諸葛亮(제갈량)-梁父吟(양부음)(양부의 노래)
步出齊城門(보출제성문) 걸어서 제나라 성문을 나가
遙望蕩陰里(요망탕음리) 멀리 탕음리 근처를 바라보면
里中有三墳(이중유삼분) 마을 안에 세 무덤이 있나니
纍纍正相似(유류정상사) 셋은 나란하고 비슷하게 생겼다
問是誰家墓(문시수가묘) 도대체 누구 집 무덤이냐 물으니
田疆古冶子(전강고야자) 전강과 고야자의 무덤이란다
力能排南山(역능배남산) 그들의 힘은 남산을 제낄 정도였고
文能絶地紀(문능절지기) 문장은 대지를 잇는 밧줄을 끊을 정도였다
一朝被讒言(일조피참언) 그러나 하루 아침에 참언을 받아
二桃殺三士(이도살삼사) 두 개 복숭아로 세 용사가 죽게 되었다
誰能爲此謨(수능위차모) 누가 대체 그런 간계를 꾸몄던가
國相齊晏子(국상제안자) 제나라 재상 안자 바로 그였다
*제갈량[諸葛亮, 181 ~ 234, 자는 공명孔明, 시호 충무忠武, 별칭 와룡선생臥龍先生]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충신으로 정치가 겸 전략가.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유비(劉備)를 도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점령하여 천하 삼분의 계책을 세웠고, 유비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유선을 보필하여 위나라를 치다가 오장원[산시성(陕西省) 바오지시(宝鸡市)의 치산현(岐山县)의 현성(县城) 남쪽 20㎞ 지점에 위치한 지역으로, 지형은 높이 약 120m의 평탄한 대지로 동서 1㎞, 남북 3.5㎞의 지세가 험악한 황투고원. 남쪽은 친령(秦嶺), 북쪽은 위하(渭河), 동서는 맥리하(麦李河) 및 석두하(石头河)로 막혀있는 요충지, 이곳에 제갈량의 묘가 있다]에서 54세로 병사하였고, 그의 출사표는 아주 유명하다.
*위 시는 문학비평가이신 김희보님의 “중국의 명시”에 실려 있는 것을 올려 본 것입니다, 양부는 산동성에 있는 조그만 산인데, 사람은 죽어 이 산에 장사지내게 된다는 만가, 이 시는 제나라 재상 안자(안영)가 악랄한 술책으로 세 용사를 처치한 데 대해 아쉬워하고 그것을 비판한 것으로, 제갈량은 이 작품을 즐겨 노래하곤 했다 합니다. 일반적으로 안자(안영)은 위 시와 달리 관중과 더불어 명재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형식 : 五言古詩(오언고시)
*齊城(제성) : 산동성에 있었음
蕩陰里(탕음리) :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 남쪽에 있음
纍纍(유류) : 나란히 있는 모양
排南山(배남산) : 남산을 밀어 제끼다. 힘이 세다는 형용, 남산은 종남산終南山
地紀(지기) : 땅을 이어 붙들어 맨 밧줄.
二桃殺三士(이도살삼사) :
복숭아 두 개로 세 용사를 죽이다. 제나라 경공의 신하에 전개강, 고양자, 공손첩 세 용사가 있었는데, 재상 안자가 그들을 위험하게 생각하고 못마땅하게 여겨 복숭아 두 개로 꾀에 빠지게 하여 세 명 모두 죽게 했다는 고사. 세 사람 모두가 엄청난 힘과 용기를 지니고 의리조차 두터워 당시의 국상 안영은 은근히 그들이 두려워 꾀를 내어 경공으로 하여금 그들 세 용사에게 복숭아 두 개를 내리게 하면서 ‘그대들 중 힘세고 용기 있는 이가 먹도록 하라’고 하자 공손첩과 전개강은 별 생각 없이 먹어 버리고, 뒤에 온 고야자가 이를 따졌는데, 나중 세 명은 자기들이 그 복숭아를 먹은 것을 탐욕이라 단정 짓고, 그 탐욕을 부끄러이 여겨 자결하고 말았다 합니다.
