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처처의 안동 권씨 이야기(6)...좌윤공파
안동 권씨 제6파 左尹公派 派祖 權至正은 別將公派 派祖 權英正과 형제간이다. 성화보에는 추밀공파, 복야공파, 별장공파, 동정공파 등 4개파만 수록되어 있고 좌윤공파와 부정공파는 사위로 기록되어 있다.
좌윤공 권지정의 현손 權良俊은 복야공파 파조 權守洪의 사위로 기록되어 있고 權良俊의 손자 權奕은 충렬왕때 易東 禹倬과 同傍으로 급제하여 中門祗侯 永嘉君에 봉군되었다.
영가군 權奕의 아들 權用一은 門下侍中에 올랐는데 諡號는 僖敬公이고 묘는 아버지 영가군과 함께 안동 제비원에 있다. 그의 부인 역시 복야공 권수홍의 증손녀이다.
僖敬公 權用一의 아들 감찰규정 權希正은 7남 3녀를 두었고 그 묘는 안동시 亭上洞에 있다.
장자 경산현령 權轂은 여섯째 동생 權軺와 함께 예천 대죽리로 이거하였는데 權軺의 손자 權山海(1403-1456)는 副正公派 花山府院君 權專의 사위가 되어 만년에 단종 복위 실패로 자결하였다. 셋째 文景公 權軫(1357-1435)은 우왕때 문과에 급제, 세종때 좌의정에까지 올랐고 만년에는 풍산 상리에 복거했다는 기록이 永嘉誌에 있으나,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고 안동지방에 계거하는 후손이 없다. 넷째 權軼과 다섯째 權軒은 예천 金谷으로 이거하고, 안동에는 오직 막내 權輜의 후예 몇 집이 풍산 일대에 散居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혁혁한 가문이었던 좌윤공파는 上系의 묘소가 안동지방에 있고 많은 아들이 있었음에도 자손이 번성치 못하여 세거지를 잃어버리고 묘소마저 수호하지 못하는 가문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그 외손들은 번창하여 안동 지방 명문 거족으로 번성하였으니 權希正의 사위는 첫째가 栢竹堂 裵尙志(흥해 배씨 상계), 둘째가 퇴계의 고조부 李云侯( 진성 이씨 상계), 셋째가 寶白堂 金係行의 조부 金革(안동 김씨 상계)으로 안동 지방에 계거하는 여러 씨족으로서 權希正의 외손이 되지 않는 가문이 별로 없을 정도로 그 외손은 번창하였다.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 權希正의 아들 좌의정 權軫은 안동 김씨 典農正 金得雨의 사위가 되었고, 안동 김씨 金得雨의 아들 金革은 權希正의 사위가 되었다는 점이다. 즉 權希正과 金得雨는 서로의 딸을 주고받은 겹사돈 관계가 되고, 따라서 그 아들들인 權軫과 金革은 서로가 처남이자 매부 관계가 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권진(權軫) 1357(공민왕 6, 정유) ~1435(세종 17, 을묘)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호는 독수와(獨樹窩). 시호는 문경(文景). 감찰규정(監察糾正) 희정(希正)의 자.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 자기의 조카딸과 결혼하라는 권신(權臣) 염흥방(廉興邦)의 제의를 거절하였다가 그의 미움을 사서 관직을 내놓았다. 몇 해 뒤 의창현령(義昌縣令)에 임명되어 왜구를 잘 막았으며, 이성계(李成桂)의 천거로 전주판관(全州判官)이 되었다. 1398년(태조 7) 침입한 왜구를 토벌할 때 조전원수(助戰元帥) 성석린(成石璘)의 추천으로 경력(經歷)이 되었다. 태종 초에 강원도(江原道)와 경상도(慶尙道)의 도관찰사(都觀察使)를 지냈으며, 1407년(태종 7)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라 흠문기거사(欽問起居使)로 명 나라에 다녀와서 평안도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가 되었다. 1422년(세종 4)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다시 명 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고, 1426년 찬성(贊成)을 지냈다. 이어 이조판서(吏曹判書)․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며, 1433년에 치사(致仕)하였다. 부내(府內)에 살다가 만년에 풍산(豊山) 상리(上里)로 이거했다. ■참고문헌 : 太祖․太宗實錄․高麗史․安東鄕土誌(宋志香)
권초(權軺)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절신(節臣). 본관 안동(安東). 호는 송고(松皐). 감찰규정(監察糾正) 희정(希正)의 제6자. 우의정(右議政) 진(軫)의 제. 여말(麗末)에 문과에 급제하여 판제용감사(判濟用監事)를 역임했다. 조선조에 와서 군기소감(軍器少監)․경상도경차관(慶尙道敬差官)․대호군(大護軍)․북백(北伯 : 咸鏡道 觀察使의 別稱)․대사성(大司成) 등을 제수했으나 부임하지 않고 백형(伯兄) 판도공(判圖公) 곡(轂)과 고려의 망함을 탄식하며 용궁현(龍宮縣) 염송산(溓松山) 기슭 대죽리(大竹里 : 現 知保面 新豊里 稷洞)에 은거해서, 염송산을 ‘송도(松都)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염송산(念松山)이라 부르며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다. ■참고문헌 : 太宗實錄․醴泉郡誌․安東權氏譜
권치(權輜)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감찰규정(監察糾正) 희정(希正)의 제7자. 좌상(左相) 진(軫)의 제. 관은 홍원현령(洪原縣令)을 역임했다. 조사의(趙思義)의 난에 연루되어 1403년(태종 3) 직첩이 추탈되고 가산이 적몰되고 구급되었으나, 뒤에 석방되고, 1426년(세종 8)에 난에 가담한 것이 상왕(上王)인 태조(太祖)의 명에 의한 것이라 하여 직첩을 돌려받고, 성종조에는 가자(加資)까지 받았다. ■참고문헌 : 太宗․世宗․成宗實錄․安東權氏譜
권산해(權山海) 1403(태종 3, 계미) ~ 1456(세조 2, 병자)
조선 전기의 의인(義人). 본관 안동(安東). 자는 덕보(德甫). 호는 죽림(竹林). 감찰규정(監察糾正) 희정(希正)의 증손. 경력(經歷) 관(寬)의 자. 처부(妻父)는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 어려서 종조부 우의정(右議政) 진(軫)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문종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이모부(姨母夫)로 1440년(세종 22)에 창덕궁녹사(昌德宮錄事)․주부(主簿)가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과 사귀었다. 1454년(단종 2) 어린 왕을 도우려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에 올랐으나, 1455년 단종의 손위(遜位) 이후로는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수양대군이 찰방(察訪)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고 있다가, 이듬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관직이 추복(追復)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추증되었으며, 경주(慶州) 운곡서원(雲谷書院)․예천(禮泉) 노봉서원(魯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예천(醴泉) 대죽리(大竹里 : 現 知保面 新豊里)에 살았다. ■참고문헌 : 世祖實錄․醴泉郡誌
[출처] 안동 처처의 안동 권씨 이야기(6)...좌윤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