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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 18,6-9; 19,1-7>
그 무렵
6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이고 군대와 함께 돌아오자,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7 여인들은 흥겹게 노래를 주고받았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8 사울은 이 말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을 돌리니, 이제 왕권 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
9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
19,1 사울이 아들 요나탄과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2 이를 다윗에게 알려 주었다.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니, 내일 아침에 조심하게.
피신처에 머무르면서 몸을 숨겨야 하네.
3 그러면 나는 자네가 숨어 있는 들판으로 나가, 아버지 곁에 서서 자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겠네.
그러다가 무슨 낌새라도 보이면 자네에게 알려 주지.”
4 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좋게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 임금님의 신하 다윗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임금님께 죄를 지은 적이 없고, 그가 한 일은 임금님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5 그는 목숨을 걸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였고,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임금님께서도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공연히 다윗을 죽이시어, 죄 없는 피를 흘려 죄를 지으려고 하십니까?”
6 사울은 요나탄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 하고 맹세하였다.
7 요나탄은 다윗을 불러 이 모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을 사울에게 데리고 들어가, 전처럼 그 앞에서 지내게 하였다.
✠ 복음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 김찬선 그레고리오 신부님의 묵상글
<시기 질투에 관하여>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
(사무엘기 상권 18,9)
오늘 여인들은 전쟁을 이기고 돌아온 사울과 다윗을 이렇게 환영합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 18,7)
사실 이런 말을 듣고 시기 질투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여인들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시기하지 않을 남자들은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만 보면 시기하는 사울보다 경쟁을 부추긴 여인들의 사려치 못함이 더 큰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시기하면 안 되지요.
내게 득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남의 평가에 나의 행불행이 좌우되는 나의 불행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부러워하면 진 것이라는 말이 있고, 영어에서 ‘Envy’는 부럽다는 뜻과 시샘 또는 시기라는 뜻이 있는데, 부러워하는 것도 지는 거라면 시기하는 것은 더 크게 지는 거지요.
부러워하는 것이 나도 그와 같이 되면 좋겠다는 거라면, 시기하는 것은 그가 나보다 잘된 것을 싫어하는 것이며, 그래서 부러워하는 것은 부러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에 비해, 시기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듯 우선 내가 아프고 그래서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거나 더 나아가 직접 파괴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러워하는 사람은 열심히 노력해서 그와 같이 될 수 있고 그래서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지만, 시기하는 사람은 현재 불행하고 미래도 불행할 수밖에 없으며, 내가 행복해질 수 없다면 그도 같이 불행하게, 아니 나보다 더 불행하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에게 시기란 또 다른 측면이 있겠지요?
시기하는 동안 하느님을 만날 수 없는 불행의 측면 말입니다.
시기하는 동안은 나의 시선이 하느님을 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기란 하느님뿐 아니라 내 주변에 숱하게 사람이 있어도 그들에게 시선이 가지 않고 오직 시기하는 사람에게 시선이 꽂히고, 다른 사람들을 보는 경우도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보느냐 그거잖습니까?
이런 현상은 시기하는 동안 하느님을 볼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그의 하느님만 볼 것이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그만 잘되게 해주시는 하느님을 볼 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가 더 불행한 것은 단순 미움보다 더 거기서 빠져나오기 힘든 강한 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시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시기는 질투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갈 확률이 높지만, 그 시기의 끝에 그 끔찍한 불행 덕분에 오히려 내가 어리석었음을 깨닫게 되고, 나도 이제 행복해져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면, 그래서 그의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나의 하느님과 나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면 빠져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시기하게 된 사울이 어떤 짓을 하고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계속 지켜보며 교훈을 삼아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내 자유를 지킬 줄 모르면 남의 자유도 인정할 줄 모른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이 밀쳐대자 ‘배 한 척’을 따로 마련하시어 그들 무리에서 조금 떨어지셨습니다.
사람은 받으면 교만해져서 당연히 주님이 주셔야 하는 줄 알고 그분에게 달려듭니다.
하지만 그분은 주시는 분이시지 빼앗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유는 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가장 큰 요소입니다.
