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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씨는 지난 수요일(2014년 1월 8일) 서초센터에서 열린 제직회에서 돌이킬 수 없는 파행적(跛行的) 회의 운영을 주도하였다. 장로교회의 교회정치와 의사결정 구조/절차의 근간을 뒤흔드는 파행이 있기까지 이미 작성된 시나리오가 한몫 했음에 틀림이 없다. 한마디로 그날의 당회장 오정현씨를 평가하자면, 그는 이런 일에 매우 능숙한/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정현씨는 대부분의 개혁갱신측 성도들의 퇴장 후, 자신의 능숙함/익숙함을 감추고 이렇게 발언하였다.
저는 정치를 잘 못해요... 이것도 익숙한 사람도 아니고...
지난 10여년간... 무슨 당회장권을 제가 행사한 본 적도 없어요. 그런 데 익숙하지도 않고...
천만에! 당신은 정치를 아주 잘 하는 사람이다. 그 정도면 훌륭하다. 이런 류의 파행적 회의 운영에 익숙/능숙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끼가 있다. 애써 겸양(謙讓)의 미덕까지 선보였으니 정말 최고다. 고(故) 은보(恩步) 옥한흠 목사님께서 생존해 계셨더라도 당신에 대한 꼭같은 평가를 하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디 언젠가는 당신이 옥한흠 목사님의 카랑카랑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바란다.
혹시라도 오정현씨 귀하가 천국에서나마 뒤늦게 은보 목사님의 책망을 받을 기회가 있다면 참 다행이지만, 사람 일이란 의외(意外) 사건들의 연속인지라, 귀하의 진정한 은인이신 은보 목사님을 귀하가 다시는 뵙지 못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2014년 1월 8일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회 앞에서 제직회를 분열의 장으로 감히 몰아가면서 귀하가 스스로 뱉었던 말들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귀하가 언젠가는 다시 들어야 할 말이며, 목자장(牧者長)이신 분께 이와 관련하여 귀하의 행실에 대하여 귀하 스스로 직고(直告)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가신 분을 좀 들어오세요.
교회가 하나 되어 나가야 하는데...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랑의교회 답게 하십시다.
제가 한 사람 한사람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아닙니까?
교회는... 은혜가 많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1년쯤 지나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알 거예요. 다 알거고,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고,
내가 아까 거기 있는 분들도 내가 정말 인사를 좀 하고 내 마음을 다 드리고 싶었는데...
가버리시니까 할말이 없네요. 할말이 없고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제 책임이고, 제가 겸손하게.....
이런 말들을 당시 제직회 현장에서 개혁갱신측 성도들의 대거 퇴장 이후 오정현씨가 내뱉었다. 소위 부목사라 하는 자들도 이 패역한 상황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란다. 당신들도 나중에 선한 목자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할 말을 미리 준비하고 있으라. 주님이 반드시 물어보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자기 혼자서 살려고 내 양떼를 죽이는 자와 언제까지 함께 하였느냐?"
2014년 1월 8일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회 앞에서 서초센터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오직 참된 증인(요한계시록 3:14)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실되게 증언해 주실 것이다. 오로지 그날을 기다린다.
다만, 필자는 이 글의 나머지 부분을 통하여 그날 제직회에서 오정현씨가 내뱉었던 특유(特有)의 한 마디/한 문장의 위선(僞善)과 허위(虛僞)에 대해 고발할 것이다. 오정현씨는 자신의 재정비리 의혹 문제를 거론하는 중에 갑자기/감히 이렇게 말했다. 마치 회중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제가 옥 목사님 제자 아닙니까?
천만에. 당신은 옥 목사님 제자 아니다. 당회장으로서 당신 혼자 살자고, 제직회를 그런 파행으로 이끈 당신은 이미 옥 목사님과 무관하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심화시킨다. 당신은 이미 옥한흠 정신, 옥한흠 목사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언제나 당신의 설교가 웅변(雄辯)해 주듯이, 당신의 교훈은 은보 옥한흠 목사님의 교훈을 대놓고 공격한다.
