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블린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과자를 구워왔다. 근 반세기동안 그녀는 특별한 과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고, 매번 실패했다. 이제 그녀의 눈가에는 잔주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부쩍 마음이 급해져갔다. 과자 만들기는 계속되었고 근래에는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그것은 제법 어려운 작품으로 성공 여부 역시 미지수이다.
썩 만족할 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우울하다. 과자 만들기에 대한 높은 자부심만으로는 의욕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에블린의 섬세한 손끝에서 나온 사랑이 막 오븐에서 나온 쿠키에 조각되는 작업은 늘 그녀를 긴장시킨다. 하나의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고충을 당사자가 아니면 그 누가 알겠는가.
쿠키를 조각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바로 에블린이기 때문에 이런 독특한 시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것은 세계 어느 요리사의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었다. 감히 상상할 수도, 시도할 수도 없는 새로운 조리법! 에블린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오늘도 부엌에 들어섰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에블린은 시대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바닥청소 겸용의 중세풍 롱드레스를 즐겨 입는다. 그녀가 부엌에 들어선 순간부터 늘어진 치맛자락은 바닥을 쓸고 다녔다. 사방으로 먼지와 밀가루가 날렸다. 어제 저녁, 1미터 30센티 크기의 머핀을 실패한 후 부엌 청소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제뿐 아니라 이번 주 내내 공기를 타고 흐르는 먼지덩이를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게을러빠진 머슴 탓이다.
그녀는 실패한 작품을 식도로 넘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므로 음식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머핀의 운명은 뻔한 것이었다. 머핀은 창고에 갇혀 다른 쿠키들과 부대끼며 곰팡이들에게 생명을 내어줄 것이다. 그러다가 완전히 썩어버리면 잘게 부수어 숲의 거름으로 뿌려질 것이다. 부서지기 전에 숲으로 탈출하는 과자들도 종종 있지만...... 아무튼 성 뒤편의 그 무시무시한 숲은 다 에블린의 쿠키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마드레느- 이 잠꾸러기야- 빨리 나오지 못해?"
에블린이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성안을 떠돌며 메아리를 남겼다.
부엌 아궁이 옆의 특대형 오븐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니~아옹~"
오븐의 문이 안쪽으로부터 슬그머니 열림과 동시에 기괴한 울음소리가 새어나온다.
흉측하게 생긴 대형 고양이!
오븐에서 기어나온 고양이는 몸집이 1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망할 녀석! 자꾸 게으름을 떨면 확 잡아먹어 버릴 테다! 구해오라고 한 재료는 다 구해왔니?"
에블린이 탁자를 탁탁 쳐가며 곱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양이 마드레느는 큰 눈을 두어 번 끔벅거리다가 곧 그 거구를 이끌고 아궁이 반대편에 있는 식료품 창고로 향했다. 고양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에서 레몬 향이 피어올랐다. 날카로운 눈초리가 식료품 창고에 몸의 절반을 밀어 넣고 부스럭거리는 마드레느의 엉덩이를 쏘아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자 마드레느가 입으로 낡은 포대 자루를 물고 뒷걸음질친다. 질질 끌려나오는 두툼한 포대 안에서 덜거덕거리며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마드레느는 그것을 에블린의 발가에 밀어 놓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문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나가는 것이었다.
"야- 보조, 어디 가?"
에블린이 소리쳤다.
"이야아아옹~"
마드레느는 늘어지는 하품으로 대꾸하고는 부엌을 나가 버렸다.
"저 말귀도 못 알아듣는 녀석! 저 이름이 아까운 녀석! 하루빨리 잡아먹어 버려야 할 텐데."
에블린은 투덜거리며 포대 속의 재료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어설프게 봉한 작은 포대 한 개와 유리병이 대, 중, 소로 나왔다. 그 속엔 각각 붉은 액체, 투명 액체, 흰색 가루가 들어있었다. 작은 포대에 들어있는 것은 적갈색의 가루와 건조한 고기조각이었는데 가공 상태가 좋지 않은데다, 비리고 불쾌한 냄새까지 나고 있었다.
"흥! 그래도 가짓수는 다 맞춰 놨구먼!"