따라서 자유가 무시당한다는 것은 존엄성이 무시당하는 것이고,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면 그 사람은 자존감이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존엄한 존재라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지심리학 박사이면서 개인 상담소까지 운영하던 ‘니콜 르페라’는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에서 자신이 육체와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는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그녀는 20대부터 항불안제를 복용하였고 무기력과 피로, 육체적 고통과 공황장애 등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을 상담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찾은 이유는 바로 어머니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외형적으로 이상할 것이 없는 평범한 중산층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안정적인 직장에 다녔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습니다.
가족의 좌우명은 ‘가족이 전부다’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로 부모는 자녀의 자유를 인정해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가족이 전부가 되기 위해 자녀들의 자유를 희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어머니는 자신만의 환상 통증에 시달려 여러 날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항상 불안했고 산만했습니다.
삼남매의 막둥이인 니콜은 전부인 가족을 위해 자신의 감정은 무시하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니콜을 ‘아기 천사’로 불렀습니다.
니콜은 부모님의 기대대로 모든 면에서 완벽해지려 노력하였고, 외향적으로는 활달했습니다.
니콜이 10대에 들어설 무렵 파티에 갔다가 충혈된 눈으로 혀가 꼬인 소리를 하며 비틀비틀 집에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설마’ 했지만, 니콜이 써 놓은 글을 보고 술을 마신 것을 알고는 물건을 집어 던지며 울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네가 이 엄마를 죽이려는 거구나! 너 때문에 심장병이 도져서 당장 이 자리에서 죽어버릴 것 같아.”
엄마가 심장병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때였습니다.
니콜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어머니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또 자기 뜻대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권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니콜의 어머니의 부모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분명 자유를 침해당했을 것이고 그렇게 자랐기에 자신도 자녀의 자유를 침해해도 된다고 당연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아직 10대도 아닌데 술을 마신 것에 대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겠지만, 아이들은 나의 선택에 대해 부모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에서 ‘경계’가 모호한 인성을 가지며 성장하게 됩니다.
사람 사이에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 경계를 우리는 ‘자유’라고 부릅니다.
상대의 자유를 강요하는 것은 상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 상대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보아주지 않고 나의 종속된 물건으로 보는 행위입니다.
하느님도 인간에게 죄지을 자유를 허락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리옷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지옥에 가겠다고 하면 예수님은 말리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지옥에 가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침해당한 사람은 결국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자녀들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되고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유학 갔을 때 처음 말을 배울 때에 인도 신학생과 아프리카 신학생과 함께 방을 쓴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아프리카에서 온 신학생은 네 것 내 것 개념이 없었습니다.
빌려달라고 하더니 빌려 간 것들을 하나도 되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로서는 돈을 빌려 가고 갚지 않으면 강도입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 경계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그 강도질을 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존중하는 것을 먼저 배우게 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먼저 자유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자녀 스스로 그 자유를 책임감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수련을 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강요당해서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먼저 나의 자유를 목숨 걸고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선이나 좋은 일도 절대 남에게 휘둘려서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배 한 척을 마련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1995)에서, 주인공 ‘윌리엄 월레스’는 오직 스코틀랜드의 자유를 위해 높은 이상과 정의로움이 가득한 용감한 심장이 이끄는 대로 살다 죽습니다.
자유가 빼앗기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13세기 말엽(1280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왕가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포악한 이교도로 악명 높던 잉글랜드 왕 ‘롱생크’가 스코틀랜드를 차지하게 됩니다.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고, 롱생크는 작위와 영토라는 욕망의 미끼로 그들을 조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전제 군주 ’롱생크’는 서서히 스코틀랜드 백성을 무참히 살해하는 등 폭정을 시작하게 되고, 인종 청소의 하나로 반항심 강한 스코틀랜드인의 종자를 몰살시키기 위해 결혼 첫날밤 신부를 잉글랜드 지주가 차지할 권리를 주는 ‘프리마 노테(초야권)’라는 제도를 부활하여 스코틀랜드 백성에게 큰 치욕과 좌절감을 주게 됩니다.
이러한 금수만도 못한 제도를 피해 마을 청년 ‘월레스(멜 깁슨)’는 사랑하는 처녀 ‘머론’과 비밀 결혼을 올리고 사랑을 키워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월레스는 자신의 신부를 욕보이려는 군인을 죽이고 달아나게 되고, 급기야 신부는 잉글랜드 군인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릴 적 아버지와 형을 잉글랜드 군인에게 잃은 월레스는 저항군의 지도자가 되어 잉글랜드와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월레스는 격자무늬 킬트(Kilt:스코틀랜드의 남자가 전통적으로 착용한 치마형 하의) 복장과 얼굴에는 파란색의 물감으로 강인한 전사의 의지를 채색하고 용감하게 돌격하여 수적으로 절대 우세한 잉글랜드군을 파죽지세로 누르며 점점 ‘롱생크’ 왕을 압박해 나갑니다.