그런 예들은 아주 많다. 편의상 가까운 일례를 들어 보자. 제직회가 있기 3일 전 오정현씨는 주일예배(2014년 1월 5일)에서 이사야 43:18~21을 본문으로 '영원한 새로움을 사모함'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신년 첫 주일설교였다. 새해 벽두부터 옥한흠 목사님의 가르침을 거스르기 시작했다. 오정현씨는 이렇게 설교했다.
은혜에 대한 sense를 회복하기 원합니다. 이런 은혜는... 파격적이고 급진적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거룩한 과격함입니다. 그래서 값싼 은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짜 은혜를 알고 은혜에 대한 sense가 있는 사람이라면, 은혜를 함부로 평가절하하면 안됩니다.
또 시작이다. 이 설교자는 '값싼 은혜'(cheap grace)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설교에 대한 비평을 의식해서일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 신학을 공부했다는 사람이, 기독교회의 목회자/설교자라는 사람이 '값싼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에 대하여 '은혜를 함부로 평가절하'한다고 비난하고 있다니. 기독교 신학과 역사에서 면면히 흘러온 '값싼 은혜'의 용법을 철저하게 도외시(度外視)하고 자신만의 관객들과 교감하기 위한 용트림인가.
그런데 이 비평글에서 주목하는 바는 이것이다. 이 설교자는 자신이 입술로는 숭앙하는 은보 옥한흠 목사님의 가르침을 설교행위로써 짓밟는다. 은보 목사님의 영적 아들, 제자라고 입으로는 주장하지만, 그분의 후임 목회자/설교자로서 그 행실은 옥 목사님의 소중한 '은혜론'을 정면 반박하고 있는 셈이다. 선배 목회자/설교자의 '은혜에 대한 성찰'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의 제자라고 공언하는 기만성/이중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다.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 중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은보 옥한흠 목사님께서는 생전 '값싼 은혜'의 천박함과 위험성을 잘 알고 계셨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값싼 은혜'에 대한 경고는 옥 목사님의 심중에 담아 두셨던 그리스도의 메시지였다. 이 글에서는 세가지 출처만을 사용하여 이를 밝히겠다.
A.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이 있은 이후 신학생들 앞에서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이 있은 이후, Korean Revival (한국신학교 영적 갱신을 위한 신학교수·신학생 기도모임)이 주최한 ‘전국 신학생 여름 컨퍼런스’의 간담회에서 옥 목사님은 300여명의 신학생들과 대화하셨다. 이를 보도한 <크리스천투데이>의 기사(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187171)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아래 기사에서 '그'는 옥한흠 목사님이시다. 볼드체는 필자가 강조한 것이다.
그는 "교회에 대해 악플을 올리는 상당수가 교회에 다녔던, 그리고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며 "이는 한국교회,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잘못"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목회자들이 한 사람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행사 등으로 밖으로 돌아 다니다 교권을 놓고 싸움하고, 안으로는 교인들의 입맛에 맞는 값싼 은혜만을 가르친 결과"라고 꼬집었다.
그는 "값싼 은혜가 판을 치고 인격과 삶이 변화되지 않는 교인들이 양산되는 한국교회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주장하며 "한국교회가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을 걸으며 주님처럼 한 영혼을 붙들고 몸부림 쳐야 한다"고 밝혔다.
필자는 은보 옥한흠 목사님이 살아 생전에, 특히 고뇌하신 인생의 말년에 '값싼 은혜'야말로 한국교회의 개혁과 사랑의교회 제자훈련의 철천지 원수라고 생각하고 계셨음을 잘 알고 있다. 주님처럼 한 영혼을 붙들고 몸부림쳐야 함에도, 되레 밖으로 돌아 다니고 안으로는 교인들의 입맛에 맞는 '값싼 은혜'만을 가르친 사람이 대표적으로 누구인지도 은보 목사님은 잘 알고 계셨다고 필자는 느낀다.
