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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분유유천행루(臨分惟有千行淚)
헤어지려니 오직 천 갈래 눈물만이 흐른다는 뜻으로, 고산 윤선도가 기장에서 유배 살 때 읊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臨 : 임할 임(臣/11)
分 : 나눌 분(刀/2)
惟 : 오직 유(忄/8)
有 : 있을 유(月/2)
千 : 일천 천(十/1)
行 : 다닐 행(行/0)
淚 : 눈물 루(氵/8)
증별소제(贈別少弟) / 윤선도(尹善道)
(아우와 헤어지며 지어 주다)
其一
若命新阡隔幾山(약명신천격기산)
네 뜻을 따르면 새로운 길 얼마나 많은 산이 막을 것이며
隨波其奈赧生顔(수파기내난생안)
세파를 따르자니 얼굴 붉어지려는데 어찌하겠는가?
臨分惟有千行淚(임분유유천행루)
헤어지려니 오직 천 갈래 눈물만이 흘러
灑爾衣裾點點斑(쇄이의거점점반)
너의 옷자락에 뿌려져 점점이 얼룩지네.
其二
我馬騑騑汝馬遲(아마비비여마지)
내 말은 쉬지 않고 달리고 네 말은 느리지만
此行那忍勿追隨(차행나인물추수)
이 길을 어찌 차마 따라오지 말라고 하겠느냐?
無情最是秋天日(무정최시추천일)
가장 무정한 것은 가을의 해이니
不爲離人駐少時(불위리인주소시)
헤어지는 사람을 위해 잠시도 머물러주지 않네.
위 시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증별소제(贈別少弟; 아우와 헤어지며 지어 주다) 1·2수로, 그의 문집인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에 수록돼 있다.
윤선도가 부산 기장 황학대 일대에서 1618년 11월부터 1623년 3월까지 4년 4개월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오우가', '어부사시사'를 짓고,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이다.
서른 살에 예조판서 이이첨을 탄핵하는 내용을 상소했다가 이른바 '괘씸죄'로 함경도 경원에서 2년간 유배생활을 하던 중, 그래도 성이 차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기장으로 이배됐다. 평생 세 차례 유배되고 두 차례나 이배되는 불운과 시련을 겪었다. 가장 긴 귀양살이를 한 곳이 기장이다.
그가 기장에 온 지 3년 뒤인 1621년 8월 이복동생 윤선양이 찾아왔다. 만남 뒤 떠나 보내며 애끓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가 아우를 배웅한 곳이 삼성대이다. 선양은 윤선도에게 속전(贖錢; 돈을 주고 유배에서 벗어남)을 제안했다. 윤선도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두 수의 시에는 동생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형의 마음이 애절하게 나타나 있다. 먼 길이니 서둘러 떠나야 한다는 마음에 윤선도의 말은 서두르지만,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동생의 말은 오히려 더디다. 그런 내용이 위 시에 담겨 있다.
■ 유배지(流配地) 기장(機張)
조선시대 변방의 유배지, 아름다운 기장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 기장현조(機張縣條)에 기장현은 동쪽으로 해안까지 8리(약 3.14㎞), 남쪽으로 동래현(東萊縣) 경계까지 14리(약 5.5㎞), 서쪽으로 양산군(梁山郡) 경계까지 32리(약 12.57㎞), 북쪽으로 울산군(蔚山郡) 경계까지 49리(약 19.24㎞)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71리(약 381.33㎞)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렇듯 기장현은 경상도에서 동해 바다를 끼고 있으며 서울과의 거리가 1,000리(약 392.73㎞)에 이를 정도로 변방 해안가에 위치한다. 또한 왜와 인접한 동해안에 자리하여 고려 말부터 왜구가 창궐하면서 기장 지역 백성들은 왜구의 침탈을 격심하게 겪기도 하였다.
1396년(태조 5)에는 왜적의 침입으로 병선(兵船)이 탈취되고,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죽었으며, 동래(東萊)와 동평성(東平城)과 함께 기장성(機張城)이 함락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도 동래성을 함락시킨 왜군이 기장읍성을 침략하여 치열한 전투 없이 성이 함락되었고, 이후 왜군은 기장 죽성리 왜성(機張竹城里倭城)과 임랑포 왜성(林浪浦倭城)을 쌓아 침략의 전진 기지를 만들었다.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장은 일본군의 주둔지로서 어느 지역보다 많은 침탈을 겪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기장 지역은 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수성(머리성)'이라는 의미의 '차성(車城)'이라고도 불렸다.