롱생크 왕은 무능한 자기 아들 대신 뛰어난 프랑스 출신 세자빈 ‘이사벨 공주’를 파견하여 월레스와의 협상을 시도하라 명합니다.
이때 영특한 이사벨 공주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반군 지도자 월레스의 애국심과 뜨거운 열정에 사랑을 느끼게 되고, 잉글랜드의 간교한 계략(앞으로는 협상을 뒤로는 야습)을 알려줍니다.
잉글랜드의 계략을 알게 된 월리스는 협상 대신 전쟁에서 연승을 거두게 됩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최고의 귀족인 ‘부르스 백작’은 나환자인 자신의 교활한 정치인 아버지의 사주를 받아, 백작들을 회유하여 월레스를 잉글랜드에 바치는 대가로 자신들은 권력과 영토를 나눠 가지게 됩니다.
이런 계략에 속아 평화적 협상을 위해 귀족 회의에 단신으로 참석한 월리스는 잉글랜드 군인에게 체포되어 런던의 롱생크 왕에게 압송됩니다.
“자비(Mercy)”를 외치며 충성서약을 하면 살려준다는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고 갖은 고문 속에서도 그는 “자유(Freedom)”을 외치며 장렬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공개 처형 후 그의 사지는 갈기갈기 찢겨서 머리는 런던 다리에 걸렸고, 팔과 다리는 영국의 네 군데 변방에 경고용으로 걸리게 되나, 이를 계기로 분노한 스코틀랜드의 백성들과 귀족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잉글랜드와 ‘베노번 전투’에서 대승리를 하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월레스가 ‘스털링’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하고 훈련이 잘된 잉글랜드 군인들 앞에서 벌벌 떨며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려 할 때 한 연설을 들어봅시다.
“스코틀랜드의 자손이여! 난 윌리엄 월레스요.
여러분은 폭정에 도전하고자 정의의 칼을 뽑았소.
여러분은 자유인이요!
자유인으로서 싸우러 온 거요.
저 훈련된 잉글랜드 병사들을 상대로 싸우다 죽을 수도 있소,
하지만 도망치면 당분간을 살 수 있겠지만 세월이 흘러 죽게 되었을 때, 오늘부터 그때까지의 시간을 맞바꾸고 싶을 거요.
이 단 한 번의 기회를 얻어 다시 적에게 외치고 싶을 거요.
목숨을 빼앗을 수 있지만, 자유를 빼앗진 못할 거라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가끔은 심장에서 보내는 뜨거운 소리(Brave Heart)를 따라 자유롭게 생각하고 신념 있게 행동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더 숭고하고 고결하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용기는 가정에서부터 키워집니다.
‘내 부모도 함부로 하지 못한 나의 자유인데!’라는 생각을 키워줘야 합니다.
다행히 저는 어머니께서 7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고 나머지 삶은 나의 선택에 달렸고 또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셔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유를 존중하며 살 줄 알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사회에 나오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군대에 갔더니 더 그랬습니다.
자대에 배치되자 일병 선임이 담배를 주면서 피우며 이야기를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더니 그때부터 버릇이 없다고 저를 갈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끝까지 피우지 않았습니다.
하느님도 터치하지 않는 나의 자유를 인간이 터치하게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의 경계는 내가 지키는 것입니다.
물론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지만 자유가 먼저 나의 것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봉헌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의 자유를 침해당하는데도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의 자유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 자신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그 사람의 존엄성입니다.
그것을 잃으면 다 잃는 것입니다.
자녀의 자유를 빼앗아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나의 자유를 그 누구에게 빼앗겨서도 안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지금은 염불을 할 때입니다>
‘소문은 발 없이 천리를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문은 퍼지는 과정에서 불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큰 무리가 몰려왔는데, 그들은 어떻게든 자기 삶의 무게를 덜어보겠다고 마지막 희망의 끈을 예수님께 두었습니다.
