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가 끝난 들녘에서
십일월 하순이다. 올봄부터 연말까지 한시적으로 근교 농촌지역을 자주 누비게 됨은 우연찮은 계기로 시작되었다. 경찰서에서 시니어 봉사활동 대상자를 선발하기에 지원했더니 받아주었다. 은퇴자를 대상으로 하굣길 초등학교 주변 거리를 순찰하는 치안 보조 역을 맡도록 함인데 평일 오후 두세 시간 배정했다. 근무 중 아동안전지킴이 표식이 붙은 모자와 녹색 형광 조끼를 입는다.
지난 정부 때부터 노인 일자리 창출 계수를 높이려는 일환으로 시작해 현 정부에서도 관행으로 승계해 지금껏 이어오는 듯하다. 주소지 내에서 순찰 근무를 맡긴다면 도심이라 생각이 없었는데 근교 지역에도 희망할 수 있다고 해서 마음을 내었더랬다. 나는 어차피 이른 아침 시골로 나가기에 새벽에 강둑이나 들길을 걷고 치안 보조 봉사활동은 귀갓길 오후 시간대 수행하면 되었다.
퇴직 후 3년 차에 들어 새로운 영역에서 이색 경험을 한 소중한 시간이다. 안전지킴이는 지난 3월부터 10개월간 한시적이라 다음 달 20일에 종료된다. 그럼으로써 오늘부터 꼭 30일 후면 근무 중 지금껏 착용하는 모자와 조끼는 반납한다. 근무자 표식이 쉽게 드러나도록 쓰는 모자와 조끼는 위엄을 드러냄이 아닌 도보 순찰 중 민원 발생 소지가 없도록 마음가짐을 부추김이었다.
내가 하루를 보내는 일과는 삼등분으로 나누어 어느 하나도 소홀함이 없다. 새벽길을 나서 강둑이나 들녘을 걸었다. 이후 지역 마을도서관을 찾아 책을 열람하다가 때가 되면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에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고 집으로 온다. 근무지가 의창구 대산면이라 그곳까지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 이동하면 집에서부터 1시간 남짓 걸려도 내게는 익숙한 동선이라 무리가 없다.
새벽부터 근교로 나가 자연과 교감하고 대면하는 풍물과 지역민은 내가 생활 속에 남겨가는 글 속의 글감으로 오롯이 녹여 담아낸다. 때로는 동남아에서 온 청년이나 부녀들도 등장하고 버스에서 무거운 짐을 운반하거나 자리를 양보해 준 사연도 남기고 있다. 무엇보다도 들녘에서 현지 농민들이 애써 생산해 상품성이 처진 농산물을 우리 집이나 이웃으로 나눔에도 보람을 느꼈다.
이른 봄 들녘에서 냉이나 초여름 강가에서 죽순은 이전부터 채집하던 찬거리였다. 올해는 여기에다 상품성이 처지긴 해도 못난이 토마토를 넉넉하게 먹을 수 있었다. 청정지역 수경재배 다다기 오이도 양손 가득 운반해 아파트 이웃에도 양껏 나누었다. 추석 무렵에는 차례상에 올리던 머스크멜론도 가져왔다. 최근에는 머위 잎이나 때 이른 가을 냉이까지 채집해 아낌없이 나누었다.
내가 근무하는 곳이 대산면 가술이라도 거기까지 가는 교통편이 일정하지 않다. 1번 마을버스가 자주 다니기는 해도 그것만 이용하지 않는다. 때로는 도중에 동판저수지나 주남저수지에서 내려 들녘을 걷거나 주천강 강둑을 따라갔다. 본포교에서 밀양 반월로 가고 수산다리를 건너 명례를 둘러오기도 했다. 진영역에서 화포천 습지를 두르거나 한림정에서 술뫼를 거쳐 유등으로도 갔다.
지난여름은 더위는 유래가 드문 폭염이었다. 그러함에도 새벽길을 나섰는데 얼음 생수와 죽염 가루를 챙겨 강둑이나 들녘을 두세 시간 걸었다. 면 소재지 마을도서관 열람실은 9시가 되어 문이 열려 그 시간까지는 걸었다. 도서관은 이용자가 적어 개인 서재이다시피 했는데 그 더웠던 여름을 냉방 잘된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최근에 해가 짧고 기온이 떨어져 도서관 걸음은 줄었다.
십일월 하순 금요일이다. 자연학교 등교는 여전해 들녘 순례부터 나섰다. 2번 마을버스로 종점 유등을 앞둔 유청에서 내려 우암리 덕현으로 걸어 들녘을 지나왔다. 농부들은 벼를 거둔 논은 뒷그루 작물로 수박이나 당근을 심을 비닐하우스를 설치하느라 무척 바빴다.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스쳐 지나만 와 미안하고 황송하기만 했다. 옷자락에는 메뚜기 한 마리가 붙어 따라왔다. 24.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