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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다윗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필리스티아 사람을 눌렀다.’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 17,32-33.37.40-51>
그 무렵
32 다윗은 사울에게, “아무도 저자 때문에 상심해서는 안 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제가 나가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과 싸우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사울은 다윗을 말렸다.
“너는 저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마주 나가 싸우지 못한단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전사였지만, 너는 아직도 소년이 아니냐?”
37 다윗이 말을 계속하였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저를 빼내 주신 주님께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의 손에서도 저를 빼내 주실 것입니다.”
그제야 사울은 다윗에게 허락하였다.
“그러면 가거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빈다.”
40 그러고 나서 다윗은 자기의 막대기를 손에 들고, 개울가에서 매끄러운 돌멩이 다섯 개를 골라서 메고 있던 양치기 가방 주머니에 넣은 다음, 손에 무릿매 끈을 들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다가갔다.
41 필리스티아 사람도 방패병을 앞세우고 나서서 다윗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42 그런데 필리스티아 사람은 다윗을 보더니, 그가 볼이 불그레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소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를 업신여겼다.
43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윗에게 “막대기를 들고 나에게 오다니, 내가 개란 말이냐?” 하고는,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다.
44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시 다윗에게 말하였다.
“이리 와라. 내가 너의 몸을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45 그러자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이렇게 맞대꾸하였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46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나야말로 너를 쳐서 머리를 떨어뜨리고,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진영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47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48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윗을 향하여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다윗도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향하여 전열 쪽으로 날쌔게 달려갔다.
49 그러면서 다윗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 하나를 꺼낸 다음, 무릿매질을 하여 필리스티아 사람의 이마를 맞혔다.
돌이 이마에 박히자 그는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50 이렇게 다윗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누르고 그를 죽였다.
다윗은 손에 칼도 들지 않고 그를 죽인 것이다.
51 다윗은 달려가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밟고 선 채, 그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그를 죽이고 목을 베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저희 용사가 죽은 것을 보고 달아났다.
✠ 복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3,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4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5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6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어제에 이어 오늘도 마르코는 안식일 논쟁을 이어갑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있어 율법 중에서도 안식일에 대한 규정이 중요하면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았음을 말해 줍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쉬어야 한다는 규정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신 것을 기념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로 삼아라."는 원래의 뜻과 취지는 어디로 가버리고, "일해서는 안된다."는 말마디에만 집착함으로써 어디까지가 일이고 어디까지는 일이 아닌지 사안마다 해석을 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기본적으로 먹고 자고 다니는 일 등 일을 안 하고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 문제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율법을 해석해 줄 전문가들이 필요했고 그들이 바로 율법교사들인 셈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넘어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과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좋으냐는 질문으로 바꾸면서, 안식일의 의미를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해석하던 관례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해석하기를 촉구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한쪽 손(루카는 굳이 오른쪽 손이라고)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정상적인 사회활동과 정상적인 생업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회당에 나와서도 마치 죄인인 양 뒷쪽 구석진 곳에 움츠려 있어야만 했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당당하게 부끄러워하지 말고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 3,3)고 하십니다.
사실 장애인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지 무시당해야 할 죄인이 아닌데도 그들은 스스로 움츠려들고 또 사람들도 그들을 무시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사고 때문에 그를 돕기는커녕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일까지 문제시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노기를 띠시고’(마르 3,5ㄱ),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보시고 ‘몹시 슬퍼’(마르 3,5ㄴ)하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규정에 얽메어 사랑하고 좋은 일을 행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람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의 그 닫힌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을지 마음이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저 "손을 뻗어라."(마르 3,5ㄷ)고 하십니다.
그는 아마도 늘 자신이 없어 손을 감추고만 살았을 겁니다.
남이 보고 무시할까 봐 스스로 죄인인 양 움츠리고만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치유는 자존감 회복으로부터 시작되어야 옳습니다.
그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실로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마르 3,5ㄹ)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도 오늘 복음의 손이 오그라든 사람처럼, 감추고 싶은 약점이나 부끄러움 때문에 자신있게 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손을 뻗어라." 하시네요.
그렇습니다.
약점이나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귀한 아들딸입니다.