즉, 기장은 서울에서 1,000리나 멀리 떨어진 변방 해안가에 자리 잡은 열악한 생활 조건을 가진 지역이어서 중앙 정치 무대에서 추방되어 오랜 기간 고독하게 지내야 하는 유배지로서 적합한 곳으로 여겨졌다. 서울에서 가장 멀리 보내는 3,000리(조선은 현실적으로 900리) 유배형을 보낼 수 있는 지역에 해당하기에 기장은 조선시대에 14번째 순위에 드는 유배지였다.
그래서 기장에는 유배를 온 인물들과 얽힌 고사가 전해지는 곳이 산재해 있는데, 윤선도의 자취가 남아 있는 황학대(黃鶴臺)와 삼성대(三聖臺)와 유배 온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기장의 절경에 취해 시를 읊었다는 오랑대(五郞臺)가 대표적이다.
또한 기장에는 귀양 온 선비뿐 아니라 많은 묵객들이 들러 정경에 취하여 시문을 남긴 아름다운 절경으로 유명한 곳이 많이 있다. 그리하여 '기장군지(機張君誌)'에는 중국의 소상 팔경(瀟湘八景)에 비유하여 기장의 팔경을 선정하였다.
제1경 달음산, 제2경 죽도(竹島), 제3경 일광 해수욕장, 제4경 장안사 계곡, 제5경 홍연 폭포, 제6경 소학대, 제7경 시랑대(侍郞臺), 제8경 임랑 해수욕장이라 한다. 이 외에도 남쪽 해안의 아름다운 포구와 북쪽의 산지를 중심으로 명승지가 즐비하다.
조선시대에 열악한 변방 유배지로 인식되던 기장은 오늘날 남동쪽으로는 바다를, 북서쪽으로는 산을 끼고 있어 자연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해발 고도 587.5m 바위산인 취봉산은 우리나라 가장 동쪽에 위치하여 맨 먼저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볼 수 있다. 장안사와 척판암이 있는 불광산 일대는 예부터 단풍 명소로 유명하고, 장안사 계곡인 금수동(錦水洞)은 숲이 울창하고 물이 맑아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에 위치한 일광 해수욕장은 기장 팔경 중 하나로 금빛 모래가 넓게 깔려 있으며, 이 금빛 모래 위로 오르내리는 갈매기의 군무가 아름답다. 이곳은 오영수(吳永壽)의 소설 '갯마을'의 실제 무대이기도 하고, 1965년 김수용 감독이 영화를 만들 때 촬영을 한 곳이기도 하다.
기장에는 천혜의 자연 경관을 바탕으로 널리 알려진 명승지 또한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아 지금도 우리나라 영화인들에게 영화 촬영지로 선호되고 있다. 특히 검푸른 바닷물이 발아래에서 넘실대는 동해 바닷가 기암절벽 위의 해송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해동용궁사는 주위 경관이 빼어나 보는 이로 하여금 넋을 잃게 할 정도이다.
절의 오른쪽 절벽에 위치한 시랑대에 새겨진 여러 시(詩)들은 이곳의 절경이 예부터 이름 높았음을 입증한다. 빼어난 절경으로 이곳은 사찰이기에 앞서 관광지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바다와 산이 절경을 이루고, 기암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와 가슴이 탁 트이는 수평선, 그래서 해동용궁사를 찾은 이들은 다시 찾게 된다.
기장읍 연화리 마을 앞에 있는 작은 섬 죽도는 기장 지역 유일한 섬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널리 알려져 기장 팔경의 하나로 불렸다. '교남지(嶠南誌)' 기장군 산천조에 죽도는 형상이 물 위에 떠 있는 거북과 같다고 소개한 것을 보면, 섬의 모양이 아니라 섬에 있는 대나무에서 이름이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죽도의 대나무는 예전에 상당히 유명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근래에는 대밭은 별로 없고 동백나무가 울창하게 자생하여 동백섬으로 불리기도 한다. 죽도는 예부터 많은 묵객들이 자주 찾던 기장의 대표적인 명소인데, 지금은 육지와 섬을 잇는 아름다운 다리가 놓여 건너갈 수는 있지만 개인 소유로 섬을 제대로 즐길 수는 없어 이곳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을 애태우게 한다.
