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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4일(대림절 두 번째 주일)
창세기 15:1-11
대림절의 의미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사래는 남편 아브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16:2).”
사래가 자신의 남편에게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않았다.”라고 말했을 때, “허락하지 않았다.”라는 표현보다는 “막으셨다.”라는 표현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사래가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막으셨다.”라고 말했을 때, 이 말에는 사래의 부정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습니다.
사래의 말은 아브람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주신지 이미 10년의 세월이 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고, 이는 자신의 몸에서 후손이 태어날 가능성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사래는 남편에게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당시의 문화에서 일부다처제는 크게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아브람의 경우처럼, 자녀를 낳지 못할 경우에는 몸종을 통해서라도 자녀를 낳는 일이 관습처럼 받아들여 지고 있던 때였습니다(민병구, 생명의 삶 플러스 2020년 9월호, 278).
더구나 자신의 아내가 여종을 통해 자녀를 낳으라고 말할 때, 아브람이 아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그 제안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15:4).’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몸종을 통해서라도 내가 자녀를 낳을 수만 있다면, 나의 몸에서 상속자가 태어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아브람은 이런 식으로 자기 생각과 결정을 합리화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람이 고민하고 있던 사이, 그의 아내 사래가 더 이 일에 주도권을 가지고 행동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자신의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아내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하갈과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10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과연 지난 10년간 아브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아브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75세의 나이에 하란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 주실 땅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순종할 수 있었던 원인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12:2-3).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는데,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을 비롯해서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막상 가나안 땅 세겜에 도착했을 때, 그는 가나안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일에 어려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가나안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적응하며 살아야만 했는데, 그는 이질적인 가나안 문화에 동화되어 사는 데 익숙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세겜을 떠나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치고 살았고,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는 척박한 남방 네게브 사막으로 옮겼습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중심부에 거주하지 못하고 가나안 주변으로 점점 거주지를 옮긴 일은 그만큼 그가 가나안 사회에 정착하는 일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라고 명령하셨는데, 이는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오던 친숙한 사회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아브람이 남방 네게브 사막에 거주할 때,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아브람은 기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그곳에서 아브람은 애굽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의 문제에 부딪혀야만 했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아내 사래가 아리따운 것을 보고 어쩌면 자신이 애굽 사람들에게 해를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자신의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여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자 했습니다.
많은 날이 지난 후,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이 약속해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절).”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세 가지 약속이 들어 있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던 이유는 그가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람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 당시 아브람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을 떠나 낯선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약속은 그에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잘못 선택했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아브람이 느꼈던 두려움은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는 네 방패다.”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물론 방패가 화살에 맞지 않도록 지켜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쟁을 막아주지는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아브람의 방패가 되어 주신다고 해서 아브람에게 전혀 해를 입힐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출처: 폴라 구더, 「기다림의 의미」, 이여진 역, (서울: 도서출판 학영, 2021), 63-64.
그렇더라도, 만약 하나님이 아브람의 방패가 되어 주신다면 그는 거친 세상에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용기 있게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는 너의 큰 상급이다.”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이 세 가지 약속 중에서 오직 세 번째 약속에만 반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15:2).”
아들이 없던 아브람에게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은 법정 상속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브람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에셀은 아들이 없던 아브람이 차선책으로 세워놓은 법정 상속인에 불과했습니다.
아브람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약속과 “나는 네 방패”라는 약속에는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주실 상급이 무엇이고, 그것을 언제 받을 수 있을지에만 마음이 쏠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두 구절,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다.”라는 약속은 귀담아듣지 않은 듯합니다.
아브람은 지금 자신과 동행하시고, 도우시고, 피난처가 되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건너뛰고, 장차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만 마음을 쏟았습니다. 아브람은 현존(現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온전히 붙잡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폴라 구더, 63-64).
이후 아브람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3절).”