그녀는 작은 포대를 탁자 중앙으로 밀어놓으며 중얼거렸다. 탁자 위의 재료를 속으로 다시 한번 셈을 한 후 앞치마를 둘렀다. 흰색이었을 앞치마는 더러운 얼룩으로 본래의 색을 찾아볼 수 없었고 비위생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붙이는 것으로 에블린의 요리는 시작되었다.
먼저 엄청 큰솥에 밀가루 한 포대를 다 쏟는다. 솥 주변으로 반죽에 필요한 재료들이 차례로 준비되었다. 아궁이엔 중형 냄비가 올려지고 그 안에선 버터가 녹는다. 눌어붙지 않게 계속 주걱으로 저어주어야 한다. 중탕 작업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번엔 액체가 되어 버린 버터를 적당한 온도가 될 때까지 식힌 후, 그 안에 유리병에 들어있던 흰 가루와 설탕을 쏟고 잘 젖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팔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계속 젖다보면 버터는 미색의 크림이 된다. 에블린은 그 안에 계란을 깨 넣었다. 수십 개의 계란이 버터크림 속에 들어가고 개중에는 껍데기가 딸려 들어간 것도 있었지만 요리사는 그것을 무시하였다. 거품기를 다른 손에 바꿔 들었다. 그리고 남은 팔마저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계속 저어댔다. 얼굴 위로 땀방울이 굴렀다. 버터의 크림화가 끝나자 이번엔 신속하게 반죽 코너로 몸을 이동시켰다. 버터 크림이 도로 풀어지기 전에 반죽을 해야 한다.
에블린은 탁자 위의 검붉은 액체가 든 유리병을 들어보았다. 버터를 젖느라 너무 고생한 두 팔이 후들거렸고 액체가 상하좌우로 파도를 쳤다. 그녀는 뚜껑을 열고 코를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인상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으에엑- 신선하지가 못하잖아!!"
투덜거리며 병을 눈 높이까지 올려 쳐다보았더니 역시나 액체 윗부분에 기름처럼 보이는 응고물질이 떠있었다. 자유수영 중인 정체불명의 이물질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에블린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그것을 쳐다보다가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해보았다.
자고로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신선한 재료와 요리사의 솜씨, 그리고 요리에 대한 사랑, 정성, 즐거운 생각....이라는 게 그녀의 요리철학이었다. 그렇기에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았다. 오늘은 부엌에 들어오면서부터 계속 찡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부엌은 지저분했고 수면부족으로 몸은 찌뿌둥했다. 마드레느가 준비한 재료는 신선하지도 않다. 게다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어제의 머핀은 근 10여 년 간의 작품 중 최악의 실패작이었다. 때문에 부엌에 들어선 후에도 기분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녀는 오늘도 과자를 구울 것이며, 위와 같은 요리철학이 있는 한 기분을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에블린, 에블린, 스마일, 스마일, 즐거운 생각! 아아, 즐겁다! 너무 즐겁다! 오늘은 꼭 성공할 것만 같다아~"
에블린은 성스런 밀가루 반죽 재료 앞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자기최면을 걸었다. 중얼거리는 그녀의 입이 조금씩 자연스럽게 미소로 바뀌어갔다.
"오늘은 꼭 성공할거야! 분명히 그럴 거야!"
최면효과인지 어느새 머릿속은 즐거운 상상과 사랑과 작품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들어찼다. 이제야 흡족한 숨을 들이쉬었다.
밀가루가 담긴 솥에 향기 좋은 백포도주 한 병과 우유가 부어졌다. 백포도주의 투명한 색은 우유가 들어가며 급격히 탁해졌다. 그것들은 밀가루와 섞이며 점성을 지니게 되었다. 에블린의 손은 물론 빼빼 마른 팔뚝에까지 반죽이 달라붙었다. 그래도 솥바닥에 손이 닿지 않았고, 재료를 골고루 섞기 위해선 몸을 더 숙여야 했다.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잠시 반죽 치대던 손놀림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띵~동~
손님이 왔다.