배불리 먹게 하고 병을 낫게 하는 것에 매력을 느낀 탓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겐 현실적인 위로와 희망도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세상 속에서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반 서민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호응을 받았고, 당시 유다의 지도자층에 속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헤로데 사람들에게는 완강히 거부되었습니다.
결국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모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골칫덩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의 속을 꿰뚫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호숫가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제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치유만을 바라며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리의 참된 구원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호기심과 욕구에 따라 바라보고 밀쳐댔습니다.
거기에다 악령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들은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었으니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통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룻배를 준비하는 몫은 제자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인기가 좋을 때 한발 물러서지 않으면 인기에 빠져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며 자기 본래의 모습은 어디 가고 껍데기만 화려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밑바닥에 떨어져 모든 것을 잃고 후회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2)하는 신앙고백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터인데 악령에게서 먼저 나왔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악령들은 아부하느라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들먹였지만, 그 속을 알기에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마르 3,12).
사람들이 눈을 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그분이 보이지 않고 은총의 결과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은총의 결과물보다도 언제나 은총을 베풀어주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잿밥에서 눈을 돌려 염불을 할 때입니다.
기도하며 갈망하다 보면 은혜를 넘치도록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받기 위해 매달리게 되면 참 주님을 만나는 것이 그만큼 어렵게 됩니다.
기도의 즉각적인 응답이 없어도 그 안에 주님의 뜻이 담겨 있고, 나와 거리를 두시는 것 같을지라도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말고 늘 기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면 삶의 현실 안에 함께하고 계신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천상을 갈망하면서도 발은 땅을 디디고 삽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작은 교회를 꿈꾸며>
이곳 한적한 바닷가 언덕 위, 오션 뷰가 나폴리 못지않은 피정 센터에 온 지가 벌써 만 2년이 되었습니다.
오자마자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강력한 여파로 타격이 엄청났지만, 마음 따뜻한 분들, 고마운 분들의 기도와 도움으로 문 닫지 않고 꿋꿋이 잘 버티고 있습니다.
놀라운 하느님 섭리의 손길을 접할 때마다 굳게 다짐하곤 합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좋은 장소를 보다 잘 활용해야겠다고.
끝이 보이지 않는 팬데믹 시대, 세파에 지친 이웃들이 아무런 부담도 없이 오셔서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켜보겠다고.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작은 교회를 만들자고.
요즘 봉독되는 마르코 복음서는 공생활을 막 시작하신 예수님 공동체의 신명나는 활약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구세사의 주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군중들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그 자체로 위로요 구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유다 지방 사람들뿐만 아니라(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옛 유다왕국), 예루살렘 도시 사람들, 이두매아 사람들, 요르단 강 건너편 사람들, 북서쪽에 위치한 티로와 시돈 지방 사람들까지 몰려들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군중이 한꺼번에 밀려들었습니다.
군중의 특징이 무질서하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차례가 올 것인데, 조금이라도 빨리 치유의 은혜를 입고자 새치기를 하고 뒤에서 밀고 난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전장치 겸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십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구해보라고 이르십니다.
거룻배에 타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밀어 육지에서 약간 떨어트려 놓으십니다.
그리고 분위기를 좀 가라앉힌 상태에서 차분하게 말씀을 선포하시고 치유 활동을 재개하십니다.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은총을 입기 위해서 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와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겸손하신 하느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자비의 표현인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교통수단이라고는 특별히 없었던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먼 길을 걸어서 왔습니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무척이나 지쳤을 것입니다.
목마르고 굶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예수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새 세상을 열어주실 메시아의 말씀을 듣겠다는 목적으로 그 먼 길을 거의 달려오다시피 했습니다.
교회를 찾는 우리의 발걸음이 그들처럼 가벼웠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참례 차 성당을 찾는 우리들의 마음이 그들처럼 설레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축제에라도 가듯이,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 가듯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 그렇게 사람들이 교회로 오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구성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활기차고 신명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 교회의 발밑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그 옛날 초기 교회처럼 오늘 우리 교회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까?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지친 성직자·수도자들은 상습 피로를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비명 속에 양떼들 사이에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말씀에 굶주린 세상 사람들은 남녀노소 그 누구를 막론하고, 교회가 제공하는 시원한 구원의 청량음료를 원없이 마시고 있습니까?
- 살레시오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들은 이들이 온 유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곳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그들은 치유를 받고자 몰려왔지만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악령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르 3,11)라고 외쳐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사실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일까?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오히려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십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 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셨고, 이사야 예언자에게는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10)라고도 말합니다.
