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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인 5월 21일경 이르쿠츠크에서 합동민족군대원 중 2백명이 추가로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5월 23일경 자유대대측에 정식 고려군정의회가 치타에 당착하였다는 전보가 도착하였다. 전보의 내용은 군대의 전후형편을 전보로 보고하라 하였음으로 자유대대 측에서는 군대의 사정을 답전하였다고 한다.
1921년 5월 27일경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라핀의 명령으로 까란다리시비리가 극동공화국 내의 한인 무장세력의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출처 : 러시아측 문서 РГВА,ф.221,оп.1,д.376,лл.90-96об.)
5월 28일경에 합동민족군대의 나머지 병력이 자유시에 도착하니 3회 걸쳐 총 6백여명 전원이 도착되었다.
1921년 6월 2일경 홍범도 부대의 자유시 이동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가 갑자기 이르쿠츠파를 지지하자)
양파의 군권 다툼이 이르쿠츠크파의 일원인 최고려, 김하석, 오하묵 등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하기로는 6월 2일경에 홍범도 군대 440여명이 야간에 자유시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이르쿠츠크파의 자화자찬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주장하기를 사할린군대 군정위원장 박일리야가 자기의 신복 군인으로 기관포대를 설치하고 만약 군인들이 고려군정의회에 추향하는 영향이 있으면 기관포로 멸퇴한다는 것으로 견위적 협박이 엄중함이 이와 같아 홍범도 군인들이 말하기를 최진동 군대와 안무 군대도 자유시로 래할 방책을 연구중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유대대와 이르쿠츠크파에서 너무 허위로 쓴 것이다. 안무 장군이 누군지도 모르는 자들이 하는 헛소리다.
김홍일의 경험한 일제의 만행
김홍일(1898~1980)이 자유시 사건 무렵 러시아에 갔다온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며, 1945년 8월 15일 해방이후 남한에 거주하였으나, 박정희 독재정권 시기 야당운동에 관여하였다.
일부 광복군 출신이 말하기를
김홍일이 했다는 러시아령에서의 독립운동은 과장된 점이 있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김홍일이 비교적 사실 그대로 진술한 점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김홍일저, 『대륙의 분노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년 출판을 살펴보면)
김홍일은 1921년 3월 1일 이후 중국 상해에서 출발하여 3월 29일경 길림성 안도현에 도착하였다. 노백린, 이동휘 등의 추천에 의하여 국제군 창설에 참여하고자 4월 5일경 안도현을 떠나 러시아령 이만으로 향했다.
4월 8일경 천보산 은광산 부근에서 일본군 경비병 50여명과 최초의 전투를 하였다.
김홍일 자신의 책에서 러시아령에서 여러 차례 전투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김홍일이 자유시 사건 전에는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전투를 끝내자 곧 행군 준비를 갖추어 새벽녘에 70리 가량 떨어져 있는 명월구에 도착했다. 명월구는 의군부가 한 때 자리잡고 있던 곳으로, 일군 토벌대의 침해가 그 어느 지방보다도 심한 곳이었다고 한다.
김홍일 일행은 그 마을 근처 산골짜기에 숨어 노숙하면서 동네에서 아낙네들이 지어 주는 밥을 먹었다. 당시 우리 동포들은 누구나가 다 우리 독립군이라면서 서로 존경하고 도와주려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래의 내용은 김홍일저, 『대륙의 분노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년 출판의 일부분이다. |
(...... 중략.....)
그리고 마침 그 명월구에는 마진(馬晋)씨의 본가가 있어 나는 그 집에 가보았다. 마진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시베리아로 떠나고, 둘째 아들은 길미에서 중학교에 다니느라 둘 다 집에 없었다.