자신있게 손을 뻗어봅시다.
그러면 우리도 치유되어 성한 몸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들 특히 나처럼 자신 없어하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임하시게 됩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김찬선 그레고리오 신부님의 묵상글
<다윗에게 배우는 싸우는 법>
이때까지만 해도 사울은 다윗을 사랑했고 그래서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고 나가는 것을 말립니다.
사울의 말대로 다윗은 아직 소년이었고 그래서 경쟁자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가 다윗을 경쟁 상대로 보고 그래서 미움이 생기는 것은 내일 독서이기에 오늘은 사울 탐구를 잠시 멈추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대해서만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까짓것'의 영성 차원에서만 봤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어리석은 사람은 사울처럼 그것을 너무 큰일로 여기기에 해결치 못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다윗처럼 "까짓것' 할 수 있기에 해결하는데, 다윗이 '까짓것'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하느님의 눈으로 골리앗을 보고 하느님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좀 다른 차원에서 이 얘기를 교훈 삼고자 합니다.
다윗에게서 싸우는 법을 배우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거운 짐을 고생스럽게 지는 사람에게 편하고 가볍게 지는 법을 가르치시면서 당신의 멍에를 메고 지면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다고 하셨지요.
그러면서 당신의 멍에는 마음의 온유와 겸손이라고 하셨고요.
왜 내게 무거운 짐이!, 또는 왜 내게 이 고통이!, 또는 왜 나한테만!,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고 그것도 거칠게 따지기 시작하면 짐은 더 무거워지고 그 이전에 그 짐과 고통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처럼 싸우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겁 없이 그리고 칼 없이 싸우는 겁니다.
오늘 사무엘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다윗은 손에 칼도 들지 않고 그를 죽인 것이다.'
그런데 겁과 칼이 없이 싸우는 것이란 단순히 겁과 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칼이 없어도 문제 없다는 자신이 있는 것이고, 자신이 있는 것은 자기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으면 된다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 겁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없이 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우리에게도 각기 싸워야 할 골리앗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유혹과 욕망일 수도 있고, 불의한 세력일 수도 있고, 두려움이나 병마일 수도 있고, 요즘 우리 모두에게 큰 고통을 주고 있는 코로나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도 다윗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 작은형제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안식일은 대체 무엇을 하라고 있는 날인가?>
오늘 복음도 안식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가셨는데 그곳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손이 마르고 있다는 말은 생명이 빠져나간다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일을 하시나, 하지 않으시나만 관찰합니다.
그들은 참다운 안식이 하느님 안에서 편안함을 누리는 것을 모릅니다.
그저 안식일에 일만 안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일을 하지 않는 것만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일을 하지 않는 목적이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것임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데 어떻게 좋은 일을 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지 않을 수 있냐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어 오신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안식일의 주인으로 섬기려면 그리스도를 믿고 희망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존재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의 생명을 구원하신 분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편안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신학생 선배가 제가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는 것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부드러운’ 분이 아니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배운 예수님은 정의와 심판을 하시는 딱딱 떨어지는 그런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예수님은 잠깐만 읽어보아도 너무 착하시고, 너무 부드러우시고, 너무 사랑이 지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제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 때와 그분이 예수님과 머물 때, 누가 더 편안함을 느끼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더 자비롭고 사랑 가득한 분으로 믿는 사람이 더 편안하고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신학교에서 예수님에 대해 많이 공부해도 그분을 더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공부라면 실제로 점점 예수님과 함께 머묾이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사람을 살리시는 착한 분이시라는 체험을 계속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노숙인 무료 숙박 시설을 운영하는 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시설에는 40여 명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추운 겨울에도 열댓 명밖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따듯한 방도 있고 침대도 있고 따듯한 물이 나오는 깨끗한 화장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노숙인은 추운 곳에서 자면서도 여기에 잘 들어오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저는 그분들이 그곳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시설이 좋아도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이 그만큼 자비롭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하늘나라에 데려다 놓는다고 해도 하느님 자비를 믿지 못하는 이들은 불편해서 차라리 지옥으로 가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죄를 저지른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두려운 분으로 여겨 숨었습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그분의 자비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를 위해 안식일이 필요합니다.