대체 왜일까?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어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그 신원이 밝혀집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때’입니다.
그때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마르 15,39)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곧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서야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미사 중에 그분의 찢어진 살과 피를 마시며,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마르 3,12)
주님!
저의 무지를 깨우쳐주소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열어주소서.
완고함의 장막을 부수고 진정한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고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당신의 신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거리두기>
동서남북 사방에서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온 일은 앞의 1장 45절의 상황에 연결됩니다.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마르 1,45)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에게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고 ‘단단히’ 이르셨는데(마르 1,43-44), 그것은 ‘몸의 치유’에 관해서만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지시를 어기고 소문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어떤 병이든지 다 잘 고치시는 분”이라고 소문을 퍼뜨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동서남북 사방에서 몰려온 ‘큰 무리’는 그 소문을 듣고서 ‘몸의 병’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일 것입니다.
따라서 ‘큰 무리’가 몰려온 일을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이 ‘성공적’이었음을 나타내는 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병을 잘 고치는 의사가 나타난 것에 대한 일시적인 열광과 흥분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지시하신 것은 ‘말씀’을 전하는 일을 좀 더 잘하기 위해서입니다.
(군중은 호숫가에 서 있고, 예수님은 배를 설교단으로 삼아서 배 위에서 설교를 하시는 상황입니다.)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라는 말과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는 않고 ‘몸의 병’을 고치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이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마르 5,28; 마르 6,56).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는 것과 예수님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간청하지는 않고, 예수님의 몸이나 옷을 만지려고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님의 몸이나 옷을 만져서 병을 고치기만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치유의 은총은 예수님의 옷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행위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자비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지, 예수님의 몸이나 옷이 병을 고쳐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사도 19,11-12).
기적을 일으키신 분은 바오로 사도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느님(예수님)입니다.
바오로 사도나 바오로 사도가 사용했던 수건과 앞치마가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만일에 바오로 사도가 선포하는 예수님을 믿지는 않고 그의 수건이나 앞치마만 믿는다면 그것은 미신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룻배를 이용하신 일은 ‘군중을 밀어내신 일’이 아니라 당신이 뒤로 물러나신 일이고, 그것은 일종의 ‘거리두기’입니다.
그것은 사람들과 당신 사이의 거리두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당신이 주시는 것 사이의 거리두기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은 받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그것만 달라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 거리는 점점 멀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받지 않고 몸의 치유만 달라고 고집을 부리면,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좀 더 잘 전해 주려고 거리두기를 실행하신 일은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을 먼저, 치유는 나중에’ 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서로 밀쳐 대면서 예수님을 만지려고 한 사람들은 ‘치유를 먼저, 말씀은 나중에’ 라고 요구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급한 일부터 먼저 하는 것이 맞다. 그러니 치유가 먼저다.” 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더 급한지 판단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목숨이 위독한 응급환자라면 예수님도 병자 치유를 먼저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이야기의 상황은 응급상황이 아닙니다.
‘말씀 먼저, 치유는 나중에’ 라고 예수님께서 판단하신 것은 말씀을 전해 주는 일이 더 급한 일이라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설교를 마치신 다음에는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는 마귀들의 말은 겉으로는 ‘진리’로 보이지만, 이 말을 마귀가 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우리가(신앙인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하느님이신) 분”이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들이 이 말을 하는 것은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일 뿐이다.”라고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겉으로는 똑같은 말인데,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신 것은 ‘진리’를 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예 말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항상 거짓말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마귀에게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 자격과 권한이 없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의 삶 - 이탈과 겸손의 ‘사랑’, 분별의 ‘지혜’>
베네딕도 규칙에서 제가 좋아하는 두 구절입니다.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마라.”(성규 4,21)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성규 72,11)
이래서 베네딕도회 영성을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이라 정의합니다.
하느님 중심을 구체화한 말씀이 그리스도 중심이나 결국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매주 토요일 끝기도 때마다 신명기 말씀도 생각납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주 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너의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 주어라.
집에 있을 때에도 길을 갈 때에도 잠을 잘 때에도 일어날 때에도 항상 말해 주어라.”
(신명 6,4-7)
얼마나 철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느님 중심의 사랑과 믿음의 삶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께 대한 사랑만이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요 유일한 ‘삶의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엊저녁 시편 성무일도 시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들입니다.
