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래기
말을 하지 않고 보여주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통하는 것이 사람의 정이다. 정은 틈만 있으면 마음속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부드러운 물줄기 같다. 택배로 보내온 상자 안에는 길고 깨끗하게 마른 시래기가 가지런히 담겨 있다. 시래기가 소갈비보다 더 반가 왔다.
개성이 고향인 어머니의 솜씨를 닮아 요리에 자신이 있었다. 사 먹는 음식 값이면 집에서 푸짐하게 차릴 수 있고, 떠들거나 시간이 지체되어도 눈총을 받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한 모임은 집에서 차린다. 잡곡밥을 하고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보편적으로 잘 먹는 시래기나물과 시래기 고등어조림을 하거나 시래기 된장국을 끓인다. 회원들은 동파이프를 깐 방이 온돌방의 아랫목처럼 따끈따끈 해 담요에 발을 묻고 담소나누기를 좋아 한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문창반 모임을 우리 집에서 가졌다. 회원 중 한 분이 그 때 먹은 시래기 된장국이 잊히지 않는다며, 양구에 있는 친정에서 보내온 시래기를 나누어 택배로 보내왔다. 시래기를 삶아 냉동고에 넣어두면 푸성귀가 흔해질 때까지 반찬걱정을 잊고 살아도 될 것 같아 여유가 생긴다.
시골은 집집마다 추녀 밑에 시래기가 걸려 있다. 말린 시래기는 미네랄과 무기질, 비타민 D가 풍부하고, 칼슘의 흡수를 도와주며 섬유질이 풍부하여 변비에 좋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주는 웰빙식품이다.
시래기를 얹은 고등어조림 냄새에 회가 요동을 친다. 그 나물에 그 반찬이지만 끼니때마다 하던 반찬걱정을 덜었다. 밭을 팔고나니 돈을 주고 시래기를 사 먹게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추 잎 하나가 아쉬웠다. 시래기라고 다 같은 맛이 아니다. 시장에서 사는 시래기는 질기고 맛이 없다. 농사를 지을 때는 무청의 고갱이만 다듬어 소금물에 데쳐 말렸다가 겨우내 먹었다. 시래기 된장국을 끓이고, 나물로 먹고, 홍합이나 고등어를 넣고 조림을 하고, 기름진 것을 좋아하는 식구들은 시래기와 돼지 등뼈를 넣고 끓인 감자탕을 제일 좋아한다. 겨우내 김치가 반양식이라면 파랗게 말린 시래기도 그 못지않게 반찬걱정을 덜어준다.
집에서 토끼를 키우고 있는데 과일 껍질을 주기도 하지만 토끼의 겨울 먹이로 여러 가지 풀을 말려 두었다가 준다. 아카시아 잎과 칡잎도 좋아하지만 말린 시래기를 가장 좋아 한다. 토끼장 문을 허술하게 닫아 뛰쳐나오면 마당을 돌다가 문틈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식구가 총 동원하여 한바탕 달리기 대회를 연다. 숨을 헐떡거리며 뒤쫓지만 얼마나 빠른지 당할 재간이 없다. 차 밑을 통해 본 넷으로 들어갔다가 털이 누른 적이 있고, 눈보다 희던 털이 잿빛 토끼로 된 적도 있다. 구석으로 들어가 손이 닿지 않을 때는 시래기를 들고 약을 올리면 살금살금 따라 나온다. 먹는 것에 열중하였을 때 잡을 수 있다. 다른 먹이는 거들 떠 보지 않으나 시래기를 보고 달려드는 것을 보면 토끼도 시래기의 영양가를 알고 있는 눈치다. 가난하던 시절, 시래기죽을 먹고도 힘든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래기가 그 만큼 영양가가 높기 때문일 것이다.
양구 해안에 사는 농부는 시래기로 부농의 꿈을 이루었고, 판매에 그치지 않고 시래기 축제까지 열어 관광객을 모은다고 한다. 예전같이 무를 생산하고 남은 무청을 말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무는 버리고 시래기만 채취하는 품종으로 개량을 하였다. 입소문을 타고 주문량이 늘어나자 해안에서 생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기후와 환경이 비슷한 영월까지 계약재배를 하고 있다.
자취를 할 때는 마가린에 맛나니 간장만 있어도 반찬걱정 없이 뚝딱 한 끼가 해결되었다. 어느 때부터인지 반찬걱정을 입에 달고 산다. 가난하던 시절에는 죽으로, 밥으로, 볶음으로 매일 먹어서 질렸을 법도 한데 구수한 시래기는 언제 먹어도 부담이 없어 좋다. 육식이 부담스럽고 야채를 선호하는 것이 나이 탓도 있는 것 같다. 시래기는 돼지 등뼈와 궁합이 잘 맞는다. 내일은 감자탕을 끓여야지.
첫댓글 수필방에는 회원 숫자만큼 글이 올라와야 할것 같아 졸필을 올립니다.
좋은 글, 미소지으며 잘 감상했습니다. 가을이면 우리집 옥상에도 시래기 줄이 여러가닥 길게 늘어지지요. 홍천집터 밭에서 가꿔 온 것들. 물론 오늘도 큰 찜통 가득 시래기는 냄새를 맡으며 저녁을 먹었습니다. 내일 아침엔 시래기 맛 또 보게 되겠지요.
시래기밥 무척 맛이 있더라구요. 무우를 많이 심어 시리기를 이집 저집 나누어 주는 재미도 솔솔하지요.
장희자씨, 언젠가 나도 장희자씨네 집에 초대되어가서 맛있게 밥 먹었던 생각이 나는데, 그게 그 때도 시래기 나물이 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아마 문창반 사람들이었겠지
관심 가져주신 분들 고맙습니다. 하찮은 시래기도 글감이 된다고 생각되어 올렸습니다.
참 좋은 글입니다. 어머니 솜씨가 내게 전수되었는지 주물럭하면 맛있다고들 난리이다라면 금상첨화 ㅋㅋ
소박하지만, 마음은 훨씬 아름답고 풍성했던 그 시절- 이웃과 얽혀 살던 생활이 그리움으로 떠오릅니다.
저도 시래기 에찬론을 쓰라면 장선생님 만큼이나 할말이 많을만큼 시래기를 좋아해요. 여기오니 구할 수가 없어요. 무는 파는데 무청은 어디다 제다 잘라버렸는지 없네요^^. 묵은지 넣고 시래기 넣고 마늘 한줌 넣고 돼지뼈 넣어 끓인 감자탕 생각이 많이 나네요. 장선생님 글을 읽으니 더더욱. 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