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시간은 전지전능하다. '나'와 주변 모든 인간들은 시간 앞에서는 그저 덧없이 흘러가는 존재일 뿐이다. 소설은 주인공이 동경했던 사람들이 늙고 초라해진 모습으로 게르망트家 파티에 참석한 모습을 길게 묘사한다. 소설에서 인생은 언제나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일 뿐이다.
그러나 생투와 알베르트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보면서 ‘나’는 유년시절에 갈망했던 두 길이 하나로 합치되고 있음을 알았다. (스완가와 게르망트 가의 집으로 가는 산책로가 다르다. 그러나 계속하여 가다보면 숲이 끝나는 곳에서 두 산책로가 만나고 있다.) 순간 내가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깨닫는다. 기억이다. 기억을 더듬어서 글을 쓰게 된다.
시간에 풍화되어 버린 인생을 관조적으로 그리다 보니 소설은 철저하게 역동적인 사건이 아닌 내적 풍경을 담고 있다. 바로 이 점이 프루스트 소설의 묘한 매력이다. 물론 다소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집중해 읽으면 한 구절 한 구절 잠언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교향곡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현대소설의 원전이라고 할 만큼 모든 소설적 실험이 숨어 있다. 무의식에 대한 탐구, 액자 형식의 시도, 회상에 기댄 의식 흐름 기법, 시간성과 공간성을 무시한 소설적 구조 등은 요즘 소설가들도 쉽게 운용하기 힘든 기법들이다.
감각-기억으로 환기되는 심상과 잠재의식의 영역까지 파내려가서 발견되는 심상을 묘사한 이 작품은 종래의 소설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서 소설의 개념을 수정한 작품이다. 작품 속에는 프랑스 전통 철학이 뿌리내려 있다. 문체는 극히 난해하다.
이 소설에는 벨 에포크라고 불렀던 한 시대를 담아냈다. 따라서 프랑스의 한 시대의 연대기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20세기 문학에 새로운 길을 연 최고의 소설로 평가한다.
주인공의 역할과 의미
발자크나 스탕달의 소설에 익숙해진 독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대하고 분명 놀라움이나 생경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는 <환멸>의 보드랑이나 <파므로의 수도원>의 파브리스처럼 격정적인 행동에 의해 스토리를 전재해 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게르망트 공작 부인이나 샤르뤼스, 블로크 등과 같이 각별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도 등장하지만, 그들 역시 행동에 의해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인상파의 그림처럼 다양한 사건과 공간 속에서 조금씩 묘사되며 점차 복잡한 전체상을 나타내 간다.
주인공인 '나'도 작품 속에서 살아서 행동하기보다는 관찰하고 탐색한다는 취지 아래, 마음에 비치는 자연계의 관능적 아름다움이나 사교계의 다양하고 추악한 인간 군상들을 정교한 렌즈처럼 묘사해 내거나, 자신의 내면에 비추어진 감정이나 감각의 기복을 찬찬히 음미해 가는 것을 주요한 임무로 삼는 일종의 반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소설의 시선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라는 관측기계를 통해 체험되고, 언어로 표현해 내기 힘든 감각이나 심리를 대단히 긴 호흡의 문체로 이끌어내고 있다. 이 작품은 제임스 조이스나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과 더불어 현대를 문학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20세기 최고, 최대의 소설로 꼽힌다. (글출처 : 다음사이트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읽혀지지 않았던 근복적인 이유는 대중매체에 의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과 너무 많은 분량과 생소한 전개법이 부담이 주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가장 유명하지만 가장 읽혀지지 않은 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