“내 영혼아 고이 쉬라 오직 하느님 안에서,
님께로부터 내 구원이 오나니.
님만이 나의 바위, 내 구원, 내 성채시기에,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내 구원 내 영광이 하느님께 있나니,
하느님은 굳센 바위, 피난처시다.”
(시편 62,6-8)
얼마나 견고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의 고백인지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삶의 중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재앙 중의 재앙이, 불행 중의 불행이 삶의 중심의 부재일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 없을 때 뿌리없이 떠도는 유령같은 좀비같은 헛된 삶이요, 일희일비, 부화뇌동의 변화무쌍 변덕스런 삶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믿는 이들은 단호히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라 고백합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이며, ‘삶의 목표’이자 ‘삶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대신 그리스도를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제 행복기도문 중 다음 고백 역시 이와 일치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바로 여기서 귀결되는 하루하루의 삶입니다.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다 보니 모아지는 주제가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 중심에 삶에 집중할 때 저절로 ‘이탈과 겸손의 아가페 사랑’이요 ‘분별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사무엘 상권은 단적으로 말해 사울과 다윗의 권력 투쟁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역사상 골육상쟁(骨肉相爭)의 권력 투쟁은 얼마나 비일비재했는지 새삼 권력욕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습니다.
독재자뿐 아니라 권력욕의 특성상 2인자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다’라는 내용과 ‘요나탄이 다윗을 감싸주다’라는 두 내용이 나오는데, 그 사이에 두 내용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다’라는 내용과 ‘다윗이 사울의 사위가 되다’라는 내용입니다.
참으로 다윗은 사울에게 눈엣가시였을 것입니다.
이후에 전개되는 내용도 사울과 다윗의 권력 투쟁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여줍니다.
골리앗을 이긴 것도 순간, 강력한 라이벌로 혜성처럼 떠오른 다윗으로 말미암아 사울의 내면은 얼마나 복잡하고 불안했겠는지 동정심도 갑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네.”
이스라엘 모든 성읍들의 여인들이 나와 승전 후 돌아온 사울과 다윗을 맞이할 때 노래 가사입니다.
사울의 처지라면 인간적으로 볼 때 거의 누구나 질투와 분노로 속이 뒤집힐 것입니다.
사실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고 사위로 삼고 왕권이 다윗에게 넘어갈 것을 두려워하여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사울과 다윗이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사울은 중심이 없고 다윗은 중심이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 중심입니다.
하느님 중심이 믿음과 사랑이 빈약했기에 질투의 유혹에 빠진 사울입니다.
참으로 사울이 하느님 중심의 초연한 삶이 었다면 결코 일희일비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분별력의 지혜도 발휘하여 다윗을 넓은 마음으로 수용했을 것입니다.
미풍을 결코 태풍으로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 무서운 것이 우리를 눈멀게 하는 이런 시기와 질투심, 분노, 권력욕의 탐욕입니다.
바로 이 모두가 무지의 결과들입니다.
우리를 눈멀게 하는 무지의 탐욕, 질투, 분노들입니다.
참으로 이런 무지의 질투나 탐욕에 유혹됐을 때 미풍은 태풍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사울과는 대조적인 다윗의 하느님 중심의 믿음과 삶이 두드러집니다.
무엇보다 요나단과의 우정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요나단 덕분에 숱한 위기를 모면한 다윗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던 다윗에게 하느님이 보내준 참 좋은 친구가 사울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이후에 보겠습니다만, 아버지 사울에게는 둘도 없는 효자이자 충신이었고 다윗에게는 둘도 없던 친구였던 요나단의 온전한 인품이 정말 아름답고 호감이 갑니다.
인류 역사상 아름답게 회자되고 있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입니다.
정말 완벽한 전인적 인간상의 모델이 요나단입니다.
바로 이런 사울과 다윗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듯, 사울과 복음의 예수님도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다윗과 예수님은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즉 이탈과 겸손의 사랑을, 분별력의 지혜를 살았던 분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결코 이 두 분들은 경거망동하거나 부화뇌동하지 않았고 일희일비하지 않았던 참으로 초연한 이탈과 겸손의 사랑에, 분별의 지혜를 지닌 분들이었습니다.
결코 무지에 눈멀어 탐욕이나 질투의 유혹에 빠져 미풍을 폭풍으로 만든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참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치유활동과 구마활동에 전력투구하지만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봅니다.
