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학동이라고 불린 쌍계사 일대에서 노닐다.
쌍계사 일원에서 열린 쌍계사 차문화대축전에 참여하여 부산 정보고 학생들 300여 명과 불일폭포까지 산속을 노닐다가 돌아왔다.
신라의 고운 최치원, 고려의 파한 이인로, 조선시대의 천재 문장가인 탁영 김일손, 남효온, 남명 조식, 일두 정개청, 이수광, 유몽인 등 신라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며 글을 남긴 길을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 , 성군관대 인문대 학장인 안대회교수님과 함께 도반이 되어 재미난 답사를 했다.
”김동리가 《역마》에서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는 시오리가 좋은 길이라 해도 굽이굽이 벌어진 물과 돌과 장려한 풍경은 언제 보아도 길 멀미를 내지 않게 하였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꽃피는 봄날 쌍계사 가는 길은 그윽하고 화사하기 이를 데 없다.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위치한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3년(724)에 의상의 제자 삼법이 창건하였다. 삼법은 당나라에 있을 때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정상(머리) 을 모셔 삼신산(금강산, 한라산, 지리산) 눈 쌓인 계곡 위 꽃 피는 곳에 봉안하라’ 는 꿈을 꾸고 귀국하여 현재 쌍계사 자리에 이르러 혜능의 머리를 묻고 절 이름 을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이후 문성왕 2년(840) 진감선사가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쌍계사의 좌우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합쳐지므로 절 이름을 쌍계사라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크게 소실되어 인조 10년(1632) 벽암스님이 중건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 초입에 마치 문처럼 마주 서 있는 두 바위에는 고운 최치원이 지팡이 끝으로 썼다는 ‘쌍계雙磎’, ‘석문石門’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을 지나던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쌍계석문에 이르렀다. 최고운의 필적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의 획이 마모되지 않았다. 그 글씨를 보건대, 가늘면서도 굳세어 세상의 굵고 부드러운 서체와는 사뭇 다르니, 참으로 기이한 필체다. 김탁영은 이 글씨를 어린아이가 글자를 익히는 수준이라고 평하였다. 탁영은 글을 잘 짓지만 글씨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은 듯하다.”
이 절도 다른 절들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오늘날 볼 수 있는 건물들은 그 뒤에 하나씩 다시 세운 것이다. 대웅전, 화엄전, 명부전, 칠성각, 설선당, 팔영루, 일주문 등이 그것이다. 그중 쌍계사의 대웅전은 광해군 12년(1620)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4칸의 기둥이 높은 아름다운 건물로, 보물 제458호로 지정되었다.
쌍계사의 여러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국보 제47호로 지정된 진감선사탑비다. 경주 초월산의 대승국사비,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탑비, 보령 성주사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더불어 최치원의 사산비문四山碑文에 속하는 이 비는 쌍계사를 세운 진감선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헌강왕의 명에 위해 최치원이 쓴 것으로 신라 정강왕 2년(887) 에 세웠다.
비의 높이가 3.63미터, 폭이 1미터인 검은 대리석 비의 주인공 진감선사는 신라 말의 고승으로 전주 금마(지금의 익산)에서 태어났는데, 속가의 성이 최씨였다.
태어나면서 울지도 않았다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일찍부터 소리 없고 말 없는 깊은 도의 싹을 타고 태어났다.“고 하였다.
대웅전 바로 아래에 세워진 진감선사의 탑 비에 이 절의 역사와 진감선사에 대한 글이 새겨져 있다.
“드디어 기이한 지경을 두루 선택하여 남령南嶺의 산기슭을 얻으니 높고 시원함이 제일이었다. 사찰을 창건하는데, 뒤로는 노을 진 언덕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 이는 시내를 굽어보니 안계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산이요, 귀를 서늘하게 하는 것은 돌구멍에서 솟는 여울이다.”
이렇게 절을 창건하는 과정을 기록한 다음에 진감선사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높은 데까지 오르자면 가까운 데서 부터 시작해야 하나니. 비유를 취한들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또한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말이 없고자 한다. 하늘이 무슨 말이 있는가.’ 라고 했다, 그런즉 유마거사가 묵묵히 문수를 대한 경우와 부처님께서 가섭迦葉에게 가만히 전한 것처럼, 수고로이 혀를 놀리지 않고서도 능히 통해서 마음에 새기게 한다는 것이다. 하늘이 말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이 버리고 어디에 가서 얻을 수 있겠는가“ 멀리서 오묘한 도를 전해 와서 우리나라를 빛나게 한 붐이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선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최치원이 짓고, 글은 다른 사람이 쓴 보령 성주사지의 비문과 달리 쌍계사의 비에는 최치원이 글을 짓고 썼다.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에 적힌 이 글은 천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모든 글자들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한국 전쟁 당시 총알에 맞은 자국이 여기저기 뚫려 있어 옆구리에 쇠판을 대고 있다.
