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사진 찍으려다 어른들에게 혼난 적이 있었다.
잠을 잘 때에는 사람의 영혼이 밖으로 나갈 터인데,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해 돌아가지 못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지금이야 믿거나 말거나 싶지만, 그때에는 제법 심각했다.
실크로드를 다녀와서 사진 정리를 하는데,
일터에서 낮잠을 자는 사람의 사진이 몇 장이나 되는 것에 놀랐다.
일부러 찍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혹시 자신의 자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않은 사람에게 실례를 한 것은 아닌가 싶어 죄송하다.)
아마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일터의 고단한 사람들에게서 내 모습을 봤는지도 모르겠다.
종일 빡세게 일을 해야 하는 노동의 고달픔이 애틋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 사진은 신장의 서쪽 오지 깊숙히 위치한 카슈카르 바자르에서 찍은 사진이다.
지난 번에 이어 실크로드 여행만 두 번째로 이어지는 이유 중의 하나가
내 부모님의 삶을 되짚어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평생 비단 행상을 하신 부모님은 내가 대학 2학년이 되어서야 읍내 사거리에 자그마한 점방 하나를 얻어 정착을 했다.
머리와 등에 이불감과 비단을 이고지고 오일장을 떠돌아다니셨던 부모님의 모습이
그토록이나 멀리 떨어진 서역의 비단 상인들의 고단한 모습과 겹쳐보였을까.
나의 유년 시절의 기억 중에 유독 장터가 많은 것은
읍내장이 서는 날이면 으레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를 찾아갔던 일 때문이었다.
검정 고무줄을 길게 늘어뜨리고 서있던 잡화장수, 설설 김이 끓어오르던 팥죽솥 아궁이에 나뭇단을 밀어넣으며 땀을 훔치던 팥죽 장수, 타는 듯한 햇볕에 녹아내리는 고무신을 늘어놓고 앉아 있던 신발장수, 나뭇단이 지게마다 가득 매어있는 나무정거리를 지나고, 옷걸이에 걸린 크고작은 옷들이 바람에 자락을 날리는 옷가게를 지나는 동안, 이처럼 피곤에 못이겨 몸을 바닥에 누이고 잠든 사람을 여럿 보면서 지나쳤던 것이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비단전 쪽으로 들어서면
어머니 아버지는 도너츠처럼 동그랗게 파인 옷감들 사이에 오두마니 앉아 계셨다.
오고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이려 애쓰고 있던 어머니는 나를 발견한 순간, 눈을 크게 흡떴다.
어머니의 손길을 받지 못한 내 차림.
하루 내내 뒹굴고 노느라 머리칼은 헝클어져 있었을 것이고,
누런 콧물도 흘렀을 것이고,
옷은 더럽혀져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반가움에 겨운 나는 헤죽 웃으며 엄마를 불렀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게서 얼른 시선을 거두고는 재빨리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 하나를 손바닥에 쥐어주며 억세게 내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가!
나는 엉겁결에 떠밀려 나가면서 영문도 모른 채 눈자위를 붉혀야 혔다.
어머니는 눈을 부라리며 낮고도 단호하게 속삭였다.
이럴라면 다시는 나오지 마!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장터를 되돌아나오는 나의 손안에는 어머니가 쥐어준 동전이 땀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장날만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일하는 엄마를 낮에 볼 수 있다는 게 어딘가.
그런 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읍내장 뿐이었다. 오일에 단 한 번.
다른 날들은 해가 질 때마다 골목 어귀에 나가 엄마를 기다렸지 않은가.
시든 배춧잎처럼 터벅터벅 걸어오시는 엄마의 발자국 소리는 얼마나 반가웠던가.
엄마가 계모처럼 느껴져 울었던 어린 시절.
먼 세월이 흘러 일하는 엄마가 된 지금,
내 아이가 동료들에게 일하는 엄마의 빈자리를 내보일까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된다.
이제야 그 마음을 알겠다.