그래서 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곤 그의 노부인과 두 며느리, 그리고 큰 며느리가 낳은 어린 두 딸, 이렇게 해서 모두 다섯 명의 여자만이 쓸쓸히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마씨 집 뿐만 아니라 당시 그 동네엔 장정이라곤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일본군 토벌대가 수시로 들어와 청년들은 그저 잡는대로 몰살시키고 또한 여자는 닥치는대로 욕을 보였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민족이 당하고 있는 곤욕을 바로 눈앞에 보고 침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었다.
그 때 나를 더 한층 분격케 한 것은 일군을 따라다니는 한인 밀정(密偵)들의 그 참을 수 없는 행패였다.
그들은 일군의 앞잡이로 가가호호를 뒤지며 물건을 약탈하고 폭행을 가하는 등 온갖 행패를 자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슴 아픈 꼴을 듣고 보니 도무지 치가 떨려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분하고 원통하고 도무지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없는 착잡한 심경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유수하(柳樹河)라는 고장에서 일어난 비극이다.
유수하란 마을은 명월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그 마을은 다행히도 청년들이 일찍 피신했기 때문에 사실은 다른 고장에 비하여 피해가 적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동네에 침입한 일군 토벌대 중대장은 마을에 발을 들여 놓기가 무섭게 우선 그곳에 사는 웬만한 여자들은 그저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 다음엔 또 그녀들의 시아버지 친아버지 할 것 없이 모두 잡아다가 같은 방에 가두어 놓고 그들 일인 장교들은 그 자리에 술상을 벌여 놓더란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아낙네들을 사뭇 천한 기생 다루듯 하면서 강제로 술을 따르게 하는 등 그 행패는 실로 목불인견이었다는 것이다.
술이 거나해지자 일본 장교들은 제각기 노래를 부르며 떠들다간 결국엔 그들의 인원수대로 여자를 남겨 놓고 나머지 여인들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노인들을 문 밖에 세워둔 채 모두들 환히 보는 가운데서 강제로 여인들의 옷을 벗기며 강간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무슨 짐승만도 못한 저주스런 만행이란 말인가.
그 중에서 제일 젊고 아름다운 여인은 그 때 마침 결혼초로 임신중이었는데도 그들은 이를 개의치 않고 강간을 자행하더라니 말이다.
그렇듯 천인공노할 만행을 그 친족 어른들이 보는 눈앞에서 저질러 놓고 그들은 유유히 철수하더란 것이다.
이러한 참상을 겪은 뒤 그 어느 나라 여인들보다도 순결을 중히 여기는 우리네 여인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그들은 일병에게 짓밟힌 그 욕된 한을 풀기 위하여 더러는 목매어 죽고, 또 더러는 우물에 빠져 죽는 등 실로 그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특히 그 임신한 여인은 분노와 원통함을 못이겨 동네 우물로 뛰어갔는데 이를 본 딴 여인들도 그 뒤를 우르르 따랐다. 죽음으로 일인한테 당한 그 치욕을 씻자는 결의 때문이었다.
그 때 당황한 동네 노인들은 전부 나서서 자기 딸, 며느리 앞에 나아가 죽지 말기를 애원하며 절을 하더란 것이다. 노인들은,
“너희들은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만 부득이한 상황하에 놓여 있었은즉 너희들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을뿐더러 부득이한 사정하에서 일시적으로 몸을 더립히긴 했지만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우리 마을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지켰으니 생각하면 우리 마을의 은인이나 다름없다.”
면서 죽지 말기를 애걸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수하의 여인들은 어른들의 간청에 의하여 죽음을 단념하고 다시 삶의 터전을 이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피해가 적었다는 고장의 실정이 이렇듯이 처참했은즉 딴 곳의 형편이야 뭐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일제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
우리는 명월구(明月溝)의 동포들에게 되도록 손해를 입히지 않기 위하여 곧 그곳을 떠났다. 일군 토벌대의 만행과 그 슬픔의 흔적을 뼈저리게 본 우리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은 강행군 속에서도 원한에 복받쳐 피로한 줄도 몰랐다.
드디어 우리는 북간도와 중동선(中東線) 사이에 있는 노야령(老爺嶺)을 넘어 령안현(寜安縣)에 도착했다. (...중략...)
