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막집 가학(家學)
박주병
40여 년 전의 옛날 얘기를 해볼까 한다.
새로 부임한 어느 중앙행장기관의 장이 지방을 초도순시하던 중 평지에서 옥을 주은 듯 상기되어 딱 한 사람 P를 거명했다. 대통령 앞에 브리핑을 할 어떤 과제를 내어주며 P를 위시한 몇 사람이 이를 연구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명을 받은 K는 ‘P를 위시한’이란 말에 깜짝 놀랐다. 어디 보낼 곳이 그리 없어 하필, 옛날에 200여 명이나 귀양살이한 황원(荒遠)에 처박아 놓았던 P를 부랴부랴 중앙으로 불러올려 P를 포함한 연구반을 네 개의 부문으로 편성했다. P에게는 네 개 부문 중 가장 논리적이고 철학적이어야 할 첫째 부문을 맡겼다. 나무에 비기면 뿌리, 문중으로 치면 종가다. 일이 마무리 되자 K는 연구반의 부문별 대표 네 사람을 대동하고 기관장 면전에서 연구 결과를 부문별로 보고하면서 첫째 부문인 P의 실적은 이를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P가 담당한 첫째 부문은 브리핑의 맨 앞에 두어야 할 성질의 것인데도 이를 누락시킨 거다. 이것은 절대로 실수가 아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우등생을 교사는 모를 리가 없는 법이 아닌가? P의 급부상이 K는 미웠던 거다.
세월이 흘러 K가 기관장이 되었다. 본부에 고위간부 자리가 하나 비었다. P는 그 부서에 근무한 경력도 있고 딱히 경쟁이 될 만한 인물도 보이지 않고 해서 은근히 기대를 했지만 K는, 주막집 가학으로 습득한 만두 빚기의 달인 K2를 기용했다. 인사 참모 H가, “P는 천재성이 엿보이지만 규격화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란 말을 K 스스로 P의 대학 동창한테 얘기했다. P의 귀에 들어가란 소리가 아닌가. K는 내심 K2를 점찍어놓고 있던 터라 H의 의견은 듣는 척 했을 뿐 한낱 통과 의례에 불과했다. 능구렁이다. 공교하게도 H 또한 주막집 가학을 통달한 자다. 천재성이 엿보인다니 사람을 들었다가 패대기친 것이다. 이리하여 능구렁이는 좌우의 만두 빚는 소리에 희희낙락하며 관아 한복판에 버젓이 두 채의 주막집을 차린 거다. 세 사람이 다 죽었다면 이런 말하기가 뭐하지만 K2는 아직 살아 있다.
주막집 가학이 선비네 가학을 웃는다. 나는 아흔이 넘도록 그런 세월을 살아 왔다.
첫댓글 재주는 곰이 부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