하루 동안 그분과 함께 지내며 그분이 너무 착하시고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죄는 보지 않으시고 다만 내가 행복하기만을 바라시는 분이라는 것을 체험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안식에 들어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로스트 인 스페이스 시즌 1’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 가족이 지구에서 더는 살 수 없게 되자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기 위해 커다란 우주선, 레솔루트를 탑니다.
그러나 어떤 일로 우주선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탈출하여 이상한 별에 불시착합니다.
이때 로빈슨 가족 중 막내 윌이라는 어린아이가 한 로봇을 구해주어 그 로봇과 함께 왔는데 때마침 자신의 일가족이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로봇은 윌에게 충성을 다하는 터라 가족을 도와줍니다.
그래서 윌의 가족은 로봇의 능력과 함께 아무리 이상한 행성이라 하지만 안전함을 느낍니다.
문제는 그 로봇이 자신들의 우주선을 파괴한 주범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로봇이 윌을 따르고는 있으나 그 능력이 인간이 감당할 수는 없기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경계를 합니다.
이때 로봇의 힘으로 그들이 다시 우주선으로 돌아가게 되면 스미스라는 박사는 감옥에 갇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로봇에 대한 미움을 갖게 만들어 그 로봇을 총으로 쏘고 결국엔 자신들 밖으로 몰아내게 만듭니다.
하지만 로봇이 없으니 외계 행성에서 그들을 도와줄 것이 하나도 없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로봇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안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같은 한 로봇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어떤 사람들은 편안해합니다.
그 이유는 로봇이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그분은 심판하시기도 하시고 구원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심판하는 분이심을 잊어버리십시오.
심판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분은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로빈슨 가족처럼 그분과 함께 지내며 그분이 좋으신 분임을 믿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로마로 유학을 갔을 때 누구나 그랬겠지만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면 다 된다’는 생각을 가지려 했습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이니 기도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시지 않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도를 통해 몹시 어렵지 않게 유학 생활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믿고 함께 하다 보면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러면 그분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더 커집니다.
그럴수록 매일이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로빈슨 가족이 로봇과 함께 미지의 세상을 탐험하는 것, 이것이 안식일의 목적입니다.
그렇게 그분에 대한 신뢰를 쌓아갈 수 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분에 대한 사랑을 증가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지옥에 보내 달라고 스스로 떠나게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주님을 더 사랑하십시오.
그분이 하느님이시기에 그 믿음만으로 모든 날이 안식이 될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라고 있는 날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한 번 비뚤어지면>
오래전 일입니다.
얼음이 깨지면서 어린이 3명이 빠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이를 목격한 시민이 물에 뛰어들어 가까스로 한 명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몸을 던져 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두 명은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지만, 목숨을 걸고 그들을 구하고자 노력한 시민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출애 31,14).
유다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법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유해 준 병자는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 버릴까 모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아랑곳하고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는 안식일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커갔습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칭찬은커녕 흉보고 비난하며 불평합니다.
이렇게 보면 신체적인 장애를 지닌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더 문제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지를 알면서도 마음 한번 비뚤어지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는 중환자입니다.
그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도 더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혹 나도 잘못된 고정관념,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고집, 자존심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손을 뻗어라” 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신 능력의 말씀이 오그라든 우리 마음을 펴주시길 기도합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날인 동시에 사랑하는 날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마르 2,28).
오늘 복음도 여전히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마르 3,4)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
(마르 3,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인가?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어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고집 때문에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혹 나도 지금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어 형제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데 나는 그것을 언제부터, 대체 왜 손에 쥐게 되었을까?
그런데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손을 꼭 쥐게 된 것일까?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쥐었을까?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고 한 것이지만,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
(마르 3,5)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쥔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빈손에 못을 박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단지 움켜쥔 것을 내려놓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건네주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께서는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셨습니다.
죽음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이 되셨습니다.
하여, 당신은 참으로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저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손을 뻗어 상처를 입고 구원의 피를 흘려야 할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손에 구원의 못을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사랑으로 상처 입을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건네줄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손이 당신 구원을 전해주는 손, 당신 사랑을 건네주는 손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손을 뻗어라.”
