것이고 그 마음이 넘어서면 화가 났을 거야. 아기들 울음에 젖 물리다가 결국은 짜증이 나듯이. “이 새끼들 확 고마. 그냥 칵 죽어뿌라. 택도 아인 소리 하지 말고!” 거친 욕설이 날았고 성미 급한 병사는 화살을 재기도 했어. 바로 일본군들이 노리는 상황이었지. 분노가 원칙에 앞서는 집단은 항상 패한다. 그래서 심리전이란 상대방의 사기를 떨어뜨리거나 정반대로 약을 올려서 분기탱천하게 만들거나 쌍방향으로 전개되지. 이때 김시민이 벼락같이 소리를 지른다. “대답하지 마라. 소리치지도 마라. 어기는 놈이 있으면 목을 치겠다.” 명령은 구구전승으로 성벽을 돌았고 진주성은 다시 무거운 침묵에 빠진다. 대답 없는 선동만큼 무력한 건 없지. 일본군은 다시 총공격을 준비한다.
10월 8일 일본군은 벌떼같이 성벽에 달라붙는다 김시민이 단련했던 3800명의 조선군은 물론 돌 들 힘과 던질 깡이 있는 모든 조선 백성들이 성벽 위로 올라와서 일본군에 맞섰지. 여자들과 아이들은 쉴 틈도 없이 싸워야 하는 병사들을 위해 나물과 밥을 비벼 일종의 전투 식량을 만들어서 성벽 아래로 날랐다. 진주 사람들은 이게 진주비빔밥의 원조라고 말하고 있지.
일본군과 조선군과의 혈투가 곳곳에서 펼쳐졌다. 이미 조선군은 전쟁 초기의 허술한 관군이 아니라 김시민 휘하에서 몇 번 전투를 치르며 승리를 맛보기도 한 군대였어. 총을 쏘고 포를 갈기고 화살을 퍼붓고 사다리를 밀치고 창으로 내리찍고 일본군은 악착같이 그를 피해 성에 달라붙었어. 조금도 밀리지 않고 싸우던 조선군이었지만 전투가 한창 진행되던 중 절망적인 외침을 듣게 된다. “화살을 아껴라. 화살이 부족하다.” 김시민이 가장 신경을 쓴 게 화약과 화살이었고 초유사 김성일로부터도 우선 지원받은 게 화살이었는데 워낙 대군을 상대하다보니 전투 며칠만에 화살이 바닥나기 시작한 거야.
진주성 혈전 3
김시양이라는 사람 (김시민의 서제(庶弟)라고도 하는데)이 쓴 자해필담이라는 책에서 김시민은 이렇게 개탄했다고 하네. “평화가 200년 계속되는 동안 백성은 군사를 알지 못하고 바람에 날리듯 무너짐에 감히 무기를 잡을 자 없도다.” (뭐 50년 동안 냉전 상태에서 대치하고도 잠항 능력 없는 잠수함을 사들이고 사격을 하는데 불발이 나는 대포로 전방을 지키고 있는 나라도 있지만 말이야.) 어쨌든 200년 전쟁 없던 평화의 나라의 무장 김시민은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어.
그 가운데 으뜸은 역시 조선이 일본에 비해 비교우위에 있던 화약 무기였어. 개인화기야 일본에 미치지 못했지만 일본군이 갖지 못했던 화포, 200년 전 최무선이 화약무기를 최초로 해전에 사용하여 왜구 함대를 불태운 이래 천자지자 현자 황자 등 다양하게 개량돼 왔던 그 화포. 김시민은 그 화포에 사활을 걸었고 무려 500근 (150근이라는 기록도)을 비축해 두고 있었지. 김시민은 화살이 떨어져 간다는 걸 알면서도 당황하지 않았어.