"마아드레에느으-"
에블린은 성 어딘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1초..2초..3초..4초......마드레느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드레에느~ 어디 있니? 누구 왔어. 빨리 나가봐아-"
역시 고양이의 응답은 없었다. 분명 어딘가에서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게으름의 표본 같으니!
띵동띵동띵동~~~~
초인종이 계속 울렸다. 적막한 이 성에서는 소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에이~"
에블린은 하는 수 없이 반죽 속에서 손을 빼냈다. 오른손과 팔에 붙은 반죽을 주걱으로 긁어낸 후 허리를 폈다. 곧 닦여나갈 손의 반죽 찌꺼기가 아깝게 생각되며 더불어, 입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던 더러운 앞치마에 손을 닦아야 한다는 점이 꺼림칙해졌다.
한 손에 앞치마 자락을 잡고 돌아서려는데 긴 치맛자락이 밟혔다.
휘청~
그녀는 아차 하며 재빨리 다리에 힘을 주었고 순간 중심이 잡히는가 했지만 치맛자락은 여전히 발 밑에서 꿈틀댔다. 몸이 다시 한쪽으로 쏠리며 탁자에 부딪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에블린의 몸도, 탁자도 기우뚱했다. 검붉은 액체의 병도 기우뚱했다.
"어엇-!"
에블린은 덜 닦여진 손을 황급히 내밀었다. 검붉은 액체의 병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녀의 재빠르고 신속한 손이 병을 받아냈다. 뚜껑이 열린 관계로 액체의 일부는 공중으로 치솟았고 이번에도 신속하게 얼굴로 받아냈다. 출렁거리는 병 속엔 아직도 많은 양의 액체가 생존해 있었다.
"제엔장!"
그녀는 거칠게 내뱉었다. 이 액체는 오늘의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였다. 바닥에 몽땅 쏟아 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었다. 에블린은 병을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내려놓은 후 뚜껑을 꼭 닫았다. 그리고 나서야 앞치마로 얼굴을 닦아냈다.
앞치마가 컬러플하다. 얼굴에는 액체의 비릿한 잔향이 남았다.
띵동띵동~~~~~띵띵동~~~~
에블린은 초인종 소리가 듣기 싫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반쯤 열린 부엌문을 지나,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는 젊은 에블린의 흉상,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삭막한 인테리어의 거실을 가로질렀다.
띠~~~~~~~~~잉동~~~
신경을 자극하는 음향이 성안에 가득 들어찼다.
"나가요, 나가! 기다려요!"
그녀가 짜증스러워 하며 문고리를 돌렸다. 현관 앞에는 커다란 파란 색 가방을 가슴에 움켜쥔 30대 중반의 남자가 어스름 속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헉!"
그는 문이 열리자 흠칫 놀라며 뒷걸음쳤다. 그의 시선은 에블린의 컬러플 앞치마에 가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소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엉덩이를 쭉 빼고 몸도 반쯤 틀어 버린 상태에서 어설픈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포올!"
에블린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내가 당신의 집....아니, 성을 찾아온 이유는.....그러니까.....왜 왔죠?"
폴이 되려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이, 정신 차려, 폴."
"아, 에블린. 맞아요, 난 편지를 배달하러 왔어요."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폴은 이 마을 우편배달부였고 비공식 소식통이었고 엄청난 수다쟁이였다. 그는 일주일에 한번씩 이곳에 찾아와 뭉치편지를 건네주고 또한 마을에 떠도는 소문을 들려주었다. 편지 한 묶음을 건네는 그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에블린은 안쓰러워 보이는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서 편지 묶음을 낚아챘다.
"이 일 시작한지 한 10년 되나?"
"12년째예요."
폴은 사방을 부산스럽게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이젠 적응할 때도 됐잖아. 매번 올 때마다 섬뜩해 하면 어떡해?"
"하지만 에블린, 어쩐지..... 이 성은 으스스해요. 한낮인데도 너무 어둡고..."
"덩굴 때문에 그렇지, 뭐!"