(마르 3,5)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저희가 움켜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마르 3,1-2)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장애자는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바리사이들이 일부러 데리고 온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장애자를 고쳐 주실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그 장애자를 고쳐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런 장애자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고쳐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도 의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권능과 예수님의 자비를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지는 않고, 예수님의 권한도 믿지 않고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심하게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잘 나타냅니다.
그들은 ‘주 하느님’께도 그런 태도를 취할까?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당신이 만든 법이니 당신부터 잘 지키셔야 합니다.” 이런 말은 인간 세상의 입법자들을 향해서는 옳은 말이 되지만 온 세상의 주님이신 분을 향해서는 옳지 않은 말이 됩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주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만든 계명들에도 종속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니 예수님도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마르 3,3-4)
지금 ‘안식일’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라고 말씀하셨지만,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은 안식일이 아닌 날에도, 즉 ‘모든 날’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남을 해치는 일’과 ‘죽이는 일’을 해도 되는 날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날’에, 즉 요일과 상관없이 날마다 사랑과 선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일에는 특히 더 많이 실천해야 합니다.
(만일에 주일에만 실천하고 평일에는 안 한다면, 그것도 율법주의입니다.)
이 말씀은 종교 전체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종교는 날마다 선행과 사랑 실천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공동체입니다.
만일에 선행과 사랑 실천이 없다면, 또는 공동체 안에서만 하고 밖에서는 안 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고 그냥 이기적인 집단입니다.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라는 말은, 바리사이들의 심각한 고집을 나타냅니다.
예수님 말씀에 동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논리적으로 반박하지도 못하고...
아마도 그들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을 것입니다.
4절의 예수님 말씀에는,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합당하냐?”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냐?”인데, 하느님의 뜻에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간도, 중립도 없습니다.
선이 아니면 악입니다.
예수님께서 노여워하신 것은 바리사이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악’에 대해서입니다.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악’에 대해서는 노여워하셨지만, 바리사이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라는 말은 고집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바리사이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안타까움은 ‘사랑’입니다.
‘슬퍼하시면서’라는 말 때문에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무능력을, 즉 당신에게 바리사이들을 변화시킬 힘이 없음을 슬퍼하신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아무리 깨우쳐 주어도 듣지 않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회개와 마음의 변화는 억지로 시킬 수 없습니다.
억지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구원도 억지로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 쪽에서 스스로 원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만으로 장애자를 고쳐 주십니다.
‘몸의 장애’는 당사자의 희망이나 노력과 상관없이 그냥 고쳐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병과 장애는 본인이 깨닫지 못하고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누가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 장애자를 고쳐 주셨고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는 구체적인 행동은 하지 않으셨다고 해석하는 이가 있는데, 바리사이들을 비롯해서 당시의 유대인들은 어떤 동작으로 고치든지 말씀만으로 고치든지 간에 안식일에 병자와 장애자를 고쳐 주는 것은 모두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논리적으로는 예수님 말씀에 반박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키우는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려고 애를 쓰시는데, 바리사이들은 그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잘못된 신념에 빠지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일이고, 모든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신념’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요한 16,2ㄴ)
이 말씀은 외부의 박해보다 잘못된 신념 때문에 생기는 내부의 박해가 더 끔찍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라는 말은 죽이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죽이는 방법을 의논했다는 뜻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 전쟁 - 주님의 전사(戰士)로 삽시다>
2022년 2월호 <생활성서>를 펼치는 순간 첫 페이지 사진과 함께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늘나라로 향하는 길 전체가 하늘나라다.”
바로 하느님을 찾는 여정 중의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기 시작한 하늘나라입니다.
하루하루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는 제 좌우명입니다.
하루하루 중 아마 가장 기다려지는 행복한 시간은 하루의 영적 전쟁이 끝난 후 잠자리에 들 때이고, 또 하나는 새벽 잠 깨어 일어나 외딴곳에서 그날의 강론을 쓰며 주님과 함께 하루의 영적 전쟁을 준비하는 시간일 것입니다.
수도생활이기에 가능한 하루 일과표의 시스템입니다.