저는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다.”라고 불평했던 아브라함의 말과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라고 불평했던 그의 아내 사래의 말이 너무나 닮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점에서는 이 둘이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고 시도했습니다. 사래는 자신의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자기 대신 아들을 낳게 했습니다. 아브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신, 아내의 말을 듣고 하갈과 동침하여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잘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브람은 그토록 소원하던 아들을 얻게 되었고, 그의 아내 사래는 여종 하갈이 낳을 아들을 합법적으로 자신의 양자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후처가 된 하갈은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의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아브람의 가정은 또 다른 문제와 갈등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어떤 책에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독일 나치에 체포되었던 유대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그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 첫날까지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수감자 대부분이 성탄절에는 석방되어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다가와도 희망적인 소식이 들리지 않자 그들은 용기를 잃었다. 절망감은 그들의 저항력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고, 그중 많은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다.”
-출처: 진재혁, 「일상 영성의 힘」(서울: 두란노, 2016); 「생명의 삶」(서울: 두란노, 2022년 12월호), 31에서 재인용.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쓴 이청준 작가는 2008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폐암으로 투병하던 때, 신문에 흥미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인터뷰 기사가 났습니다.
2007년이니 그가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쯤입니다. 당시 그는 면도하고 나서 바르는 로션이 다 떨어졌는데, 그것을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죽기 전에 다 바를 수 있을까 싶어 고민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건을 사면 보통은 ‘내가 이걸 죽기 전에 다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잘 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그때’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그때’를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을 현명하게 사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처: 김병삼, 「성령을 따라 하는 일상의 결정들」(서울: 두란노, 2022); 「생명의 삶」 (서울: 두란노, 2022년 12월호), 51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두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우리가 가진 소망은 현실의 고난을 견뎌낼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러나 소망을 잃은 사람은 현실의 고난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람과 사래는 현존(現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붙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였기에, 자신의 계획과 힘으로 아들을 낳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노력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뿐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고 광야 생활에 접어들었지만,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까?
그들이 광야에서도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예전의 애굽 생활을 그리워하며, 광야 생활의 불편함에 대해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지 않았습니까?
이에 하나님은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에 박힌 수많은 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네 자손이 이같이 많으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재물로 드릴 짐승들을 준비하고, 그 재물의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베푸셨던 약속에 대한 보증을 해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7절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과연 아브람에게 약속하시고, 보증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아브람에게 약속하시고 보증하신 하나님은 그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끌어내신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마치 그로부터 사백 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야 했듯이, 아브람도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출-우르를 해야 했습니다. 그를 우르에서 끌어내신 분은 그를 사랑하시고,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람에게 약속하시고 보증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끌어내시고,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을 기억할 때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는 글은 한 신학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설교학을 가르치고 계신 어느 교수님의 글입니다.
오늘은 유승준 작가가 쓴 『서쪽 하늘 붉은 노을』 (홍성사, 2014)에 나오는 주광조 장로님이 부친 주기철 목사님에 관해 고백한 내용을 읽게 됐다.
“내 아버지 주기철 목사, 그분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두려움에 떨었고, 괴로움에 눈물 흘리던 범인(凡人)이었다. 오늘에 와서 생각해 본다. 아버지의 무엇이 다른 사람과 달랐던 것일까? 무엇이 아버지로 하여금 그 어렵고 힘든 가시밭길을 외롭게 걷게 한 것이었을까?”
주광조 장로님의 저서를 읽다 보면,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이 존경하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에 대해서 좀 실망스런 마음이 생기는 충격을 받게 된다. 다음 내용을 읽어 보자.
“아버지가 네 번째 구속되던 날 아침이었습니다. 조반상을 받고 막 첫 숟가락을 입에 넣었을 때, 형사들이 집으로 쳐들어 와 ‘나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버지는 한참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계시다가 늘 기도하던 동쪽 마루방으로 피해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더 이상 이 육체적 고통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저를 빨리 당신의 나라로 데려가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아버지는 우셨고 기둥을 붙잡고 바들바들 떠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손양원 목사님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존경을 받아오신 순교자이신데, 아무래도 우리와 별 차이 없는 평범한 모습이 못내 실망스럽게 느껴진다. 그랬다. 주기철 목사님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그리 담대한 분이 아니셨다.