이 외에도 조선시대에 읍파정(揖波亭)이라는 정자가 있던 적선대(謫仙臺)는 신선이 죄를 짓고 이곳에 귀양 와서 놀던 곳이라 할 만큼 경관이 아름다운데, 소나무가 우거져 있고 일출의 경관이 신비로웠다고 전한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극찬할 때 예부터 선조들은 '신선이 귀양 와서 놀던 곳'이라고 하였던가? 궁벽한 곳에 자리하여 열악한 생활 조건을 감내해야 하던 유배지 기장이 산과 바다를 낀 천혜의 자연 경관을 가진 곳으로 신선이 귀양 와서 놀던 곳이라는 극찬을 받았다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외로움과 고독으로 몸부림치며 잊혀 지내는 아픔을 감내해야 한 유배인을 위로함인지 알 수 없으나 바쁘게 일상에 쫓기는 현대인들에게는 짧은 기간 귀양인의 몸이 되어 신선놀음을 하고프게 만드는 곳이 기장이 아닌가 한다.
기장에 유배 온 사람들과 그에 얽힌 명소
기장은 '선조실록(宣祖實錄)'에 "바닷가의 잔읍(殘邑)으로 피폐함이 더욱 심하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비슷한 기록이 문헌 자료에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지역적 조건은 중앙 정부에서 볼 때 기장이 유배지로 적합한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조선시대에 유배지로 잦은 빈도를 보인다.
그러나 '고종실록(高宗實錄)' 1868년(고종 5) 기사에 "의정부에서 경상 감사 오취선(吳取善)의 보고에 따라 기장은 동래와 함께 일본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므로 귀양지로 정하지 말 것을 건의하자 왕이 이를 수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기장은 1868년 이후 유배지에서 제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기장에 유배 온 인물은 1406년(태종 6) 승려 혜정(惠正)이 처음 보이고, 1863년(고종 즉위년) 7월에 유생 윤헌구(尹憲九)가 마지막 유배인으로 확인된다. 그 기간 내에 기장에 유배 온 대표적인 인물이자 기장에 많은 이야기를 남긴 인물은 1618년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유배 온 윤선도와 1689년(숙종 15) 2월에 유배 온 이조 참판 지호(芝湖) 이선(李選)을 들 수 있다.
1.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황학대(黃鶴臺)
고산 윤선도는 조선 시대 송강(松江) 정철(鄭澈), 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시조 문학의 최고봉을 이룬 인물로, 14세부터 시작(詩作)을 시작하여 사망하기 2년 전인 83세에 붓을 놓았으니 70년간 시조 75수, 한시(漢詩) 259편을 남겼다.
윤선도는 1616년(광해군 8) 30세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광해군 옹립에 공을 세운 예조 판서 이이첨(李爾瞻) 일파의 전횡과 이것을 알면서도 모른 채 한 영의정 박승종(朴承宗), 왕후의 오빠 유희분(柳希奮) 등이 나라를 그르친 죄를 밝히는 상소인 병진소(丙辰疎)를 올려 이듬해에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기장에서 6년[32세], 영덕에서 1년[52세], 삼수 5년[74세], 광양 2년[79세]을 합하여 16년의 유배 생활을 하였다.
30대에 함경도 경원으로 처음 유배되었는데, 경원은 조선 땅이긴 하지만 풍속과 기후도 판이하게 다르고 땅이 척박하여 생활하기 불편한 변방이었다. 하지만 경원이 귀양지로 가장 척박한 곳이었으나 북쪽 변방 오랑캐 땅에 가까운 곳이라 만일에 있을 역모를 피하기 위해 1년 뒤에 다시 유배지를 기장으로 옮겼다.
이후 기장에서 6년간 지냈는데, 윤선도가 유배 생활을 가장 오래한 곳이기도 하다. 젊고 패기 넘치는 성균관 유생으로서 관료의 부당한 정치적 행동을 지적하다가 32세부터 37세까지 6년이란 긴 시간을 기장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시조 문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윤선도가 유배 중에 남긴 시와 글은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실려 전하는데, 40수에 이르는 한글 시조인 '어부사시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 유배 기간 중에 지은 한글 시조 '견회요(遣懷謠; 시름을 쫓는 노래' 5수에는 신념에 충실한 강직한 삶과 결백한 마음을 하소연한 것, 임금을 향한 변함없는 마음 등이 잘 드러나 있어 정치 현실에서 소외된 젊은 지식인의 유배 생활의 아픈 마음을 느끼게 한다.
