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김장하' 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되면서
경상남도 진주에서
60년간 한약방을 운영했던 김장하 한약사의 삶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김장하 한약사는
열아홉 살에 한약업사 자격증을 따서 지난 1963년 고향 사천에서
한약방을 개업한 뒤, 10년 후 진주로 이전해 '남성당 한약방'을 50년간 운영했습니다.
한약방은 마이크로
들어올 순서를 호명할 정도로
손님이 많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점심시간에는 빵을 나눠주기도 했으며, 전국 한약방 중,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한약방이기도 했습니다.
김장하 한약사는
20대 젊은시절부터
가난한 학생들에게
남몰래 장학금을 주기 시작하여
1,000명을 웃도는 학생들이 혜택을 받았고, 40대에 100억 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 세운 사학(私學)
명신고등학교를 나라에 헌납하고,
30억 원이 넘는 재산을 국립 경상대학교에 기부했고, 진주의 사회, 문화, 역사, 예술, 여성, 노동, 인권단체들을 지원했습니다.
김장하 한약사는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한 뒤 이사장실을 없애고,
양호실로 쓰도록 했고, 학교에 갈 때는 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이사장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은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랬던 김장하 한약사는 본인이 설립한 명신고등학교 이사장 퇴임식 때
다음과 같은 고별인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부끄러운 고백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가난 때문에 하고 싶었던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 때부터
한약업에 종사하게 되어 작으나마 이 직업에 조금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제가 감히 본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욕심을 내게 되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였습니다.
첫째는 제가 가난해서 배우지 못했던 그 설움을 나의 후배들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번 돈은 모두 병든 사람들, 즉, 불행한 사람들로부터 얻은 이윤이었기 때문에 내 자신을 위해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합당한 일이 곧 장학사업과 학교 설립이었습니다.”
김장하 한약사의
다큐멘터리를 탄생시킨 책의 제목은 '줬으면 그만이지'였습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습니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핍니다.
나는 처음에는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내가 가진 돈이 내 돈이라는 생각보다
언젠가 사회로 다시 돌아갈 돈이고, 잠시 내가 위탁관리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사회로 돌아갈 돈이라면
보람있게 돌려줘 보자. 그런 생각이었어요. 저는 맹자에 나오는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부부작이인(俯不怍於人: 고개를 내려 보다도
사람들한테 부끄러울 게 없다)”을 나의 생활신조로 삼고 있어요.”
김장하 한약사의 일대기를 적은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책의 제목을 정한 이유가 심오합니다.
한 스님이 눈보라 치는 어느 추운 겨울날, 고갯마루를 넘어서 이웃 마을로 가던 중, 반대편 고개에서 넘어오는
한 걸인을 만났다.
곧장 얼어 죽을듯한
그런 모습을 본 스님은 가던 발길을 멈추고 자기의 외투를 벗어주었습니다.
무섭게 추운 겨울날
자기 외투를 벗어주면 자기가 힘들 것임을 알았지만 안 벗어주면 걸인이
금방 얼어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에 고민 끝에 외투를 벗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걸인은
당연한 듯이 그 외투를 받아 입고는
한 마디 인사도 없이 그냥 가려고 했습니다.
기분이 나빠진 스님이, “여보시오. 고맙다는 인사 한ㅈ마디는 해야 할 것 아니오?”라고
섭섭해 했더니,
그 걸인이 반문했습니다.
“줬으면 그만이지.
무슨 칭찬을 되돌려 받겠다는 것이오?”
그 걸인의 말을 듣고 스님은 “나의 공부가 아직 모자라는구나.
오히려 내가 공덕을
쌓을 기회를 준 저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했었다”고 자책하면서 그 고개를 넘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