오늘날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주 '니콜라옙스크 나 아무레' 시에 설치된 니항사건 추모비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부대 본부 건물터에 설치되어 있다.
김홍일은 3⦁1운동, 니항사건, 봉오동전투, 청산리 전투, 간도 참변 시기의 만주·간도·연해주 일대의 상황을 위와 같이 이야기하였다. |
김홍일이 소속되어 있던 부대는 자유시 사건이 터지기 직전인 1921년 5월 10일경 35일만에 러시아령 이만에 도착하였다. 김홍일이 지휘했던 부대는 약 312명이었다고 한다.
김홍일이 기차를 타고 하바로프스크에 이르자 상해파 공산당의 박영씨가 나와 자유시행을 만류하였다.
조만간 자유시에서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1921년 6월 2일경 김홍일의 자유시 도착
6월 2일 김홍일은 홀로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김홍일이 류동열(1879~1950)을 찾아가자 류동렬은 실상을 말해주었다고 한다.
“소련 정부는 협약된 대로 사실은 하루속히 국제군을 편성해야 할 터인데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각 군대 간에는 전혀 그 내부 통솔이 되어 있질 않아 큰 골치란 말이오. 어떻게든 이들을 하루속히 개편하여 통솔 기구를 확립해야만 훈련도 제대로 할 수 있을 터인데 의견들이 엇갈리기만 하니 고민이구료” (김홍일 저, 대륙의 분노 105쪽) 류동열은 김홍일에게 류동열과, 최고려, 까란다리시비리(1876~1922), 이 3명이 군정위원이라고 말하였다. 최고려는 취임하질 않아 자유대대 사령인 오하묵이란 사람이 대신 집무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 이 무렵 최고려는 동양비서부, 까란다리시비리와 교섭하고 있었다) 그 때 류동열은 러시아어를 모르고 상세한 경위를 모르는데다 또한 부대 통솔이 워낙 어려워서 도대체 앞으로의 사태 전망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사정이 호전되는 대로 곧 연락을 취해 줄 터이니까 그때까지 나보고 이만에 가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다. |
김홍일은 자유시의 어수선한 사정을 보고 이만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시베리아 사정에 어두웠던 우리 독립군들은 그들 사할린 부대를 통하여 현지 실정을 얻어 들을 수 있었으며 동시에 이르쿠츠크파의 모략과 흉계를 사전에 눈치채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할린 부대를 이르쿠츠크파에 속하는 자유대대가 달가와 할 리가 없었다. 진작부터 사할린 부대를 눈의 가시처럼 여겨온 자유대대란 실상 이르쿠츠크 파의 오하묵이가 세묘노프 백군 토벌 작전 때에 한인들을 긁어모아 조직한 부대였다.
그런데 그 부대는 그 때에 세운 약간의 전공을 내세워 평시에도 여간 콧대가 높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다 그들 자유대대는 정규 훈련을 받은 장병들을 꽤 보유했다고 해서 다른 독립군 부대를 흡사 눈에 낀 눈꼽 정도로 천시하면서 소련 적위군과 제휴하고 있는 힘을 믿고 공연히 거드림을 피우는 꼴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이 부대내에는 당시 몽고 변방에서 가담한 퉁구스족 청년들이 상당수 끼어 있었는데 그들의 지휘자는 물론 한인 2세였던 것이다. 그러나 말뿐이 한국인이지, 실상 그들의 의식 구조는 러시아인이나 별로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을 별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르쿠츠크파의 현지 간부들도 사정은 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 수
그런데 당시 자유시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그 곳에 모여든 독립군의 총수는 약 7천여명에 달했는데 그것을 부대별로 보면 사할린부대 : 1,000여명 자유대대 : 1,000여명 이만 등지에서 자원하여 온 한인 2세 독립군 : 400~500여명 만주 등지에서 온 독립군 : 4,000여명 에 달했던 것이다. |
이렇듯 병력의 구성 요인부터가 각기 다른 데다가 그들이 정치적인 배경 또한 달라서 거기에서 오는 마찰 때문에 매일 혼란만 거듭되어 도대체 전체적인 통솔이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그때 이러한 문제를 놓고 3인 군정위원들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첫째는 각 부대들을 해체하여 단일부대로 혼합 편성하고 그 간부진은 군사 훈련의 경력이 있는 사람만이 맡게 함으로써 장차 정규군으로 육성한다는 것과,
둘째 훈련장소는 이르쿠츠크나 옴스크 같은 비교적 안전한 소비에트 영내에서 실시할 것이며,
셋째는 그러한 부대 편성을 위해 부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기성 지휘관들은 모두 현지당부나 교민회학교 등에서 일하게 하겠다는 것 등이다.