쌍계사에서 조금 올라가서 좌측으로 가면 만나는 절이 국사암이고, 그곳에서 불일암과 불일폭포는 2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불일폭포로 가는 길은 한적하면서도 아름다운데 그곳에서 1,2km 가다가 보면 만나는 곳이 환학대喚鶴臺다. 환학대는 불일암 부근에 살던 최치원이 청학동에 살고있는 청학을 불러들인 곳이라고도 하고, 최치원이 청학을 타고 날아갔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이다. 이 길을 오래 전에 걸었던 사람이 무오사화의 주인공 탁영 김일손金馹孫이었다.
“쌍계사 동쪽 골짜기를 따라 다시 지팡이를 짚고 길을 떠났다. 돌층계를 오르기도 하고 위태로운 잔도를 기어오르기도 하면서 몇 리를 가자, 꽤 넓고 평평하여 농사짓고 살만한 곳이 나왔다.
여기가 세상에서 청학동이라고 하는 곳이다. 그리고 생각해봤다. 우리들은 이곳애 올 수 있었는데, 이인로는 어찌하여 이곳에 오지 못했던가? 어쩌면 미수가 여기까지 왔었는데, 느슨한 마음으로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청학동이란 정말 없는데 세상에서 그 소문만 계속 전해오는 것은 아닐까?
앞으로 수십 보를 가자 가파른 골짜기가 나타났다. 잔도를 타고 올라 한 암자에 이르렀는데, 불일암이라 하였다. 암자가 절벽 위에 있어 앞은 낭떠러지였고, 사방은 산이 기이하고 빼어나 이를 데 없이 상쾌하였다.(...) 아래에는 용추에 학연鶴淵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청학동이라고 일컫는 곳은 불일평전을 이르는 말이다.
김일손의 뒤를 이어 이 길을 걸었던 사람이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 남효온南孝溫이었고, 그가 남긴 < 추강집>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 다음과 같이 청학동 부근이 실려 있다.
내가 승려에게 묻기를 “어디가 청학동입니까?” 라고 하니. 승려 의문이 말하기를, “석문 밖 3.4리쯤 못 가서 그 동네 안에 청학암이 있읍니다. 아마도 그곳이 옛날의 청학동 인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이인로의 시에 “지팡이를 짚고서 청학동 찾아가니 숲 속에선 부질없이 원숭이 울음소리 뿐, 누대에선 삼신산이 아득히 멀리 있고, 이끼 낀 바위에는 네 글자가 희미하네,”
라고 하였으니, 그는 성문 안 쌍계사 앞쪽을 청학동이라고 여긴 것이 아닐까?
쌍계사 위 불일암 아래에도 청학연이란 곳이 있으니, 이곳이 청학동인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에서 청학동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지리산 청학동은 예전에 청학이 깃들어져 살았기 때문에 이름하였다. 고려시대에 이인로가 신흥사에 이르러 청학동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시 한 편을 남겼는데, 이를 보면 청학동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아마도 오래전의 일인가 보다.
이곳에 사는 승려가 나에게 말했다. ”어느 날 짓궂은 한 젊은이가 돌을 던져 학의 날개를 부러뜨렸습니다. 이로부터 청학이 다시는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아마도 청학이 기미를 보고 떠난 듯 하다.
이규경李圭景의 글에 청학동에 관한 글이 더 자세히 실려 있다.
‘청학동은 우리나라의 작은 한 골짜기에 불과한데, 천하에 이름이 나게 되었다. 예컨대 청나라 성조聖祖(강희제) 때 만든 <연감유함淵鑑類函>에 ”조선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다. 그 지경이 매우 넓으며, 사방은 좋은 농지로 토질이 비옥하여 농사에 알맞다. 청학만이 그 안에 서식하기 때문에 ’청학동‘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고 실려 있다. 대체로 우리나라에는 비경秘經으로 이름난 곳이 매우 많은데, 청학동이 유독 세상에 이름이 낫다. 이것이 이른바 만나는 경우도 있고,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다행스런 일도 있고 불행한 일도 있다는 것이다.“
진감선사 탑비에서 출발하기 전, ‘신라 때 실종된 최치원 선생을 보거나 어느 날 문득 사라진 청학을 본 사람 10만월을 주겠다.’고 했는데, 내 지갑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번 답사에서도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말한 바대로 이상향, 즉 유토피아는 없다는 말인가?
하지만, 하지만, 하고 또 나서서 청학동이나 이어도, 우복동이나 청석골, 그리고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상그릴라와 같은 이상향을 찾는 나의 여정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2023년 5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