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용문산 구국제단
구름도 자고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한 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 보는
주름진 그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
XX영아원에서는 매일 새벽에 원장님과 보모들과 박군 이렇게 열댓명이 둘러 앉아 새벽예배를 드리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고
일요일이면 전 직원들이 성남감리교회에 다녔는데 사실 우리 박군은 늘 비판적 시각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곤 했으니 신앙심은 한톨도 없으렷다.
그런데 어느 주일예배에서 목사님이 용문산 기도원을 운영하는 나운몽 장로님이 이단이니 용문산에 가서는 안된다고 엄하게 설교를 하시는 것이 아닌가?
- !? 대체 이단이 무엇이며 왜 이단이라고 할꼬?
목사님의 그 설교는 우리 박군에게 오히려 용문산 기도원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만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몇달이 지나서 학교를 파하고 영아원으로 돌아오는 길거리에서 확성기를 매단 광고차량이 지나가면서 선화동 성결교회에서 용문산 나운몽 장로님의 부흥회가 있다는 선전을 하며 지나갔다.
...옳거니... 이 참에 한번 가서 들어 봐야겠다.
그런데 부흥회 첫날에 참석을 하여 아무리 연단을 둘러보아도 부흥회 강사는 보이지 않고 한복을 차려입은 시골티 나는 여자 한 명만이 강단에 앉아 있는데...
... 어 ? 저 여자분이 강사라네... 철원에 있는 얍복강수도원 원장님이라는데...
그래 좀 시시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박군은 둥둥 울리는 북소리와 찬송가 소리에도 영 신명이 나지를 아니하였다.
그런데 그 촌닭처럼 생긴 여자 강사가 단위에서 외치는 설교는 우리 박군을 완전하게 사로잡고 말았으며 교회에 다닌 후 처음으로 눈물 콧물 흘려가며 기도를 하게 되었으니 5일간 그 부흥회 강사들이 주장하는 것은 한결같이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을
일깨워주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강사들의 얘기 중 용문산 기도원에는 산봉우리에 구국제단이 있는데 그 제단이 만들어지고 나서 그때까지 한시도 사람이 끊어지지 않고 구국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 구국제단...지붕도 없다고 했다. 비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고 기도한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구국기도만을 한다고 했다...
아... 용문산에 그런 기도터가 있다는데... 한번 가봐야지...
당시 박군의 심정으로는 그곳 구국기도 제단에 찾아 가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 통곡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었다.
... 오래전 조상들의 역사, 중세/근세의 역사, 현대의 역사...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답하고 한스럽기만하고 해결방안이 없는... 희망이 없는 민족...
(이렇게 역사를 배운것은 일제 식민사관의 해독임을 최근에서야 알았음)
...암...내가 구국제단을 찾아 가야지... 올 여름방학 때 꼭 가볼거야...
그래서 그해 여름방학 때 박군은 길도 잘 모르는 용문산 기도원을 찾아 추풍령에 올라섰다.
나운몽 장로 ! 그분은 분명 기독교 신앙인이기에 앞서 열렬한 민족주의자이었다.
미국 정보함인 프에블로호가 동해에서 북한에 피납되어 미국-북한간에 판문점에서 비밀협상을 진행할 때,
- 이 땅에서 주인도 알 수 없는 비밀협상이 웬일이냐 ! 프에블로호 반환을 위해 북한에 무기원조란 있을 수 없다 !! 협상 내용 공개하라 !!
하면서 용문산 신학생 수백명이 줄줄이 버스를 타고 임진각까지 밀고가서 미군들이 쏘아대는 총알을 맞으면서도 자유의 다리를 돌파하여 농성을 하였던...
당시 반미데모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던 시절에 최초의 반미 데모를 하였던 사람들...
오늘 이런 얘기를 늘어 놓음은 잠실 베레모가 반미를 주장함이 아니요 나운몽 장로님이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는 민족의 현실을 일깨우는 주장들을 끊임없이 펼쳐온 분임을 표현하기 위함일 뿐이다.
저녁 늦게 용문산 기도원에 도착한 우리 박군은 기도원에 있는 대성전 바닥에서 하루밤을 쭈그리고 보내고 새벽이 되자 바로 뒷산의 봉우리에 올라갔다.
아침공기는 서늘하였고 새벽안개는 아직은 물러가기가 싫은듯 나무 잎새마다 매달려 물방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 높지 아니한 산봉우리... 정상에 터를 닦고 세멘트로 제단을 쌓아놓고 누군가 그 안에서 계속 기도를 한단다... 나라의 안녕과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앞에는 깃대에 태극기가 높히 달려 있고...
