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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5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제1독서 : 로마 7,18-25ㄱ
복 음 : 루카 12,54-59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전사戰士
-영적전쟁, 회개, 마음의 순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제 수도생활 초기부터 마음을 사로잡았던 주제는 '주님의 전사'였습니다.
비단 수도승만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평생 제대가 없는 주님의 영원한 현역,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는 바꿔 말해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전쟁 중 싸우다 ‘전사戰死’해야 ‘전사戰士’라 할 수 있고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성서의 인물들 너나 할 것 없이 주님의 전사입니다.
바로 그 모범이 오늘 제1독서 로마서의 주인공 바오로 사도입니다.
참으로 평생 치열한 영적전투를 치르다 순교로 전사함으로
영적전쟁에 승리한 주님의 전사, 바오로 사도입니다.
누구와의 영적전쟁이며 그 승리의 비법은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내가 바로 적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치열한 내적 전쟁 상황에 대한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 모두의 실존적 체험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양면성을 지닌 모순적인 인간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내적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하지만 외적인간은 죄의 법을 기뻐합니다.
자칫 방심하여 외적인간을 따르다 보면 죄의 법에 사로 잡혀
참 기쁨도 평화도 잃고 삶은 혼란해지고 복잡해집니다.
죄의 법에서 벗어나기 힘든 악순환의 반복처럼 생각됩니다.
참으로 지난한 끝이 보이지 않는 자기와의 싸움, 영적전쟁입니다.
어떻게 이런 악순환의 반복에서 벗어나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을 까요?
바로 주님의 전사라는 호칭에 답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답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참 반갑고 고맙습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심으로 영적전쟁의 승리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의 우정의 일치가 영적전쟁의 승리의 비결임을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예수님과 깊어지는 우정이요, 결국은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의 늦기 전에 화해하라는 일화는 바로 회개의 긴박성을 말해 줍니다.
늦기 전에 신속한 회개를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너희는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신속히 화해함으로, 즉 회개함으로 삶의 질서를 바로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분별력 좋은 주님의 지혜로운 전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가 주님의 전사의 필수적 자질임을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은총을 통해 주님의 전사가 지니게 되는 용기, 슬기, 끈기의 세 덕목입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서 예수님의 지탄의 대상은 바로 오늘 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답은 역시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에 전제되는바 끊임없는 말씀공부와 기도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공부하고 기도하며 회개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깨어 있는 삶에 마음의 순수와 지혜입니다.
마음 따라 보는 눈입니다. 이래야 시대의 징조를 알아볼수 있는 마음의 눈도 지니게 됩니다.
개신교의 유명한 칼 바르트 신학자의 혜언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성서를 신문 보듯이 하고 신문을 성서보듯 하라’는 말입니다.
신문을 통해 시대의 징표를 읽기 위함이겠습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공부, 기도, 회개를 통해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의 눈도 지닐 수 있음을 봅니다.
새삼 주님의 전사는 회개의 사람이자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는
참 예언자이자 현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전사로 영적전쟁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19년도 벌써 10월 말이니 이제는 두 달 조금 더 남았습니다.
그래서 벌써 2020년 달력도 나오고, 저의 2020년 일정도 하나둘씩 벌써 채워지기도 합니다.
이 일정들을 보면서 ‘내년에도 기대할 수 있는 날이 되겠군.’ 싶었습니다.
내년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할 일도 있고, 이를 통한 성과가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기대하지 말자는 다짐을 했습니다.
큰 기대를 할수록 별로였던 적이 더 많았음이 떠올려졌기 때문입니다.
영화 예고편을 보고서 잔뜩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지만, 실망만 안고 돌아온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큰 기대를 하고 손꼽아 기다렸던 날이었지만 별일 없이 지난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특별하다고 기다렸던 그 날도 그저 내 생의 하루에 불과할 뿐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큰 기쁨을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면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기쁨도 더 컸던 것이 아닐까요?
즉, 자신의 기대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기대하면서 사는 삶 보다는 눈높이를 확 낮추는 삶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러한 기대감보다는 일상 삶에 더욱더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노력으로 무엇을 얻으려는 생각보다, 그 노력 자체에 집중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단순히 미래의 일을 알지 못한다고 꾸짖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미래라는 시간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현재라는 시간만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대에 대한 풀이는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와 다투었다면 지금 당장 화해를 해야 하며,
어떠한 것에 구속되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그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일을 첫 번째 자리에 두고서 이에 우선순위를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당연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우선순위가 잘못 매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세상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이 노력의 결과가 나쁘다고 해서 주님께서는 꾸짖지 않으십니다.
어떤 결과보다는 노력 자체에 크게 기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 자체만으로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과 은총을 주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심은 하지만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게 있을까요? 중독성이 강한 게 있습니다. 담배입니다.
많은 사람이 새해를 맞이해서 금연을 결심하지만,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로 금연을 포기합니다.
담배의 중독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24년 전에 담배를 끊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잘한 결정이고, 결심이었습니다.
술이 있습니다. 술은 모임을 원활하게 하는 효과가 있고, 적당히 마시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음주문화가 필요하기에 금주하는 사람은 금연하는 사람보다는 적은 편입니다.
그렇지만 술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곤란한 사람은 금주를 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술을 즐겨 마시는 편입니다. 금주까지는 아니라도, 절주가 필요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담배와 술과 같은 중독성이 있는 걸 이야기하지 않고
좀 더 근원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선과 악’의 문제입니다.
기계는 고장 나면 고칠 수 있습니다. 기계는 입력된 명령을 수행합니다.