B. 이태영 저 <두려운 영광>에 실린 자전적 고백에서
2008년 출판사 포이에마에서 출간한 이태영 저 <두려운 영광>을 읽어 보면, (9인의 여타 설교자들과 더불어)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자로서의 자기성찰과 고백을 읽을 수 있다. 책을 사보면 더욱 좋겠지만,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이 책을 소개한 크리스천투데이 기사(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195402)에 이런 부분이 있음을 참고할 수 있겠다.
옥한흠 원로목사 또한 말씀을 편식하게 만든 설교자가 성도들을 보이지 않게 허약한 체질로 만들었다고 본다. 균형을 상실한 강단에서는 복음만 강조되고 율법의 중요성은 등한시되며, 믿음은 강조하되 순종은 가볍게 취급하고, 성공과 긍정만 난무하여 결국 값싼 은혜의 메시지만 남는다는 것이다.
'값싼 은혜'라는 경종(警鐘)의 말에는 은보 목사님의 목회 인생에서 말년에 깊이 터득한 참된 복음적 각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옥 목사님의 참된 제자라면, 오늘날 기독교회의 설교자가 성도들을 허약 체질로 만드는 복음의 변질, 말씀의 편식, 균형의 상실에 정작 깊이 연루되고 있다고 경고하시는 옥 목사님의 외침을 들을 귀가 응당 있어야만 할 것이다.
C. '2007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전해진 회개를 촉구하는 기념비적 설교에서
'값싼 은혜'는 순종의 행위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입만 가지고 믿음있다고 떠드는 천박함이며, 이것은 회개없는 강단설교의 복음변질에서 기인함을 옥 목사님은 정확히 인식하고 계셨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3:1~3 본문을 가지고 2007년 7월 8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7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전해진 은보 목사님의 메시지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이 설교는 사데교회(church in Sardis)를 향한 주님의 책망을 다룬 기념비적 설교였다. 그 일부만 인용한다. 볼드체는 필자가 강조한 것이다. 전문은 국민일보 기사(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4077595&cp=nv)를 참조할 것.
사데교회를 보면서 제가 두려워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일곱 별을 손에 쥐신 예수님께서 행위가 죽은 교회의 책임을 지도자에게 묻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수십 년 목회를 하면서 목사의 입장에 서면 이름은 요란하지만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을 저는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궁금하십니까? 이렇게 하면 됩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거나 말씀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키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복음이 얼마나 변질되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둔감해지면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름은 살아도 행위는 죽어질 수 있습니다.
청중은 원래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위에는 관심이 없고, 믿음만 가지고 떠드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는 무리들이 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행위가 죽은 사데교회를 향해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회개만이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똑같은 명령을 하고 계시다고 저는 믿습니다.
주지하듯이, 우리는 당시 옥목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설교자의 현실진단과 위기의식 뿐만 아니라 설교자 자신의 통렬(痛烈)한 자기반성과 회개를 목도할 수 있었다. '값싼 은혜'에 안주하는 무리들이 늘어가는 현실을 개탄해 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입만 살아있고 행위는 죽은 목회자였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고 가슴을 치고 회개하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결론은 이것이다. 은보 옥한흠 목사님에게 '값싼 은혜'라는 말은 '입으로는 살았지만 행위로는 죽은 기독교' 혹은 '참된 회개 없는 기독교'의 심장부를 향해 경고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전달하는 효과적인 언어적 도구였다. 특히 옥 목사님의 후기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값싼 은혜'라는 용어를 생전에 고인이 사용한 방식을 향후 보다 깊이 연구, 그 결과물을 출판하여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옥목사님의 자칭 영적 아들 혹은 제자라고 공언하는 기괴(奇怪)한 설교자와 맞닥뜨리고 있다. 천하가 아는 대로, 그의 이름은 '오정현'이다. 이 설교자는 자신이 입술로는 은보 옥한흠 목사님의 제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그분의 소중한 가르침 - '값싼 은혜'란 말로 적절히 표현될 수 있는 본질, 곧 회개없고 참된 회개의 열매(행위) 없는 죽은 기독교에 대한 주님의 경고 - 을 짓밟는다. 은보 목사님의 말년의 원숙한 사상과 설교의 키워드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뿌리채 뽑으려 하고 있다. 그 오정현씨의 변함없는 가르침을 다시 들어 보자.