참으로 !! 엄숙한 곳이로구나...
박군은 신발을 벗고 기도 제단의 가장자리에 올라가 무릎을 꿇었다.
- 하나님 ! 하나님 ! 우리민족을 굽어 살펴 주십시요 ! 힘없고 가난하고 분단된 민족 ! 같은 민족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죽기로 싸운 어리석은 민족을 가엽게 어겨 주십시요 ! 우리 민족도 미국과 소련과 영국과 프랑스처럼 부강한 민족이 되게 도와 주십시요 ! 38선을 사이에 두고 보고 싶은 혈육들이 있어도 만날 수 없는 이 가슴아픈 현실이 하루 속히 해결되고 통일을 이룰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우리 박군은 그냥 그렇게 무릎을 꿇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흐느끼고 있었다.
얼마가 지난 후 아래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마도 젊은 청년들(신학생?) 몇 명이 구국제단에 올라 왔다가는 맞은편으로 지나가 버리고..
모두 지나간 줄 알았는데... 다시 인기척이 났다.
그들중 한 여학생이 내려가지 않고 박군이 업드려 울고 있는 바로 옆에 서 있는 모양이었다.
그 여학생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잠시 후,
-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그 여학생도 노래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아니 주위의 푸른 나무잎도 흘러가는 새벽안개까지도 모두 우리의 소원 노래를 들으면서 함께 울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야기를 바꾸어,
그 후 용문산 기도원은 우리 박군이 세상살이가 힘들고 답답할 때면 찾아가서 울부짖는 <성황당>이 되었다.
벌써, 7년전의 일인가 ?
지금의 직장에서 도무지 일이 얽혀서 안풀리고 너무 힘들었었다.
그냥 주저않고 싶었다. 모두를 둘러 엎어버리고 세상살이 인생살이를 끝장내고 싶었다.
나는 사표를 써서 도장을 꾹 찍어 상사에게 내던지고는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너무 괴로웠다. 미칠 것만 같았다.
... 안되지... 이러면 안되지...맞아 용문산이 있잖아 !!
맞았다. 나에게는 힘들 때 찾아갈 용문산 기도원이 있었다.
부릉 ... 부릉 ...
나는 차를 몰고 서울을 빠져나와 추풍령 용문산을 향했다.
구름도 자고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고개 ...
나는 그날 저녁에 용문산 기도원 대성전의 맨 앞자리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었다.
마음이 답답한데 무슨 중언부언 기도가 필요하랴...!!
그저,
- 주여 ! 주여 ! 주여 !
무조건 하나님 들으실 때까지 계속 외쳐댔다.
신학생들이 돌을 쌓아 지었다는 천명은 들어앉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대성전 돌벽이 찌렁 찌렁 울렸다.
- 주여 ! 주여 ! 주여 !
계속 대성전 벽에서 메아리가 울렸다.
- 찌르릉! 찌르릉 !
남이 보기에도 너무 안타까웠든지 뒤에 앉은 누군지도 모를 자매님이 낭낭한 목소리로 나를 위한 지원기도를 몇시간이나 계속해주었다.
두시간 세시간 쯤 되어서도,
- 주여 ! 주여 ! 주여 !
나는 말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이 되어 부르짖다가는,
- !?... !?
그만 아래 턱뼈가 툭 빠져버린거라...
이를 어쩌나... 소리도 지를 수 없고...
순간 나는 당황하여 빠진 턱뼈를 손으로 만지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바닥으로 탁 탁 빠진 턱뼈를 위로 올려쳤다.
그런데,
-...!?
툭 하면서 턱뼈가 제자리로 들어가 버렸다.
휴... 휴...
날이 밝아오자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승용차에 올랐다.
부릉 ... 부릉....
서울 집에 돌아와 면도와 세수를 말끔하게 하고 출근을 하였다.
사표는 반려되고 나는 열심히 근무하여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나는 전날 저녁부터 밥을 굶었고 밤을 꼬박 새우고 운전을 하고 다녔어도 그날 근무하는데 전혀 힘들지 아니하였다.
그날 저녁에 내가 용문산을 다녀온 사실은 아내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알게 된 용문산 기도원은 지금도 내 마음속의 <성황당>이다.
잠실 베레모/어휴 ! 넘 얘기가 길어 !!
첫댓글 마음속에 성황당... 고 참 좋을 듯 싶습니다....항상 성실히 최선을 다하시기에...아름다우십니다..
미소님, 지금도 지치고 피곤할 때는 찾아가고 싶은 곳 - 추풍령 용문산 기도원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