기장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중에 고산은 황학대를 매일 찾았다고 전한다.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두호(豆湖) 마을 북쪽에 바다 쪽으로 돌출된 암반 위에 소나무 숲이 있다. '기장현 읍지(機張縣邑誌)' 형성조에 "황학대는 군의 동쪽 10리(약 3.93㎞)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읍지에 기록될 만큼 조선 후기에도 경치가 유명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황학대는 육지와 이어지고 황색의 바위가 길게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다에 돌출되어 있어, 그 모습이 마치 황학이 나래를 펴고 있는 듯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두호 마을은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로 추정되고 있다.
수십 그루의 노송에 둘러싸여 있는 황학대는 옛날 신선이 황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중국 양쯔강(揚子江) 하류의 이태백, 도연명 등 많은 시객들이 찾아 놀던 황학루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윤선도는 이곳에서 갈매기와 파도소리를 벗 삼아 한 많은 시름을 달래곤 하였다. 기장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마을 뒤에 있는 봉대산에 올라 약초를 캐어 병마에 시달리는 죽성 사람들을 보살피곤 하였는데, 이곳 사람들은 고산을 서울에서 온 의원님이라 불렀다고 여태껏 구전되어 온다.
이곳은 수년 전만 하여도 백사장과 해송이 펼쳐져 있었으나, 최근 어항과 해안 도로 개설 공사로 백사장의 면적과 해송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 더해 수해와 병충해로 고사 직전에 있는 해송은 안타까움을 더하는데, 윤선도가 즐겨 찾았던 당시 황학대의 소나무 숲에서 보는 일출 장면은 더없이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2. 지호(芝湖) 이선(李選)과 수리정(愁離亭)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중리 마을에는 기장에 유배 온 이선과 관련된 수리정(愁離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수리정은 이곳 출신으로 숙종 대 정헌대부(正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문세명(文世鳴)이 세웠는데, 원래는 집승정(集勝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689년 정2품 이조 참판 지호 이선이 기사환국(己巳換局) 사건에 연루되어 기장으로 유배 와서 ‘이 정자에 오르기만 하면 근심 걱정이 멀리 떠난다’고 하여 수리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이선(李選)은 기장에서 4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1689년에 궁녀 소의(昭儀) 장씨(張氏)의 아들을 세자로 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봉하였다. 이때 이를 반대한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대거 귀양을 가거나 파직되고 남인들이 등용되었는데, 이를 기사환국이라 한다. 이선은 서인의 당색을 지닌 인물로 이때 대간의 탄핵을 받고 기장으로 귀양 와서 1692년(숙종 18) 귀양살이 도중에 사망하였다.
이선(李選)은 기장으로 유배되어 철마면 웅천리에 있는 문세명의 사저에서 은거하였다. 천리 밖으로 유배되어 지낸 장소가 그 지역 출신 선비의 사저라니 조선 시대 관료의 유배 생활이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오히려 지역의 명망가가 자신의 집에 거소를 마련하여 일상생활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선(李選)이 기장에서 4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 같은 서인인 정철이 쓴 관동별곡(關東別曲), 속사미인곡(續思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장진주사(將進酒辭) 등 가사 외에 단가 77수를 집대성하였다는 연구가 있다.
이선(李選)이 기장에서 재정리하였다는 정철의 작품은 송강 가사(松江歌辭) 중 단가(短歌) 80수 가운데 30수라는 또 다른 연구도 있다. 이들 연구를 보면 이선이 기장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문세명의 사저에서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송강 정철의 가사 문학을 정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선(李選)이 귀양 와서 머물렀다는 수리정은 오랫동안 자취 없이 흔적만 남아 있었으나, 1974년 마을 주민들이 이선을 기리기 위해 정자의 옛터인 철마면 용천리 중리 마을 수리정 터에 수리정비를 세웠고, 1977년에는 문세명의 후손들이 집승정 유허비를 수리정비 옆에 건립하였다.
이후 정자를 다시 세우기 위해 2000년 초부터 수리정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수리정에 대한 각종 문헌과 자료를 수집한 끝에 2005년 12월 19일 옛터에 육각 정자인 수리정을 건립하였다. 마음이 울적할 때 수리정에 올라 지호 이선의 시를 읊어 보면 근심이 달래지지 않을까?