에블린의 성은 울타리에서 정문까지 가시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는 고풍스럽고 멋있지 않느냐고 주장했지만 공포스러워 못살겠다고 하는 마을 사람들의 여론에 밀려 관청에선 '도시환경저해'라는 명목으로 14년 전에 가시덩굴을 뿌리째 뽑아 버리는 대공사를 감행했다. 물론 그녀는 사유재산을 침해했다며 정부에 고소장을 날렸고, 얼마 후 도시계발담당자와 적당히 합의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살아남은 성 앞쪽의 가시덩굴은, 사망한 뒤편의 동료들의 몫까지 열심히 자라나, 꾸준하게 도시환경을 저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 주변은 언제나 일조량이 형편없었다. 그나마 현관까지의 10여 미터는 아치형의 철망을 세워 덩굴을 들어올렸고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 자주 가지를 쳐주었다. 폴이 편지를 전해주게 된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그런데 가시덩굴이 뽑히고 아치형의 철망이 그것들을 들어올리게 된 14년 전에, 에블린이 어떻게 덩굴을 헤치고 성을 나와 돌아다닐 수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고양이도 너무 사나워요...."
폴이 두려움이 가득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마드레느가 사납다고?"
폴은 여전히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얼마 전에 각종 시민단체의 단합회가 있었는데, 당신에게 전해달라는 구두전달사항이 있어요. 부녀회 협의사항인데요..... 그 고양이, 시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 달래요. 다들 무서워해요."
"마드레느가 뭐가 무서워?"
에블린이 영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덩치가 크잖아요. 무식하게 생겼고요. 그러다 사람이라도 해치게 되면 어쩌시려구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에블린은 확고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뜨끔했다. 모르고 있던 것이 아니다.
"지난주에 시내에서 봤는데 입에 바구니를 물고 식료품점으로 들어가더라구요. 나도 놀랬지만, 식료품점 주인은 더 놀랬을 거예요. 그가 바구니 속의 식료품 목록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분명히 총으로 쏴버렸겠죠!"
폴은 적잖이 흥분해서 모션까지 취하며 떠들었다. 그의 말은 마드레느의 외관이 그 정도로 흉하고 괴물 같아 보인다는 것이었겠지만 에블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생긴 게 그러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보다, 에블린은 지금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식료품 목록을 적어준 적이 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근래에 장보기를 두세 번 정도 마드레느에게 떠넘기긴 했지만 식품목록을 구두로만 떠들어댔을 뿐 친절하게 쪽지에 적어주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애완동물이 바구니 물고 심부름 가는 게 이상해?"
"이상하고 말고요. 그런 사이즈의 애완고양이가 어딨어요? 에블린, 정신차려요! 미시시피에선 어느 애완견이 미쳐서 자기 주인을 물어 죽였대요! 뉴스에서 봤다니까요!"
폴은 목소리를 높였다 낮췄다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의 집배원가방은 어느새 흉부에서 둔부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에블린은 골치가 아픈 듯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며 계속되는 이야기를 들었다. 습기가 증발해버린 밀가루가 그녀의 이마와 관자놀이에 묻었다.
"진짜 놀라운 얘기 해드릴까요? 공포 그 자체의 이야기....지구 멸망의 이야기랄까요! 놀라면 안돼요, 에블린. 글쎄 그 녀석이 식료품점에 들르던 그 날! ......당신의 고양이가 글쎄 '해변의 여인'이란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가더라고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어떻게 고양이가 유행가를 부르죠? 그것도 '해변의 여인'을요."
폴은 강조에 강조를 거듭했다. '해변의 여인'은 요즘 유행하는 사분의 삼박자, 컨트리송이었다. 그의 눈빛은 '고양이 종족이 인간을 지배할 날도 얼마 안 남았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좀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우리 마드레느는 아무 문제없어. 폴이 잘못 들은 거야. 그 녀석은 진짜 평범한 고양이라고. 노래라니! 말도 안 돼!"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조심하세요. 당신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예전에 내 친구가 성 뒤편의 숲에서 사냥을 하다가 봤는데요. 그 괴물 같은 고양이가 여우를 잡아먹고 있더래요. 아이고, 끔찍해라. 아니, 곰이었던가?"
"이봐이봐. 거긴 내 사유진데 감히 어떤 녀석이 거기서 사냥을 하더라고?"
"합! 그....그럼 이만 가볼게요, 에블린!"