사실 예수님은 언제나 내적 위기 상황이 왔을 때는 지체없이 꼭 외딴곳으로 물러나 아버지와의 친교 시간을 마련하여 자신을 새롭게 추스르고 충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원한 것은 ‘광팬(狂fan)’이 아닌 참된 추종자인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결코 군중의 덧없는 인기의 유혹에 빠져 영합하지 않고 한결같이 끝까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을, ‘파스카의 길’을 갈 수 있었던 비결도 하느님 중심의 철저한 믿음의 삶에서 나온 ‘이탈과 겸손의 사랑’, 그리고 ‘분별의 지혜’였음을 봅니다.
바로 이런 초연한 이탈과 겸손의 사랑이, 분별의 지혜가 미풍을 폭풍으로 바꾸지 않으며 또 폭풍은 미풍으로 바꿉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 감지되는 바도 늘 광팬과는 거리를 두는 그런 분별의 지혜요, 다음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떠날 때 잘 떠나는 때를 아는 분별의 지혜의 대가요 달인인 예수님입니다.
이 모두가 온전히 하느님 중심의 믿음과 사랑에 철저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무집착의 이탈과 겸손의 사랑이요 분별의 지혜라는 참 좋은 선물입니다.
사울과 다윗, 사울과 예수님의 비교가 우리에게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중심의 믿음의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더불어 이탈과 겸손의 사랑을, 분별력의 지혜를 선물하시어 광팬이 아닌 당신의 진정한 추종자인 제자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역시 참 좋은 이탈과 겸손의 사랑의 훈련시간이자 분별의 지혜의 훈련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거리’가 보입니다.
'큰 무리가 따라왔다 ...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마르 3,7-8)
예수님 주변으로 각지의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몰려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 각자 나름의 청원과 바람을 품게 되었을 겁니다.
단순히 호기심이 생겨서 온 사람부터 절박한 필요를 안고 온 이들까지, 지금 그들 모두의 관심사는 예수님입니다.
군중과 예수님은 지금 매우 가까이 밀착되어 있습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마르 3,9)
군중은 예수님 곁에 더 가까이 오려고 서로 밀쳐 댑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까지 밀칠 지경이 되자 예수님께서 배를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배는 물에 띄워질 것이고, 군중은 호숫가에 남아 그분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많은 경우 다정한 접촉이 동반되기도 했지만, 실은 말씀이 중심이지요. 물리적 거리가 군중에 대한 외면이나 회피가 아니라 보편적 사랑이 필요한 순간에 걸맞는 해법임을 알겠습니다.
‘그들(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마르 3,12)
밀려드는 군중으로 가뜩이나 복잡한데 더러운 영들까지 소리소리 지르며 한 몫을 보탭니다.
주님을 아는 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외침이 진정한 증언은 되지 못합니다.
믿음과 사랑에서 흘러나온 앎이 아니기에 듣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이럴 땐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치유와 기적 효과를 넘어, 수난과 죽음을 거쳐 부활의 영광에 이르러야 메시아의 신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준비 안 된 이들의 경솔하고 섣부른 폭로는 거룩한 이름의 진정성을 왜곡하고 훼손하고 손상시킬 수 있기에 침묵해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울과 다윗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네.“
(1사무 18,7).
승리에 도취된 여인들의 경박한 노래가 사달의 원인이 됩니다.
둘을 대놓고 비교하니 화 나고 속이 상한 사울이 다윗에게 시기심을 품게 된 것이지요.
이렇듯 인간의 정화되지 않은 시각, 진실의 채로 거르지 않은 말은 걷잡을 수 없는 역효과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으로 모자라 하느님까지도 죽음까지 몰아붙입니다.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1사무 19,5).
요나탄이 승리의 주인공은 사울도 다윗도 아니고 주님이심을 일깨우며 지혜로이 부친 사울을 설득합니다.
문제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 아니라 각자 하느님과 두고 있는 ‘거리’입니다.
사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 사이에서 시기하고 질투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를 도구로 쓰시느냐가 관건이지, 누가 잘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고 먹이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하느님의 일로 보지 않았기에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것 아닐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는 일이라면 그들에게도 ‘우리’ 일이니 함께 기뻐하며 응원했어야 옳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이 말씀들 안에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 욕망과 바람으로 무질서하고 난폭하게 예수님을 밀쳐 대고 있지는 않은지, 분별있게 거르지 않은 섣부른 말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벌려놓고 있지는 않은지,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보며 시기와 질투를 내려놓는지, 예수님을 태운 거룻배가 되어 그분과 밀착하는지...
