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원은 무엇 때문에
그 삼 년 전에 열반하신 전강스님을 아직까지도 조실로 모시고 있느냐?
그 뜻을 잘 모르신 분은 혹 의아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그 점을 분명히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원래 불법은 목적이
해탈도를 증득허는 데 있습니다.
나도 해탈하고 남도 해탈을 허도록 해서 이 사바세계는 물론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모든 중생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해탈도를 증득해서 모두가 생사 없는 대안락을 누릴 수 있도록 허는 것이 우리 불법에 목적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해탈도냐?
생사라고 허는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이 소소영영한 나에 마음자리 진여불성을 부처님과 똑같이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명으로 인해서
그것을 미해가지고 자기의 마음자리를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자신도 부처님과 조끔도 차별이 없습니다.
차별이 없거늘 하물며 무슨 생사(生死)가 있겠습니까?
생사가 있다고 허는 것은 우리가 눈이 어두워서 미해서 무명 때문에 생사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있고 생각되고 있을 뿐이지 생사라고 허는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이 허공에는 아무런 물견도 없고
따라서 빛깔도 없고 어떠헌 무늬도 없건마는
앞, 눈병이 걸린 사람은 이 허공 속에 어떠헌 꽃숭어리
같은 것이 마냥 피어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눈병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허공을 찾아봐도 이 허공 속에는 아무런 물체도 그림자도 무늬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며는 눈병 난 사람에 한해서 허공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실지는 눈병만 나은다고 허며는
이 허공 속에는 아무런 꽃도 물견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눈병 난 사람에게 있어서 허공에 꽃이 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허공 속에 꽃이 있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 중생들에게는 분명히 생사가 있습니다.
나면 늙어서 그래가지고 병들어 죽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생사고라고 하는 것인데,
그 ‘생사고’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자성을 미해가지고
있는 중생에게만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지 해탈도를
증득한 부처님, 깨달은 분에게는 생사라고 허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혹 이 말씀을 잘못 알아들으며는
‘그럼 도인은, 또는 부처님은 아프지도 않고 병도 안 나고 죽지도 않겠구나. 그렇다며는 왜 부처님은 팔십 세(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으며,
역대조사들은 왜 앓다가 돌아가신 분이 계시며,
이절에 조실스님은 왜 삼 년 전에 돌아가셨던가.
그 말과 ’생사가 없다‘라는 말과는 말이 맞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이 들어가신 분도 계실는지 모르지마는,
부처님이라고 해서 지수화풍 사대로 뭉쳐진 몸띵이를, 육체를 가지고 계신 이상 생로병사는 있는 것입니다.
다맛 우리의 눈으로 볼 때에 그것이 생로병사입니다.
부처님 자신에 있어서는 본래 이 세상에 나오신 바도
없고, 늙으신 바도 없고, 병드신 바도 없고,
돌아가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생 눈으로 볼 때 그것이 생로병사로 보일
뿐이지 부처님 자신에 있어서는 대해탈도요
대열반이요 적멸입니다
첫댓글 일체 중생 참 나를 깨달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 나기를 발원합니다 _()_
고맙습니다._()()()_
나무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