그렇기에 숨길 수 없는 의문과 질문 한 가지가 있다. ‘그렇게 용감하고 겁을 모르는 성정이 아니었음에도 어째서 끝까지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순교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이어지는 내용에서 나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기도하는 아버지는 우셨고 기둥을 붙잡고 바들바들 떠셨습니다) 그 아버지께 어머니께서 다가가 감싸 안고는 같이 울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러고는 ‘목사님,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교인들에게 보여 주려 하십니까? 온 교인들이 목사님만 바라보고 있는데, 목사님이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아침 두 분의 애처로운 모습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생생한 아픔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미 몇 차례 모진 고문을 당하셨던 아버지로서는 다시 잡혀가서 그 무서운 육체적 고통을 감내한다는 게 두렵고 겁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육신의 고통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둥을 부둥켜안고 떨며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과 위협 앞에서 아버지는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셨던 범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마친 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조용한 모습으로 일본 경찰의 뒤를 따라 나가셨습니다.”
어린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모습은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투사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전사도 아니었다. 연약한 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하여 아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컸던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라고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분을 순교자로 이끄셨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지만 그 사랑을 부인하지 않도록 가까이 다가가 감싸 안고 같이 울며 기도하시고 용기를 주신 분은 오정모 사모님이셨다는 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위대한 인물 곁에는 위대한 부모나 아내가 존재하는 법이다. 사모님의 큰 신앙이 사랑하는 남편을 위대한 순교자의 길로 이끈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손 목사님이 여수 애양원에서 목회하시던 중 6.25 전쟁이 터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민군들이 여수, 순천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극도로 미워했는데 목사는 더더욱 미워해서 잡아간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애양원에서는 어떻게든 손 목사님을 피신시키려고 애쓰며 아예 배까지 준비해놓았다. 그 사실을 안 손양원 목사님은 집에 돌아와 사모님에게 물었다.
“여보, 애양원에서 우리에게 피난을 가라는 구려. 배까지 준비해놓았다는데 당신은 어찌 생각하오?”
그때 사모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곤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 무슨 말을 하는 겁니꺼. 절대로 도망가선 안 됩니다. 우째서 목자가 양을 버리고 자기만 살자고 도망간단 말입니꺼. 내하고 의논할 필요도 없이 그건 안 됩니더. 도망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이소.”
사모님의 대답은 너무도 단호했다. 손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반응하셨다.
“여보, 걱정마시오. 나도 같은 생각이외다. 당신 의향을 물어보았을 뿐이오. 절대로 도망가지 않을 테니 걱정마시오.”
그후 손양원 목사님은 공산당에게 잡혀서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복음 전하는 일에 매진하시다가 마침내 미평과 수원에서 총살당하심으로 순교하셨다.
소문을 들은 애양원 청년들이 목사님 시신을 사택에 모셔오자 사모님은 남편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 머리를 잡고 기도하기 시작하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교인들은 너무나도 은혜로워서 다 같이 하늘나라에 가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별의 슬픔을 가누지 못한 교인들이 흐느끼며 울자 사모님은 “한 가정에서 삼부자가 순교하는 영광을 주셨는데 왜 우느냐?” 하시며 주위 사람과 애양원 식구들이 울지 못하게 하셨다고 한다.
손 목사님의 큰딸 손동희 권사의 전언에 의하면, 두 오빠 동인과 동신을 죽인 범인 안재선을 아버지 손 목사님보다 더 사랑한 이는 어머니셨다고 한다. 또 지금은 소천한 성광교회의 초대 장로 김봉록의 부인에 의하면, 정양순 사모님이 남편 손 목사님보다 한센인을 더 사랑하셨다고 증언한다.
당시 사랑받던 성도들의 고백에 의하면, 정양순 사모님의 믿음이 순교하신 손 목사님과 두 아들의 믿음보다 더 크셨다고 한다(손동연, 『결국엔 사랑』 (헤럴드Books, 2018)).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2424014797751084&id=100004277616324&mibextid=Nif5oz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절기상으로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과거에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미래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대림절의 진정한 의미는 과거나 미래에만 매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기다리는 이유는 현재를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결국, 우리에게는 현존(現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6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함께 이 믿음을 구합시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일에 힘씁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고, 신뢰하고, 따르는 신앙인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