수도생활은 전통적으로 영적 전쟁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現役)의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수도생활 만 40년 동안 강론 중 참 많이 사용했던 제목이 바로 오늘 강론 제목인 “영적 전쟁-주님의 전사(戰士)로 삽시다-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시 중 한연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평생 주님의 전사로, 평생 주님의 학인으로, 평생 주님의 형제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의 자랑스런, 행복한 신원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평생 주님의 전사이듯 죽어야 졸업인 평생 주님의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그날까지 치열한 영적 전쟁의 삶이요, 치열한 영적 공부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네 충고가 적절하다 싶습니다.
1. 기도하라
2. 공부하라
3. 일하라
4. 운동하라
요즘 제 산책 중 자주 즐겨 부르는 늙은 군인의 노래가 있습니다.
모 교수는 고인이 된 신영복 교수, 전유성 개그맨, 김민기 가수를 3대 천재로 꼽았습니다.
바로 김민기 씨가 늙은 군인의 일화를 듣고 작곡한 곡입니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피고 눈 내리길 어언 3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1절은 이대로 부르고, 2절은 ‘이 강산’을 ‘수도원’으로, ‘군인’을 ‘수도자’로, ‘30년’은 ‘40년’으로, ‘푸른옷’은 ‘검은옷’으로 바꿔 부르면 참 실감이 납니다.
영적 전쟁에 영적 전사, 주님의 전사인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더불어의 영적 도반(道伴)이자 더불어의 영적 학우(學友)이자 더불어의 영적 전사, 주님의 전사인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전사를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 기도의 전사, 믿음의 전사로 바꿔 말할 수 있겠고, 결국 주님의 자녀다운 전사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영적 전쟁에 임하는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의 최고의 무기는 기도와 말씀입니다.
일어나자마자 기도와 말씀의 영적 훈련의(시편 성무일도와 미사의 찬미와 감사의) 공동 전례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인류가 시작되면서 동시에 시작된 전쟁 같습니다.
전쟁 없는 평화의 세상을 꿈꾸지만 지금도 계속되는 온갖 형태의 생존경쟁 치열한 전쟁의 현실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시작된 전쟁은 아마 죽어야 끝날 것입니다.
그 실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러했고, 제1독서 사무엘 상권의 다윗이 그러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러합니다.
예수님과 다윗, 두 분 다 하느님의 전사의 빛나는 모델입니다.
여기에 한 분 더 추가한다면 바오로 사도일 것입니다.
문제는 이 치열한 영적 전쟁의 현실에서 참으로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서 항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답은 하나, 하느님으로 완전 무장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신망애의 향주삼덕으로, 기도와 말씀으로, 분별력의 지혜와 용기로, 온유와 겸손으로 완전 무장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영적 무장(武裝)입니다.
예수님의 바리사이들에 대한 격퇴가 얼마나 통쾌한지요!
예수님께 분별의 잣대는 상대적인 안식일법이 아닌 절대적인 사랑의 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물음에는 이미 답이 전제되어 있기에 바리사이들은 전전긍긍 대답을 못합니다.
참으로 무지의 병, 완고함으로 굳어진 바리사이들의 마음입니다.
마침내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명령하시니 그대로 치유의 구원입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손을 뻗어라!”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용기있는 주님의 전사, 예수님의 모습인지요!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은 치유되어 성하게 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전사인 예수님은 우리의 오그라든 심신을 활짝 펼쳐 주시어, 오늘도 건강한 심신의 주님의 전사로서 영전 전쟁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바리사이들은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하니 계속되는 영적 전쟁임을 감지합니다.
그러나 궁극의 승리는 파스카의 예수님께 있습니다.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실 때 궁극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요한복음 16장 33절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미 예수님과 함께 이겨 놓고 싸우는 영적 전쟁의 수행입니다.
이미 널리 알려져 회자되고 있는 오늘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 일화는 늘 들어도 흥미진진하고 주님의 전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하느님의 성소가 옳았음을 입증하는 참 통쾌한 다윗의 승리의 장면입니다.
그 누구도 양치기 소년 다윗이, 백전노장의 용사 골리앗을 이기리라곤 꿈에도 상상치 못했을 것이나 결국은 하느님으로 무장한 다윗의 승리로 귀결됩니다.