화살이 가장 많이 퍼부어진 건 왜군이 끌고 온 공성용 누각이었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적이야 끓는 물 붓고 돌로 찍으면 되지만 누각 위에서 조총을 쏴 대는 적병들을 상대하려면 화살을 쏠 수밖에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왜군은 누각에 물을 끼얹어 불화살도 먹히지 않게 만들어 놨지. 김시민이 필사적으로 긁어모으고 만들어 놓은 화약은 이때 빛을 발한다. “현자총통! 누각을 겨눠라. 누각을 부숴라. ” 일본군 조총병들도 아가리를 내민 화포를 움직이는 조선군을 향해 총알을 퍼부었지만 조선군의 손이 더 빨랐어. 화살 수백 발을 쏘아야 불이 붙던 누각들이 현자총통 한 방에 산산조각나서 무너져 갔다.
진주성은 남쪽은 남강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개천과 해자 (성벽 주위에 판 못)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일본군은 공격을 쉽게 하기 위해 해자와 개천을 짚과 송판으로 메우려고 했어. 김시민은 웬만큼 짚과 송판이 쌓여 일본군이 걸어서 건널 지경이 되자 또 다시 화약을 사용한다. 장작더미에 화약을 넣고 불을 붙여 그 위에 떨어뜨린 거야. 그냥 장작불로만은 타지 않을 젖은 송판과 짚들도 화약의 폭발에 이은 화기에는 활활 불타올랐고 일본군들은 그대로 불바다 속의 탄 생선으로 죽어간다.일본군이 사다리를 조밀하게 엮고 그 위에 그물을 촘촘하게 둘러친 산대를 과시하며 성을 위압하자 조선군은 자루가 긴 낫과 도끼를 동원해서 벼 베듯 해 버렸고 격전의 와중에 화살을 잡아당기는 모양의 인형을 성벽에 세워 놓고 일본군의 총알을 집중시키는 변칙(?)을 쓰기도 했다.
임기응변이라는 것도 준비된 사람이 할 수 있는 법이지. 컨닝도 실력이 있어야 하고 말이야. 진주성 전투에서 발휘된 조선군의 역량은 의로움이나 용감함에서 나온 게 아니라 철저한 준비에서 나왔어. 전투 와중에 짚으로 인형 만들 시간이 있었겠어? 만들어져 있었던 거야. 김시민은 그런 식으로 상대방의 총탄 소비를 유도하고 이쪽의 장비를 아끼려고 했었던 거야.앞서 1에서 얘기했던 짚단 인형들이 병력의 많음만 과시하려던 건 아니었다고. 이런 준비가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상관을 내치면서까지 자신의 지휘권을 지키려고 했던 거 아닐까. 김시민은 격전의 와중에 곳곳을 누비면서 병사들에게 물을 먹이고 눈물 젖은 호령을 하면서 사기를 돋웠어. “죽을 땅에 빠지고서야 살 길이 열린다고 했다. 싸워라. 싸워라.”
일본군은 일단 물러선 뒤 주변의 의병 소탕 작전에 나서. 숫자는 얼마 안 되는 의병대 같지만 하도 귀찮게 하니 일단 이들부터 일소하고 보자는 마음이었지만 원래 대군으로 게릴라를 공격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그렇게 소규모 전투 외에는 소강상태를 보이던 날 밤, 일본군 진영이 갑자기 부산해진다. 횃불을 켜고 짐을 꾸리고 천막을 거두고...... 그러나 진주성은 환호하지 않았어. “왜놈들이 물러간다!” 성벽 위의 조선군들은 펄쩍펄쩍 뛰고 성내가 조용하지 않아야 마땅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하지만 일본군은 철수하는 게 아니었지.
아득한 옛날 트로이 공방전에서 그리스군이 철수하는 척 하면서 트로이의 뒤통수를 친 방식으로 진주성을 기습하려는 거였어. 조선군은 그걸 알고 있었지.
그로부터 몇 시간 전 한 아이가 진주성 북문에 뛰어든다. 며칠 전에 항복하라고 울부짖던 소년 중의 하나였어. 하나 까먹은 게 있는데 일본군들은 조선 팔도에서 사로잡은 아이들을 다 데리고 있었어. 즉 조선 팔도가 다 넘어갔다는 걸 과시하려는 심리전의 도구였지. 그 중의 한 아이가 탈출해서는 온 진주성민을 살리는 정보를 준 거야.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내일 새벽에 총공격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식의 현란한 페인트 모션 뒤에는 반드시 강력한 한 방이 있게 마련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