어느 모습 안에 있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침묵'입니다.
앎이 무르익고 봉인이 해제될 때까지, 주님이 원하시는 때까지, 우리 자신이 주님의 말씀이 될 때까지 겸손히 침묵하며 그분께서 말씀하시도록 말입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는 것은 배가 아픈 것과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에는 큰 영향을 줍니다.
마음이 아프니, 마음을 따르는 몸도 아픈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했던 친구가 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집도 나의 집보다 크고, 배우자의 직업도 나의 배우자의 직업보다 좋고, 얼굴도 훨씬 젊어 보이면 축하해주어야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동창은 큰 본당으로 가고, 보좌 신부님이 있는 곳으로 가는데, 나는 늘 작은 본당으로 가고, 성당에 빚만 많은 곳으로 가면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왜 나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옆집 아이는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친구도 잘 사귀는데, 우리 집 아이는 놀기만 좋아하면 건강해서 좋다는 생각보다는 ‘누굴 닮아서 그런가!’라는 걱정이 앞섭니다.
우리의 삶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경우가 있습니다.
카인은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였다고 기분이 나빴습니다.
더욱 정성껏 제물을 바치면 좋으련만, 동생을 죽이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배가 아픈 것을 넘어서 ‘살인’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그렇습니다.
사울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다윗이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면 축하해주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다윗을 더욱 칭찬하자 배가 아프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충실한 부하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다행히 아들 요나탄의 말을 듣고 다윗을 죽이지 않지만, 마음은 이미 변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열 제자는 더 높은 자리를 원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시기하였습니다.
제자가 아니면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들을 시기하였습니다.
민수기 11장 26에서 29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진영에 남아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엘닷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메닷이었다.
그런데 명단에 들어 있으면서 천막으로 나가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도 영이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진영에서 예언하였다.
한 소년이 달려와서, “엘닷과 메닷이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하고 모세에게 알렸다.
그러자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 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였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모세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모세는 온 백성이 예언자가 되면 좋겠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만 한다면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마르코 복음 9장 38절에서 40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은총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바람이 부는 대로 임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하고 하십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에 주님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주님께서 하신 방법을 따라 하기보다는, 나를 위해서,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움켜진 손을 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명예, 권력, 자존심, 욕심’ 이런 것들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덮쳐오는 유혹을 이겨내기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
주는 삶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이 내 편이심을 나는 아네.
하느님 안에서 나는 말씀을 찬양하네.
주님 안에서 나는 말씀을 찬양하네.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 없으니,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뜻이 아니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저 때에는 고3 학력고사 체력장이란 것이 있어서, 학력고사 점수에 체력장 만점을 받으면 20점이 가산되었습니다.
그래서 운동장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거의 모두가 거저 받는 20점을 못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달리기를 정말로 못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보통 13초 이내로 들어오는 100m 달리기를 매번 16초 이상의 느린 속도로 결승점에 들어왔습니다.
이 친구를 향해 체육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너 열심히 달리지 않을래? 걸어가도 너보다는 빠르겠다.”
이 친구는 정말 열심히 달렸는데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냐면서 하소연했습니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만 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즉 열심히 하지 않고 다른 길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전환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열심히 하면 좋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열심’이라는 것은 열심히 해야 할 것에 집중해야 커다란 성과를 가져옵니다.
다른 것에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잘못된 결과만 가져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어떤 것에 열심히 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일에 열심히 하고,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데 열심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아주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열심한 삶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단식, 자선, 기도, 그리고 율법의 준수는 어떤 사람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열심을 틀렸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열심’에 사람들은 혼란을 느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틀린 말일까요?
아닙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산발한 채 이곳저곳을 다니며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의 말을 그 누가 믿었겠습니까?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에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여기에 계시는구나.”라면서 예수님께 최고의 예우를 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러운 영이 인정하는 말을 무조건 거부하면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열심을 보면서 오히려 굳게 믿었습니다.
잘못된 열심을 보고서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열심, 사랑의 실천을 위한 열심만이 주님을 진정으로 알아볼 수 있게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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