풋~~
첫댓글 ㅎㅎㅎ 지나고 보면 참 아름다운 추억거리가 그 때에는 큰 설움으로 다가오기도 했지요. 우리 부모 세대들은 정말 힘든 세월 보냈어요. 무엇보다도 식민지 시절과 전쟁을 겪으면서 가슴과 정신에 큰 상처도 많이 받았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도 많이 받은 세대지요. 그래서 때로는 그 상흔을 자식들인 우리 세대가 고스란히 물려받기도 했고요.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게 또 우리들의 운명이고 삶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열심히 사신 부모님들을 보면 언제나 경이로워요. 양쪽 어머니 모두 전쟁통에 돌아가셔서 어머니 없이 결혼해서 사신 분들이라... 하여간 가장의 책임을 끝까지 지고 사셨어요. 행상이라 일년 내내 땀띠와 동상이 끊이질 않았거든요. 그렇게 가르쳐 놓았는디...^^
봄날 아지랑이 처럼 아련 합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모처럼 어린 시절의 추억을 끄집어 봤어요.^^
낯선이들의 삶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것도 여행의 중요한 의미가 되는것 같아. 직녀는 역시 글도 잘쓰네.
역시 여행의 달인이시라...^^ 맞아요, 가끔 여행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데, 결국 낯선 곳에서 '나'를 찾는 여정이 아닌가 싶더라고요.^^
사진과 적절이 더불어져 읽기에도 잼잇네. 울아부지 보고싶어지자나!!ㅠㅠ...
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으셨나 보우! 아무래도 그랬을 것 같으우. 아직도 애기 같이 구여워요.^^(실례...ㅎㅎㅎ)
마저, 조 짱님은 아직도 구여운 데가 있어요. ㅋㅋㅋㅋㅋ
어릴적 직녀 모습이 그려지네 글을 읽으니 코 찍찍 ㅎㅎㅎ그 마음이 전해져오네요
코찍찍... 맞아요. 히히. 옥희 언니도 그랬제요? 척 봐서 떠올리는 거 보믄 틀림 없제...ㅎㅎ
잔잔한 글 ...뭉클해지네요.
고맙습니다. 이런 칭찬 듬뿍 자주 해주셔요...ㅇㅇ ㅎ
아련하고 아름다운 글이네..지금도 오일장은 구순의 옆집아제도,오십의 나도 들뜨게 한다네..
선경 언니, 지금도 오일장 보우? 가끔은 가고 싶은 마음이어... 근데, 불갑 수변 공원 물결 위로 가을이 수줍게 얼굴 붉히며 오고 있을턴디, 그 모습도 보고잡네...^^ 언제나 또 한번 가볼 날이 있을란지..
엄마 찾아가다 닭전에서 쪼그려 앉아 구경하는 직녀 모습 상상이 된다..글이 재미져~
닭전에서 쭈그려 앉아있었던 거.. 셀 수가 없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으니까...ㅎ
내 고향 영산포장은 5, 10일 장이었어.. 그 달 젤 마지막 장은 말일에 열렸고.. 시장 골목을 지나고 계단 언덕을넘는 꼭대기에는 교회당이 있었고... 거그 유치원에 댕겼제~~ㅋㅋ
잔잔한 글과 사진이 직녀의 누런코 훔치던 유년시절로 빠져들었어요. 반듯하게 성장한 예원이는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기던데요.^^
여러모로 고맙습니다. 잘 가르쳐 주셔서요. 아름다운 가을과 함께 늘 건강하세요.^^
직녀의 글에서는 아련한 어린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선배 님은 지금도 영광 읍내장 보우? 거그가 이 글의 배경인디...^^ 앞으로 내가 장터 풍경을 그린다면 다 거그가 거그여.ㅎ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도 귀한 것이지 않을까. 난 기억이 거의 없어서.사진들 좋구나.
그러게. 슬프든 기쁘든 내 삶의 이력일 테니까. 아프지 말고 잘 살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