값싼 은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짜 은혜를 알고 은혜에 대한 sense가 있는 사람이라면, 은혜를 함부로 평가절하하면 안됩니다.
오정현씨의 말대로라면, 옥한흠 목사님은 은혜에 대한 sense가 없다. 오정현씨의 설교가 참되다면, 옥 목사님은 은혜를 함부로 평가절하 한 것이다. 오정현씨에게 은보 목사님이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말인 '값싼 은혜'라는 용어에 특히 인생 말년에 천착(穿鑿)해 들어간 '진짜 은혜'를 알지 못한 문외한(門外漢)일 뿐이다.
오정현씨가 옥한흠 목사님의 핵심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아예 그런 가르침은 성립조차 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반박하고 있는 이상, 이 한가지만은 확실하다. 오정현씨, 당신은 옥한흠 목사님의 제자가 아니다.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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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성구(개역개정, KJV)
요한계시록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And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of the Laodiceans write; These things saith the Amen, the faithful and true witness,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of God;
요한계시록 3:1~3
사데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And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Sardis write; These things saith he that hath the seven Spirits of God, and the seven stars; I know thy works, that thou hast a name that thou livest, and art dead. Be watchful, and strengthen the things which remain, that are ready to die: for I have not found thy works perfect before God. Remember therefore how thou hast received and heard, and hold fast, and repent. If therefore thou shalt not watch, I will come on thee as a thief, and thou shalt not know what hour I will come upon thee.
P.S.
은보 옥한흠 목사님의 생애 말년의 원숙하고 통찰적인 은혜론 - '값싼 은혜'의 복음 변질에 대한 경고 - 에 대한 오정현씨의 설교를 통한 반박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닙니다. 아예 사랑의교회에서 그 소중한 가르침의 뿌리를 뽑으려는 듯 합니다. 그러나 옥 목사님의 가르침은 결코 근절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은 교회의 오래된 참된 스승들로부터 나왔으며 그 스승들의 배후에는 그들을 보내주신 참된 목자장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정현씨는 '값싼 은혜'라는 말에 늘상 넌더리를 냅니다. 그 하나의 증거로, 2013년 12월 8일 오정현씨의 주일설교를 비평한 졸고 "아직도 `값싼 은혜(cheap grace)`를 모른다고 잡아떼는 오정현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형식의 설교비평"이라는 글을 재게시합니다. 옥한흠 목사님과 완전히 다른 그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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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값싼 은혜(cheap grace)`를 모른다고 잡아떼는 오정현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형식의 설교비평
오정현씨, 안녕하세요. 저는 사랑넷 카페의 imagodei입니다. 그 동안 저의 설교비평 글들을 정독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그 동안 제가 사랑넷 카페에서 귀하의 설교를 비평하곤 하였지만, 오늘처럼 직접 귀하에게 전달되는 공개서한 형식으로 설교비평을 시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늘(2013. 12. 8.) 귀하의 주일예배 설교는 아주 엉망이었지만, 공예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귀하의 설교를 비평적으로 잘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강남예배당 마당에서 건축폐기물 쓰레기를 둘러싸고 찬 바람을 맞으면서 함께 기도하다 보면, 귀하의 아침 설교로 인해 메스꺼워진 제 속이 많이 풀립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행해진 귀하의 설교를 향후 차차 비평하겠지만, 이 공개서한 형식의 즉석 설교비평에서는 귀하가 잘 모른다고 잡아떼는 '값싼 은혜(cheap grace)'에 관해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 드리려고 주일 저녁 시간에 책상 앞에 잠깐 앉아 있습니다.
귀하는 오늘 "어떻게 감히 함부로 '값싼 은혜'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은혜가 값싼 싸구려가 될 수 있나? 은혜는 값싼 것이 없다."하시면서 회중을 향하여 소리치셨습니다. 아마 귀하에게 가해지는 다차원적 설교비평들 중에서 '값싼 은혜'를 전파한다는 예리한 비평을 의식하신 듯합니다. 예컨대, 몇주 전에 제가 이렇게 적었었죠.