폴이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획 돌아섰다.
"폴. 나 아직 사인 안 했어!"
"아, 그렇군요."
그가 다시 다가와 수령증과 펜을 내밀었다. 에블린은 손을 앞치마에 북북 문지르고는 펜을 집어들었다.
"근데....에블린.... 뭐 하나 물어봐도 되요?"
사인을 끝내자 폴이 물었다.
"이거 피죠?"
폴은 그녀의 앞치마에 묻은 붉은 얼룩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자신이 질문을 하는 것이면서도 상당히 거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디서부터 비롯된 피인지, 나름대로 유추하고 있을 것이다.
"부녀회 소원대로 마드레느 녀석의 배를 가르고 있었어! 점심땐데 들어와서 내장탕이라도 한 그릇 먹고 가겠나? 아님 선지국이라도..."
"아...아뇨....!"
그는 팔을 휘두르며 거절했다.
"그럼 잘 가게."
에블린은 문을 닫고 잠시 문에 이마를 대고 서 있었다. 기가 차서 머리까지 띵~하게 느껴졌다.
'하이고~ 마드레느 녀석! 안 죽으려고 발악을 했구만! 감히 날 속이고 고양이 흉내를 내?'
그러나 에블린도 이미 마드레느를 머슴 취급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마드레느는 고양이 이상의 일을 하고 있었다. 곧 에블린은 부엌 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편지를 차례로 넘겨보았다.
".....귀하의 노후보장연금 불입금이 이 달로 종료됨을 알려 드립니다.....어쩌고저쩌고......그리하여 원금과 이자를 합산하여.........버러버러버러.......일시금도 가능하오나 연금수령일 경우에 한해..........누계이율이 적용.............가산금은 세금공제 이전의......뭐라는 거야? .....귀하는 55세부터 노후보장연금을 매달.......에게! 얼마 안 되잖아! ....웃기는군! 내 나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얼간이들!"
에블린은 관심 없다는 듯 한 손으로 그것을 구겨 뒤로 던졌는데 두어 걸음쯤 걷다가 다시 돌아서고 말았다. 구겨진 노후연금청구서가 저만치에 떨어져 있었다. 에블린은 그것을 주어 도로 잘 펴서 앞주머니에 넣었다. 일시불로 타서 이 기회에 전자동 거품기를 살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부엌까지 도착하는 동안 여러 통의 편지와 청구서와 광고지가 바닥에 버려졌다. 에블린은 지저분해진 바닥을 스윽 쳐다보며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마드레느- 너 이 근처 어딘가 있는 거 다 알아. 잔머리 굴리지 말고 나와서 거실 말끔히 청소해 놔!"
그녀는 부엌문을 소리내어 닫았다. 여전히 마드레느의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과자가 다 구워질 무렵이면 거실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을 것이다. 주인이 시킨 일은 꼭 하는 마드레느였다.
사실 그녀가 마드레느를 지금껏 살려두었던 이유는, 그가 말 잘 듣는 '고양이'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고양이의 탈을 쓴 인간 같은 녀석이라면 당연히 죽어야했다. 그것은 완벽한 미완성품, 실패작이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고작 야홍~ 밖에 안 하는 녀석이 밖에 나가선 '해변의 여인'을 불러? 영악한 녀석!"
마드레느가 인간의 말을 하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분명히 유창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시 반죽 통에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심기일전하여 요리 만들기에 박차를 가했다.
마드레느가 준비해온 붉은 액체, 투명 액체가 반죽 속에 깨끗이 부어졌다. 에블린은 5분쯤 반죽을 치댔고 맨 먼저 만들어 놓은 크림화 버터를 그곳에 넣었다. 크림은 이미 상당량 풀어져 버렸다. 폴과의 수다가 길었던 탓이리라. 이제 흰 밀가루가 액체와 크림과 완벽히 섞일 때까지 가볍게 치대주면 되는 것이다.
'음~ 향기는 그럴싸한데....'
반죽에선 와인 향이 났다. 팬에 담아 굽기만 하면 되나? 뭔가 잊은 게 있었다. 재료가 하나 정도는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그게 뭐지?