*안영[晏嬰, ? ~ BC 500, 자(字)는 중(仲), 통칭 안자(晏子)] :
안자는 중국 춘추시대 제(齊) 나라의 정치가로 관중(管仲)과 함께 훌륭한 재상(宰相)으로 이름을 떨쳤고, ‘안자춘추(晏子春秋)’에 그이 기록이 남겨져 있다. 제(齊) 나라 영공(靈公)과 장공(莊公), 경공(景公) 3대에 걸쳐 몸소 검소하게 생활하며 나라를 바르게 이끌어 관중(管仲)과 더불어 훌륭한 재상(宰相)으로 후대(後代)에까지 존경을 받았다. 재상(宰相)이 된 뒤에도 한 벌의 옷을 30년이나 계속해서 입을 정도로 검소하게 생활하여 백성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안영호구(晏嬰狐裘)’라는 말이 비롯되었는데, 이는 고관(高官)이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벼슬에 있으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충간(忠諫)과 직언(直言)을 하는데 머뭇거리지 않았으며 의롭게 행동하여 이름을 떨쳤다. 장공(莊公)이 신하인 최저(崔杼)에게 살해당했을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하로서 도리를 다해 곡(哭)을 하며 문상(問喪)을 하는 용기를 보였다. 때문에 사마천은 《사기》에서 안영에 대해 “만일 안자가 아직 살아 있어 내가 그를 위해 말채찍을 잡고 그의 수레를 몰 수 있다면 정말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라고 칭송하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중국의 삼대 최고의 꾀주머니(지낭智囊) 내지 책사는 한고조 유방의 책사인 장량(張良), 위 시의 작가로 삼국시대 촉나라 유비의 책사인 제갈량(諸葛亮, 와룡선생), 명태조 주원장의 책사인 유기(劉基)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장량은 조상이 한나라에서 대대로 고관을 지낸 명문가 출신으로 경전과 병서 등을 체계적으로 깊이 공부한 인물로, 토사구팽을 당한 한신과 달리 시종 이인자 리더십을 발휘하며 유방의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자 신선술을 배우는 등 도인을 흉내내었는데, 이는 월왕 구천의 패업 완수를 도운 후 미련 없이 그 곁을 떠난 범리(범려)의 행보를 연상케 하고 있고, 사기 세가(史記 世家) 중 소하 및 조참과 더불어 한나라 건국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책사 장량과 그 후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유후세가(留侯世家)에 그 기록이 남겨 있습니다.
유기는 거지, 탁발승, 홍건적 부대장이었던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는데 큰 공헌을 한 인물이지만, 그는 천재들의 공통점이자 단점인 자만과 자존감이 강해 정적이 많았는데, 그(유기)의 선택은 정적과의 정면승부가 아닌, 다 버리고 떠나는 것. 그래서 유기는 명예와 가문을 보존할 수 있었던 중국 최고의 책사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나라 고조 유방과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은 절대 공신과 장군들을 숙청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는데, 고향마을에서부터 같이 자라고 수많은 전장터를 함께 누빈 형제 같은 장군들도, 명 참모로 나라를 세우는데 기둥 역할을 한 책사들도 모두 죽어나갔지만 장량과 유기, 두 사람은 당대 최고의 책사답게 자신의 운명까지 ‘생 生’의 계책을 마련하여 죽음으로부터 벗어났고, 그 비결은 모든 것 즉 공과 권력, 명예를 내려놓고 떠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첫댓글 탐욕을 경계하는 고사인가요...
공과 권력, 명예를 내려놓고 떠날줄 아는 정치인은 과연 있을까요...
사람에 대한 평가가 모두 같을 수는 없기에,
아마도 제갈량 입장에서는 안영을 좋지 않게 보고 있는데,
사서 등에서 안영을 명재상이라 평가하니 그것이 매우 못마땅했던 거 같습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