흡사 다음 골리앗을 향한 다윗의 말은 실제 그의 육성을 듣는 느낌입니다.
“너는 칼과 표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모든 나라의 지도자들이나 각계각층의 우두머리들이 이 말씀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로서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을 다시 점검케 하는 말씀이자, 용기백배(勇氣百倍) 영적 사기(士氣)를 충전케하고 영적 전의를 새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완전 무장 시켜 주시어 오늘도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요즘 트라우마(상처)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상처가 다 아물었지만 우리의 마음에 남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 몸에도 몇 곳에 상처의 기억이 있습니다.
어린 날 연탄재 던지기 놀이를 하다가 눈가에 연탄재를 맞고 병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5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병을 실수로 눌러서 다리에 화상을 입은 적도 있습니다.
4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그날의 뜨거움이 생각납니다.
사제가 된 후에 유행성 출혈열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서품 받은 지 보름 만에 있었던 일입니다.
30년이 넘었지만 얼굴이 부었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육체적인 상처도 있지만 정신적인 상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뜻밖의 재난, 갑자기 찾아온 질병, 사업의 실패는 정신적인 상처를 깊게 남기기 마련입니다.
유명한 행동 연구가인 안탈 페슈테틱스(Antal Festetics)는 ‘인류의 세 가지 트라우마’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바꾸게 하였습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별이며, 태양은 우주의 변방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합니다.
물리적인 우주에서 지구는 우주의 변방이고, 작은 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머무는 곳이기에 충분이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지구는 우주의 중심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인격은 수치와 수량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이스라엘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예언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은 온 우주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되찾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과 원숭이가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의 삶은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과 같다고, 천년도 주님의 눈에는 마치 지나간 어제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쉴 때까지는 실로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의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자칫 우리의 의식과 자유의지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나온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나온 이들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주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우리의 의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신앙의 신비는 우리의 의식을 초월하여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줍니다.
교회의 영성가들은 바로 그 신앙의 신비를 체험하였습니다.
골리앗은 어떻게 보면 코페르니쿠스, 다윈, 프로이트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골리앗 앞에서 무서워 떨었습니다.
골리앗은 막강한 힘으로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은 아직 어렸고, 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느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코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은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어떻게 보면 코페르니쿠스, 다윈, 프로이트와 같습니다.
율법과 계명으로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율법과 계명을 독차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의 권위와 독선을 나무라십니다.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빛이 드러나면 어둠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렸을 때 이웃과 서로 나누는 음식이 참 많았습니다.
어떤 음식이든 조금 많다 싶으면 어머니께서 싸주셔서 이웃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 나눔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 그 나눔이 사라졌을까요?
어느 책에서 보니, 냉장고가 커지면서 나눔이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냉장고를 통해 유통기한이 길어졌습니다.
냉장고가 없을 때는 버리지 않으려면 당연히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었습니다.
냉장고가 없으니 보관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고, 음식을 상해서 버리는 것보다는 이웃과 나누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냉장고가 생기면서 이웃과 나눌 이유가 줄어들었습니다.
냉동실에 넣어두면 아주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에 냉장고가 처음 생겼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정말 행복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너무 좋아했는데, 아이스크림과 같은 시원한 얼음을 1년 내내 먹을 수 있었으니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나눔을 방해하는 물건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내게 편안함을 주지만 따뜻함을 나눌 수 없게 했습니다.
나만 편한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함께 나누는 것이 좋을까요?
냉장고를 치워야 할까요?
그런데 이제 냉장고 없이는 못 살 것 같습니다.
나의 편안함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논쟁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선인지,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율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하면서 그 어느 것보다도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굳어 버리다 보니 율법이 곧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가장 편안한 냉장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자렛인들의 복음서’라는 외경에 나와 있는데, 그는 오른손으로 밥벌이하는 장인이었고, 손이 오그라들어서 가족을 부양하기 힘든 상황이 된 것입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병자 앞에서 치유의 합법성 문제를 따지고 있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완고한 모습에 화가 나셨습니다.
치유될 수 있음에도 안식일 법에 따라서 모르는 체하는 그들의 위선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눔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냉장고처럼, 사랑이라는 근본정신을 가지고 있는 율법이 오히려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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