에블린은 일단 찬장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딱지가 붙은 갖은 양념통과 유리병이 보였다. 오른쪽 맨 앞줄에 '베이킹파우더'와 '구매 요망'이란 딱지가 붙은 병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앗~"
베이킹파우더가 빠진 것이다. 그녀는 성급히 병을 들어보았다. 베이킹파우더가 아주 조금 남아있었다.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어쩌지?'
직접 장을 보러 나가지 않으니 이런 필수재료가 떨어지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에블린은 부엌 구석구석으로 눈을 돌렸다. 가루비누라도 있으면 대체용으로 넣기라도 하겠는데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결국 적은 양밖에 쓰이질 않지만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이 재료는 포기하고 그냥 있는 반죽으로 나름대로의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름 10센티미터의 구체 하나와 둥글고 긴 원통 네 개와 기타 찌그러진 반죽 두 덩어리를 만들어 탁자 위 철판에 올려놓고 특대형 오븐 상, 하에 나누어 넣었다. 오븐 온도는 100℃, 시간은 4시간 45분. 속까지 골고루 타게 30분마다 쿠키의 상하위치를 돌려놓아야 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기다림과 주문의 시간인 것이다.
에블린은 탁자 위를 깨끗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릇을 닦고 행주질을 하고, 먼지 쌓인 바닥 청소도 했다.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고 깨끗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다시 부엌으로 돌아온 그녀의 손엔 커다란 연장통이 들려져 있었다. 에블린은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난로 옆에서 의자를 가지고 와 정숙한 자세로 탁자 앞에 앉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지난 50년 간의 요리인생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그 동안 집에 처박혀 요리만 하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세월을 떠나보냈다. 친구도 잘 만나지 않고 계 모임도 안 나가고 집회도 여러 번 빠져서 대인관계도 예전같지 않다. 가산은 또 얼마나 탕진했던가. 그리고 얼마나 외로웠던가. 이제 에블린에게 남은 건 본인소유의 이 성과 뒤편의 공포의 숲과 특대형 오븐과 각종연체고지서, 그리고 능력의 한계를 알 수 없는 고양이 마드레느 뿐이었다. 오늘의 이 쿠키가 완성된다면 소유물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쿠키의 완성은 에블린에게 있어선 소유물의 의미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에블린의 입이 열리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느끼는 듯, 중얼거리는 듯,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음색이었다. 그러나 곧 중간의 음색과 발음을 찾아갔다. 마치 음악의 리듬에 춤을 추듯 그녀가 쏟아 내는 말들은 음률에 맞추어 문장으로 바뀌어갔다. 그렇게 계속 중얼거리며 남은 세 시간을 기다렸다. 가끔 오븐을 열고 쿠키의 위치를 바꿔주는 과정에서도 중얼거림은 계속되었다. 시간 조절기의 바늘이 '0'을 가리키며 '뗑~' 하는 소리가 났다. 이미 한참 전부터 닫힌 오븐 안쪽에서 탄내가 새어나왔다. 에블린은 세 시간째 쉬지 않고 주문을 외웠고 쿠키를 오븐에서 꺼내 탁자 위 철망 위에 내려놓을 때도 입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일곱 조각의 덩어리 쿠키가 철망 위에서 탄내와 희뿌연 김을 쏟아냈다. 에블린은 그제야 10분쯤 입을 다물었다. 쿠키는 전부 다 탔다. 숯이 될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라면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진한 갈색이랄까. 그보다 훨씬 진한 색인 것 같은데, 구리빛? 어쨌든 첨가된 재료를 생각해볼 때 정상적인 쿠키 색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구워진 정도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공구함을 열어 그 안에서 칼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찰흙 공예 때 쓰이는 '일자'형 조각칼이었다. 조각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볼품 없는 쿠키 덩어리를 멋있게 만들 차례였다. 그녀는 잠시 멈추었던 읊조림을 다시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구체의 쿠키에 칼끝이 다았다.