필자는 이런 오씨의 태도를 "릭워렌스럽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단지, 필자 혼자만의 개인적 견해가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 <More than a Purpose>의 저자 Marshall Davis를 인용하겠다: "릭 워렌의 구원계획에서 무엇이 빠져 있는지 주목하라...워렌은 복음을 소개할 때.. 회개의 기초를 놓지 않는다. 죽은 행실에서 돌이키는 것도 없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요구도 없다....이 얼마나 수지맞는 장사인가....워렌이 보기에 경건한 슬픔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구도자 예배의 흥겨운 분위기를 망칠 것이다....이것은 값싼 은혜다....워렌은 죄 고백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다루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문제는 너무 오래 걸리고 복잡하고 고통스럽다."
마샬 데이비스 박사님을 인용한 위의 문단은, 귀하의 영적 스승인 릭 워렌(Rick Warren)에 대한 비평이자 귀하에 대한 비평이었는데, 이 말이 아주 눈에 거슬리셨나 봅니다. 이제는 '값싼 은혜'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은혜는 값싼 것이 없다는 말씀으로 싹 잡아떼시는군요. 귀하 뿐만 아니라 귀하의 영적 스승 릭 워렌을 감싸고 도시는군요.
그래서 오늘 귀하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서, 매우 중차대한 의미에서 은혜에도 값싼 것이 있으며, 따라서 '값싼 은혜(cheap grace)'라는 용어가 실제로 의미심장하고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비교적 소상히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잘 메모하세요. '값싼 은혜'라는 말을 사용한 분들이, 귀하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신성모독적 인물들이거나 무분별한 인물들이 결코 아님을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물론 마샬 데이비스 박사님도 영향력 있는 침례교 목사이자 지성인입니다. 지금이라도 성서와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려고 애쓴다면, 귀하가 회중을 향하여 기만적으로 내뿜는 말이 조금이라도 멈추어질텐데, 대체 언제까지 하나님의 회중을 향하여 거짓말하시겠습니까?
저는 귀하가 장로교회/개혁교회/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섬기기 위해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목사라고 하는 주장이 믿기지 않습니다.
오정현씨는 똑똑히 들으세요. 귀하는 오늘 "어떻게 감히 함부로 '값싼 은혜'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은혜가 값싼 싸구려가 될 수 있나? 은혜는 값싼 것이 없다."하시면서 회중을 향하여 감히 교회사의 참 스승들을 배신하는 기만적 언사를 반복하셨는데, 제가 귀하를 위해 '값싼 은혜'를 본격적으로 취급한 원전 출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귀하는 독일의 고백교회 소속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님이 저술하신 원전을 구해서 한번도 정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어떤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지 아예 모르는 것입니까? 아예 그 책을 구경도 못하신 겁니까?
1931~1932년에 구상하고 1937년에 출간한 디트리히 본회퍼의 <Nachfolge,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중요 부분을 제가 간략히 번역하여 보았습니다. 귀하가 독일어를 모를 것 같아서, 영어도 불편할 것 같아서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철천지원수다. 오늘 우리의 투쟁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것이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 상품, 헐값의 용서, 헐값의 위로, 헐값의 성만찬이다. 그것의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 쌓여 있어서 언제나 손쉽게 무한정 쏟아 내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그것은 대가나 값을 치르지 않고 받는 은혜다.... 사람들은 죄를 뉘우치지지도 않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세상은 자신의 죄를 덮어 줄 값싼 덮개를 교회에서 얻는다. 따라서 값싼 은혜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성육신)을 부정한다.