당시 이상과 같은 결정 사항을 놓고 볼 때 그 결정에 따르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유대대의 간부들만이 새로 조직되는 부대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있어서 자연 사할린 부대는 물론 우리 독립군 부대의 지휘관들도 부당하게 도태당할 운명에 있었다.
그러니 이러한 사태를 앞에 놓고 성격이 괄괄한 그 사할린 부대가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의 독립군들에게 더 이상 우리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앞으로 그 어떠한 창피를 당하게 될지 모르니 차제에 아주 이곳을 빠져나가 연해주나 만주로 부대를 이동시키자고 선동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사할린 부대의 집요한 선동작전으로 말미암아 그 때 각 부대내에는 완연히 동요하는 기색이 번지기 시작했다.
사할린 부대와 독립군 부대들은 어떻게 하든 그 곳을 빠져나갈 궁리만 했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채게 되자 소련 적군 측에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즉각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그들의 동태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정부에서는 독립군의 연해주 진출을 적극 방지하지 않으면 안될 그런 딱한 입장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소위 니항사건 이후 즉 1920년 가을부터 열렸다가 1921년 10월경에 결렬된 대련(大連)회의에서 일본군이 그들의 철병 조건의 하나로 시베리아 한인 독립군의 해산을 강경히 요구한 바가 있었고 또한 소련정부 주재 중국 북경 대표인 카라한과 일본 공사 방택유길(芳澤有吉)간에 어업 협정을 맺어 앞으로 다시는 니항사건과 같은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여 어로 활동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데 합의를 본 탓이다.
그 협정의 체결석상에서 일본 대표 방택이란 자는 니항사건의 도발자는 분명히 한인 독립군들이라고 생떼를 쓰면서 시베리아 영내의 한인 무장부대들을 즉각 해산시키라고 소련측에 강경히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소련 대표는 지금 자국의 영내엔 한국 군대가 전혀 없으며 만약 앞으로 연해주에 한인 독립군이 진출하는 경우엔 소련정부는 절대로 좌시하지 않겠다는 언질을 주어 자국 연해주에서의 일군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다.
그러니까 소련측이 내세운 그 국제군이라는 명칭도 실은 한인 부대를 커버하자는 소련 당국의 정치적인 속셈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렇듯 복잡한 정세하에서 만약 한인 부대가 연해주나 혹은 만주로 진출하여 그 곳에서 일군과 충돌하게 된다면 소련의 입장에서 볼 땐 이야말로 여간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볼셰비키군 사령부는 그 때 군정위원회를 통하여 전독립군 부대들을 무장해제시켜 이르쿠츠크로 강제 이송하기로 결정을 본 것이다.
(※일부 용어를 오늘날 사용하는 단어로 변경하였습니다.)
(김홍일의 주장 하략)
첫댓글 한인 밀정들의 행패와 일제의 민간인 강간과 학살로 인한 문제점들이 많았군요
친일파도 시베리아나 만주지역에서는 일본 황군과 합동하여 공격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일본군 못지않은 자들이었지요.
일본군이 강간, 학살 잘 하기로는 세계에서 알아주는 군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