방 안에 있는 전기 포트는 물을 넣고 전원을 누르면 어김없이 물이 끓습니다.
벽에 있는 시계도 건전지가 작동하는 동안은 문제없이 시간을 알려줍니다.
매일 듣는 스피커도 그렇습니다. 전원이 연결되면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줍니다.
입력된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을 행하고 싶은데 악을 행하는 자신을 봅니다. 바오로 사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선과 악을 넘나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계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넘나드는 인간은 세상 어느 존재보다 비참해지기도 하고, 세상 어느 존재보다 영광스럽기도 합니다.
신문과 방송은 인간의 비참함을 보도하기도 합니다.
테러, 폭력, 전쟁, 범죄, 자살, 마약, 도박, 모함은 인간의 비참함이 끝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생존과 관련 없이 다른 생명을 죽이기도 합니다.
지난 세기 2번의 세계 대전은 인간의 고귀함과 존엄함에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념 때문에, 종교 때문에, 신분의 차이로 서로를 비난하고, 전쟁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다른 생명에게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함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소방관이 있습니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의 음악, 미술, 건축, 조각, 과학, 기술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더 빛나게 해 주고 있습니다.
글은 칼보다 강한 힘이 있습니다.
글은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고, 글은 우리의 생각과 사상을 후손에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문학은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삶을 전해줍니다.
인터넷은 지구촌의 모든 사람을 하나로 연결해 줍니다.
이런 모든 인간의 업적은 하느님의 선하심이 드러난 겁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걸 보면 곧 비가 오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곧 더워지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시대의 징표는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자유의지를 하느님을 찬양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을 찾는 것이 시대의 징표입니다.
나는 아니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르신들은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지식은 풍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분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늘 차고 넘칩니다.
제비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상했고,
개미의 움직임을 보면서 장마에 대비했습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고 비를 예상하고 남풍이 불면 더위를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징조를 읽어냈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무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기적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 부족이 아니라 외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대의 뜻을 올바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시대의 뜻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할 일을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가기에 앞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12,58)는 것입니다.
화해를 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재판정에 서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5,24) 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 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에페4,26)권고 합니다.
더더욱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이든 ‘나는 아니야’ 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말씀이나 강론을 들으면
“저 얘기는 아무개를 두고 하는 얘기야!”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은
“모두가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야!”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대는 하느님을 잊어가는 시대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정신이 아주 사소한 틈새까지 파고들어
우리를 정복하려고 들고 그에 따라서 우리는 더욱 영적인 사정에 둔감해지는 시대입니다.”(함께야)
이런 시대를 올바로 분별하려면 세상의 지혜를 찾지 말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빕니다.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곧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내려놓아야 할 과정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자아를 죽이는 관계만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
한 여대생이 커플 시계를 맞추기 위해 선물 가게에 들렀습니다.
커플 시계를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오다가
멀리서 남자친구가 동기여학생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남자친구는 그 동기여학생에게 선물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은 동기 여학생이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주었던 것을 양심상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본 여학생은 자신의 남자친구가 그 여자에게 선물을 주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남자는 관계를 정리하는 중이었는데 여자는 양다리 걸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교실에서도 여자는 남자를 본척만척 합니다. 남자친구의 왜 그러느냐는 말에 대꾸도 안 합니다.
나중에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여자 친구는 남자친구에게 뭐 할 말 없느냐고 다그칩니다.
남자는 발뺌을 합니다. 여자가 그 동기 여학생에게 준 선물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남자친구는 자신이 동기 여자를 조금은 좋아했었다는 사실 때문에 솔직히 말하기 싫어합니다.
그냥 별거 아닌 일이라고 변명합니다.
이에 여자 친구는 너무 힘들어 더 이상 못 하겠다며 헤어지자고 합니다.
남자의 자존심과 여자의 상상력이 만나면 이렇게 이별의 열매가 맺힙니다.
[참조: ‘대나무숲 웹드라마-팀플: 연인이 헤어지는 이유 ‘남자의 자존심과 여자의 상상력’]
자존심을 부리거나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는 두 사람의 미래가 과연 좋을 수 있을까요?
자존심이 사그라지고 믿음이 커지는 관계가 아니라면
그 관계는 언젠가 반드시 깨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관계는 항상 불 위에 있는 고기처럼 되어야합니다.
상대가 불 위의 고기처럼 먹기 좋게 구워졌을 때 좋은 관계가 유지됩니다.
불은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불을 붙이기 위해 십자가에서 수난하셨습니다.
성령의 불은 우리 자아를 죽입니다. 헛된 상상력을 죽이고 헛된 자존심을 죽입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먹히기 좋은 양식이 되어갑니다. 이런 관계라야 영원히 지속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성령의 불로 구워지기를 원치 않고
자신들의 행위로 하느님 마음에 들려고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결과는 자명합니다. 영원한 지옥입니다.
자존심만 세워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무당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비참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귀신들이 자신들을 이용하고 쓸모없어지면 해코지를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해코지를 당하지 않기 위해 귀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도 지금 성령의 불에 죽기를 원치 않아
뻔히 알면서도 지옥의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불살라버려야 하는 죄의 법이 존재합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삶만이 하느님과 이웃에게 맛있고 매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자존심이 죄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이 죄입니다.
이런 것들을 태우지 않고 지니고 있으면
주님께 아무리 예물을 바치고 예배를 드려도 즐겨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자녀가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모기가 드리는 예배로 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통해 내가 자존심의 압제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면
하느님과 이웃이 나에게 어떻게 대하든 항상 감사한 마음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관계, 그래서 감사가 나오는 관계, 그것만이 영원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