오정현씨, 이해가 되세요? 귀하가 최근까지 습관적으로 반복했던 말, '무한지평의 초월적/압도적 은혜'란 말은 실상은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 쌓여 있어서 언제난 손쉽게 무한정 쏟아지는 값싼 은혜를 말합니다. 표절, 거짓약속, 발뺌하기, 덮어씌우기 등을 반복하고도 충분히 보혈로 덮을 수 있는 '값싼 덮개'가 값싼 은혜입니다. 귀하의 이해를 돕기 위해, 좀더 본회퍼 목사님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 함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 함이다. 은혜가 홀로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 줄테니 모든 것이 그대로 머물러 있는 상태로 있어도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죄를 버리고 돌이키는 회개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기보다는 죄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값싼 은혜다. 값싼 은혜는 우리가 스스로 취한 은혜에 불과하다..... 싸구려 은혜는 그리스도를 뒤따름이 없는 은혜, 십자가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곧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에 불과하다..... 까마귀처럼 우리는 값싼 은혜라는 시체 주변에 모여들었고, 거기서 우리는 예수의 제자직을 말살하는 시체의 독(毒)을 받아 마셨다.
오정현씨는 지금까지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은혜가 아니라, '죄'를 의롭다 하는 (정당화하는) 값싼 은혜를 전파해 왔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귀하가 표절, 거짓약속, 발뺌하기, 덮어씌우기 등을 반복했으면서도 공동체를 훼손한 그 죄들을 공개 자백하지 않고 단지 일회성 이벤트로 무마하거나 어물쩍 넘어가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은 귀하가 스스로 취한 싸구려 은혜에 불과하며,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회개의 열매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결국 귀하의 교리적으로 불건전한 가르침과 행실은 예수님을 뒤따르는 제자직을 말살하기에 이르렀고, 귀하의 참된 양심도 감히 부정하지 못하다시피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줄곧 거스려 왔습니다. 잘못된 회개 교리는 잘못된 영적 체험을 가져왔습니다.
그렇다면, 본회퍼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값비싼 은혜(costly grace),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에게 임하는 참된 은혜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원전을 구해서 세심하게 잘 읽어보세요. 독일어판이나 영어판을 읽어내기 힘들면, 한국어 번역판도 있을테니 좀 구해서 읽어보고 설교하세요. 무슨 망신입니까.
하기야, 귀하가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을 존경하기도 어렵겠습니다. 이분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에서 안락하게 신학을 가르치며 활동할 수 있었던 천재적 신학자였는데, 당시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하여 독일에서 반나치운동을 하다가 강제수용소에서 순교자로 사형을 당했기 때문이죠. 수천억짜리 호화 건물을 포기하지 못하고, 진정한 기독교 사역을 위한 회개와 청빈의 제자도를 구현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는 귀하가 이분이 설파하신 '값싼 은혜' vs. '값비싼 은혜'의 엄청난 간극의 대립구도를 어찌 이해하고 소화하여 설교하겠습니까.
맘몬의 건축물을 우상화하는 귀하가 오늘 주일예배에서 세례식을 집례하면서 순교적 신앙 운운하셨는데, 이는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가당(可當)하지 않은 비현실적 언행에 불과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친애하는 오정현씨. '값싼 은혜'의 안락한 달콤함과 치명적 오류에 빠져든 사람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셨던 선각자들은 그외에도 많이 계십니다.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 그리스도의 심오한 부르심에 대하여 역사상 가장 탁월한 묵상의 경지에 도달하고 이를 실천한 대표적인 분이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셨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한분만 더 가르쳐드리죠. 이번에는 귀하도 그 이름을 아는 분을 알려드림으로써 더이상 "나는 값싼 은혜가 뭔지 모른다. 그런 건 없다"고 발뺌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귀하가 6개월 자숙을 마치고 복귀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일설교(2013. 10. 20.)에서 한번 인용하셨던 에이든 토저(A. W. Tozer) 목사님입니다. 당시 imagodei 설교비평에서 토저 목사님 원전의 의도를 오해하셨던 귀하의 설교의 오류를 지적하였던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토저 목사님은 여러 저서에서, 특히 <Who Put Jesus on the Cross?> 등에서 '값싼 복음' 혹은 '값싼 위로'의 위험성에 관해 경고하고 계십니다. 번역본도 있으니까 사서 읽으시고, 값싼 은혜, 값싼 복음, 값싼 위로 등과 같은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며, 귀하의 사역에 켜져 있는 적신호를 어떤 각도에서 진단하고 있는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어디가서 이제는 절대 이런 식으로 설교하지 마세요. "어떻게 감히 함부로 '값싼 은혜'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은혜가 값싼 싸구려가 될 수 있나? 은혜는 값싼 것이 없다."
