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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3학년때의 일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안데르센 전기에 푹 빠져있던 나는 안데르센이 죽는 장면에 이르러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다른 수없이 많은 인물들이 책 속에서, 이야기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걸 봐왔으면서 어째서 유독 그날은 그 동화작가의 죽음이 마음에 와닿았을까.
그러나 그날의 울음은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죽음이, 세상에서 한 인간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웠다.
한 동화작가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수많은 작품들과 이름을 남겼다지만, 그의 존재는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도 풍부한 세상을 마음 속에 담고 있던 인간이 죽음으로써 그 세상 또한 사라졌다.
문학이라는 결정을 맺어 세상에 그 조각을 남겨두긴 했지만,
그가 가졌던 그 무궁무진한 세상의 일부분을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본 것일까.
그리고 나는,
이렇게 살아 숨쉬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가 죽어 無가 되고난
그 이후의 세상은 내가 없는 세상인 거다. 나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알 수 없는, 아니 '없기' 때문에 발버둥칠 수조차 없는.
저 깊은 나락으로 한없이 꺼지는 느낌과 허공으로 산산히 분해되는 느낌을 동시에 느끼며(아직도 생생하다.)
정신이 아찔해진 나머지 나는 너무나 슬프게 펑펑 울었던 것 같다.
그건 마치, 멀미가 너무나도 심한데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배멀미를 할 때의 심정과 비슷한 것 같다. 아무리 해도 해결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옆에 있던 -역시 같은 국민학생에 불과했던-언니가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보자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건데? 죽으면 사라지는 거야?? 사라지면 그 다음은??"
라는 말을 하염없이 내뱉으며 나는 계속 울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조숙했던 것 같다. 저런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다니.. 지금 하라면 골치아파서 하기도 싫은 것을-_-;)
언니가 감싸안으며 "현영이는 착하니까 죽고나면 천국에 갈거야 울지마 울지마"라고 도닥여주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천국이란게 정말 있는 걸까?' 따위의 생각이 드는데 말야.
자신의 존재가 일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아이에게
사후세계에 대해 말해봤자 기본 논제부터가 틀리잖아.(....)
아무튼 그렇게 한참을 그칠 줄 모르고 울던 나는
마치 홍역을 한바탕 치른뒤 항체가 생기는 것처럼
그뒤로는 한번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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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나이가 한참 들고, 많은 것들을 보고 들으면서
사후세계라던가, 영혼이라던가, 환생이라던가, 카르마라던가 하는 것들에 대해 어줍잖게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지만
정말 순수한 백지상태에서 형성되는 '죽음'이란 것에 대한 인간의 개념이란 -어렸을 때의 나처럼-'사라짐'을 기본으로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영혼이 만약 정말로 죽은뒤에 남아 사후세계를 떠돌거나 새로 태어난다고 해도
살아있을 때의 '나'와는 전혀 다른 개체이다.
그것을 정말 '나'라고, 연속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현재의 내가 정말 이어지지 않을진대 그것이 과연 '사라지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죽음이 빚어내는 향취에 이끌려 '비극'이라는 장르를 창조했다.
현재의 상황을 '단절'하고 無로 파해시키기 위해 오늘도 수천명의 사람들이 자살이라는 형태의 죽음을 택하고 있다.
-사람들은 왜 영웅의 죽음에 열광하는가?
그것은, 그 영웅의 죽음이 모든것을 불태워 사라진 흔적이기 때문이다.
회광반조. 끝내 죽음(無)을 목전에 둔 존재의 행위는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그것이 영웅적인 죽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미화시키려 하는지도 모른다. 죽고난 뒤에 남는 것이 배설물과 구더기, 한줌의 재뿐이라 해도 우리가 정작 보는 것은, 보고자 하는 것은 죽기 직전의 '인간'이다.)
아무리 감정이입을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끝내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그 찰나의 눈부신 빛을 동경하고 숭배하며, 도취되는 것이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지만, 그것은 곧 한번 죽으면 끝난다는 것이다.
죽기 전까지는 우리가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일기일회(一期一會).
손에 잡히지 않고, 붙잡아 둘 수 없는 것일 수록 우리는 열광하고 집착한다.
감각기억층에서 받아들이는 인간의 감각을 저장할 수 있는 시간은 시각보다는 청각이 더 긴데,
그것은 청각으로 받아들인 '소리'가 시간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간인 시각양상은 오래, 혹은 다시 재생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때'에 들었던 소리와 똑같은 주파수와 리듬을 가진 소리는 절대 재현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몸에 새겨진 법칙처럼, 우리는 본능적으로 잡을 수 없는 것을 더 잡아두고 싶어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삶'과 '죽음'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된 저 먼 옛날부터
삶을 연장하고픈 욕망을 키웠다.
삶이란 잡을 수 없기에 아름답다.
죽음이 없다면 그 가치를 잃은 삶은 끝내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리라.
영원히 살아가기만 한다면,(사실 영원이란 것도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 우리가 그 영원을 판단할 수조차 있나?)
'태어남', 새로운 것, 헌 것, '죽음'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세상이 그대로이고, 나 혼자 혹은 인간이라는 종족만 유일하게 영원한 삶을 얻어
주변의 유한한 존재-'죽음'을 가진-들과 우리를 비교할 수 있다면
아마 영원한 삶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의미를 찾아나설지도 모르지만(그렇다. 인간은 욕심이 많은 동물이니)
그렇지 않다면 영원한 삶이란,
사라짐이 없는 존재함이란,
빛이 없는 그림자처럼, 그림자가 없는 빛처럼
느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그래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無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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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께. 일주일이나 늦어도 뻔뻔스럽게 들이미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전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게 정말 싫습니다. 그 살떨리는 싫음을 극복하고 과제를 제출한 것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여주시면 안되겠습니까.-_ㅠ
첫댓글 [2]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텐데도 자신의 생각을 잘서술하신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1]수고하셨습니다.
[2]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가며 써주셨네요. 주제에 대한 충분한 생각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2]생각하신 것을 솔직하게 잘 표현하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2)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신듯 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2]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도 좋겠군요...오히려 내가 미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