작품의 형체는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가고 있었지만 보기에는 형편없었다. 일곱 조각의 쿠키에 모양이 가해지고 이제 남은 일은 이것들을 한 덩어리로 붙이는 일이었다. 역시 아교풀이 최고였다. 강력 본드도 마음에 들긴 하지만 언젠가 손에 붙어 살점이 떼어내야만 했던 끔찍한 사건 이후 강력본드는 더 이상 이 성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두어 시간이 더 지나서야 일곱 덩어리를 하나로 만드는 대작업을 끝마칠 수 있었다. 작품이 완성된 것이다. 에블린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바라보다가 지금까지 중얼거리던 알 수 없는 말을 완전히 멈추었다. 그것은 그녀만의 비법이랄까..... 이렇게 해서 특대형 쿠키는 생명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나의 미적 감각은 역시...... 형편없어!'
쿠키를 보며 생각했다. 1미터 50센티미터는 될 듯 보이는 이 쿠키는 누가 보아도 인간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눈코입은 제대로 달렸다지만 전체적으로 볼 땐 균형감도 떨어지고, 훌륭한 조각품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탁자 위에 누워있던 쿠키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구형의 머리가 왼쪽으로 돌더니 에블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에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쿠키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완전히 일어나 서서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부스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드디어 완성해 낸 거야! 난 영혼을 가진 인간을 만들어냈어. 넌 이제 나의 친구가 되는 거야. 어때? 걸을 만 하지? 자, 이제부터 넌 인간이야. 내가 좋은 옷도 입혀주고 공부도 시켜줄게. 나와 시장도 다니고, 연극도 보러 가고...그래! 보름달이 뜨면 집회에도 데려가 줄게. 모두들 널 좋아할 거야. 내가 너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어. 그러니 넌 영원히 내 곁에 남아 날 외로움에서 구해줘야 하는 거야! 알겠니? 자, 이제 내 이름을 불러봐! 어서!! '에블린~'하고 말해봐!"
에블린은 감격에 겨워 말했다. 쿠키인간은 2~3초쯤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멍!"
"............!"
".........멍멍~"
"............!!!!"
에블린은 휘청거렸다.
"오 마이 갓!"
그녀는 자신의 신분도 망각한 채 이율배반적으로 신을 입에 담고 말았다.
"오마이갓오마이갓! 말도 안 돼! 겨우 완성했다고 생각했는데.......틀렸어.....틀려버렸어...........처음부터 재료가 틀렸어!! 이럴쑤우가~"
그녀는 절규했다.
"멍~ 킹...키잉~"
쿠키인간이 걱정스러웠는지 신음소리를 냈다. 에블린은 쿠키인간을 쳐다보았다. 쿠키인간의 눈이 짜증나게도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꼬리가 있었음 좋았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쿠키인간은 그것대신 오른쪽 다리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것도 실패였다. 재료를 잘못 구해온 마드레느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녀석이 일부로 그런 것일까? 인간이 생기면 그나마 고양이로서의 삶도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진짜로 고양이라 잘못 구해온 것일까? 그럴 리 없다. '해변의 여인' 사건을 잊으면 안 된다.
에블린은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어쨌거나 지금은 이 인간의 탈을 쓴 멍멍이 쿠키를 처리해야 했다. 그녀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매만지고 어깨와 팔에 묻은 과자부스러기를 떨어냈다.
"괜찮아. 다시 만들면 돼. 재료도 다시 구할 거야. 신선한 것으로....내가 직접! 그래! 이번엔 진짜 조각가도 같이 잡아와서 멋진 인간을 만들어야지!"
"멍멍멍~"
"그래, 멍멍아. 넌 오늘부터 마드레느와 함께 창고에서 놀거라. 영원히....!"
"멍멍멍멍~"
쿠키인간은 수많은 부스러기를 떨어뜨리며 부엌 안을 깡충거리며 뛰어다녔다. 그를 바라보는 에블린의 눈빛은 사악하게 빛났다.
마녀 에블린은 오늘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실패작을 식도로 넘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칭 박애주의자 마녀 에블린은 내일도 멋진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설 것이다.
첫댓글 [러브쿠키]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여러 시점으로 구상해서 쓰고 있는 건데 옴니버스 형식이랄까요.
좀... 감동해버렸습니다. 머엉하니 입을 벌리고 읽었다고나 할까요;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