기독교 신학을 가슴으로 삶으로 해내지 못하면 귀하처럼 됩니다. 게다가 기독교 원전을 읽지 않으면 더욱 용감해집니다. 이해가 안되시면 메일이나 쪽지주시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값싼 은혜'의 가장 전형적 사례가 귀하의 표절설교입니다. 설교준비의 진액을 짜내기 싫어서 남의 것을 인용없이 슬며시 가져와서 설교에 보태는 행동, 바로 그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드는 대표적 행동입니다. 남의 모티브와 창조적 표현을 귀하의 것인양 훔쳐와서 '이 표절로도 회중이 은혜를 받을 수 있겠지!'라고 감히 생각할 수 있는 그 태도가 싸구려/헐값/떠리로서 귀하가 스스로 취한 값싼 은혜의 복음인 것입니다.
귀하는 논문표절로 6개월 자숙 및 복귀 후에도, 이미 여러 차례 표절했거나 부적절하게 인용했다는 의심을 샀습니다. 물론 이에 관하여 변명도 적절한 해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 목사님 저서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의 표절 (뉴스앤조이 보도)
- 데이비드 제러마이어(David Jeremiah) 목사님의 공의-자비-은혜 도식에 따른 탕자의 비유 해석 표절 의혹
- 대천덕(R. A. Torrey, III) 신부님의 성서적 토지경제 사상과 해방후 농지개혁의 성과에 대한 해석 표절 의혹
- 마빈 데이트(Marvin Date) 교수의 시편 100편 주석에 있지도 않은 표현을 지어낸 잘못된 인용 의혹
귀하에게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값싼 은혜'를 경고하는 성서적, 신학적 성찰이 정말 잘 이해 안되시면, 최근까지도 귀하가 용인하고 있는 표절설교 류의 설교행태야말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제자도'를 누락한 솜사탕 복음이자 값싼 은혜의 생생한 증거라고 보시면 정확할 것입니다. 그런 표절설교, 누더기 설교는 골프치면서도 준비할 수 있으니까요.
이만 줄이고, 금주 연속 설교비평을 통해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은 진실, 진리는 입력이 안되어 페이퍼를 보고 읽어야 하고, 거짓은 본성이라 청산 유수로 말하네요.제직회도 아래는 싸우도록 나두고 위에서 혼자 마이크잡고 가면쓴 발언은 청산유수~~~
지난 수요일에는 갈멜산에서 값싼 은혜를 간구하며 미친듯이 춤을 추며 주문을 외며 간구하는 이교도들의 제사의식을 서초센터에서 본 것 같아 마음이 무척 무거웠습니다. 거기에 초두에 제자훈련 받은 교회답게 회의를 하자던 그는 능수능란하게 거짖 증언과 왜곡된 내용으로 점철된 분식 제직회를 진행하여 또 다시 자충수를 우리에게 선물할 것 같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값싼 은혜를 추구하여 왔지만 이번 일을 통하여 진정한 주님의 길로 다시 들어 갈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귀한 글 거듭 감사드립니다.
옥한흠 목사님 설교를 80년대부터 계속 들어오셨던 분이라면, 오정현 목사님 설교 들으면 정말.... 이런 말 하면 뭐하지만 객관적으로 아무리 주의깊게 들으려고 해도 수준이 너무너무 떨어집니다. 설교 준비하지 않은 티가 엄청나게 납니다. 있어보이려고 어려운 용어만 남발하고 뻔한 추상적인 결론들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 예화.... 옥한흠 목사님은 매주 설교 준비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괴롭다고 할 정도로 혼신을 다해 말씀을 준비하셨던 분인데.... 참.... 정말 어쩌다가 사랑의교회가 이렇게 10년만에 나락하게 되었을까요 정말 믿기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