3. 일광 해수욕장 삼성대와 정몽주, 윤선도
삼성대는 일광면 삼성리 삼성 마을 남쪽 해변 일대를 말하였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일광 해수욕장 백사장 한가운데 있는 높이 4~5m로 이루어진 둔덕을 삼성대라 부르고 있다. 삼성리의 마을 유래가 된 삼성대는 1791년에 간행된 '고산유고'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서(輿地圖書)' 기장현 형성조에 삼성대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기장현 읍지' 형성조에도 "삼성대는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곳은 18·19세기에 이미 기장의 명승지로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지역 사람들은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등 세 명의 문인들이 와서 경치를 즐겼다는 일화에서 삼성대란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정몽주 등이 기장 지역에 왔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삼성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세룡암의 경내에 1935년 세운 정몽주 유촉비(圃隱鄭先生遺囑碑)가 있는데, 정몽주 등이 이곳에 왔다는 정확한 근거에서보다는 삼성대의 유래를 토대로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삼성대를 정몽주와 연관시킨다면, 정몽주는 고려 말 1375년(우왕 1) 언양현[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요도에 유배되었던 적이 있다. 이때 정몽주가 인근의 경치 좋은 곳을 찾았을 것이고, 그때 일광면 삼성리를 방문하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삼성대는 고산 윤선도가 32세부터 37세까지 6년간 유배 생활을 한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윤선도가 기장에 있는 동안 그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지명으로, 유일하게 '고산유고'에 나와 있다. 윤선도가 기장에 귀양와서 동생과 이별하며 시 두 편을 지어 남겼는데(증별소제/贈別少弟) 2수, 삼성대작(三聖臺作) 여기에 삼성대란 명칭이 나타난다.
고산의 나이 35세에 서제(庶第) 선양(善養)이 귀양지 기장까지 찾아왔다. 아우가 얼마 동안 기장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삼성대에서 돌아가는 아우를 전송하면서 애끓는 형제애를 두 수의 시로 표현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2005년 세운 기장군 일광 해수욕장 해안가 야트막한 언덕인 삼성대에 윤선도의 시비가 있는데, 삼성대에서 동생과 이별하면서 지은 두 수의 시와 당시 윤선도의 마음을 표현한 시 한 수를 새겨서 그를 기리고 있다.
증별소제(贈別少弟) 2수
其一
若命新阡隔幾山
너 뜻을 따르자니 새로운 길 얼마나 많은 산이 가로 막을 것이며
隨波其奈赧生顔
세파를 따르자니 얼굴이 부끄러워짐을 어찌하리
臨分惟有千行淚
이별을 당하여 오직 천 갈래 눈물만이
灑爾衣裾點點斑
너의 옷자락에 뿌려져 점점이 아롱지는구나
그 당시에 돈을 바치고 죄를 면하는 일이 있었으며 수파(隨波)란 이것을 가리킨다(時有納鍰, 自贖之事, 隨波卽指此也).
其二
我馬騑騑汝馬遲
내 말은 내달리고 네 말은 더디건만
此行那忍勿追隨
이 길 어찌 차마 따라오지 말라고 할 수 있으랴
無情最是秋天日
제일 무정한 건 이 가을 해이니
不爲離人駐少時
헤어지는 사람 위해 잠시도 멈추지 않네
병중유회(病中遺懷) 1수
居夷禦魅豈余娛
편히 살기 위해서 도깨비를 막음이 어찌 나만의 즐거움이랴
戀國懷先每自虞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먼저 가졌기에 모든 것이 절로 걱정이네
莫怪踰山移住苦
산 넘어 옮겨 사는 괴로움을 가련하게 여기지 마라
望京猶覺一重無
서울 바라보니 도리어 막힘이 없구나
윤선도가 왜 이곳에서 동생을 떠나 보내면서 시를 지었을까? 그것은 윤선도가 기장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즐겨 찾아 탁 트인 바다를 보며 유배의 회환을 달래던 곳이 삼성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남긴 시를 통해 짐작해 보면 삼성대는 17세기 초에도 아름다운 절경으로 이름이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4. 권적(權摘)과 시랑대(侍郞臺)
시랑대는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 동암 마을 남쪽 해변에 있으며, 해동용궁사 옆쪽에 있는 바위의 대(臺)를 일컫는다. 예부터 기장 팔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명승지이다.
원래는 원앙대였는데, 1733년(영조 9) 이조 참의 권적(權摘)이 좌천되어 기장 현감으로 재직하다가 이곳에 와서 자연석에 자신의 벼슬인 시랑(侍郞)을 따서 '시랑대'라는 글과 자작시를 새기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권적이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謫居猶得近蓬萊
귀양살이라 하지만 오히려 신선이 노는 봉래산을 가까이 두고 있다
人自天曹二席來
이 사람은 천조(이조 참의)에서 여기에 왔구나
三字丹書明翠壁
석 자를 써서 푸른 바위에 밝혔으니
千秋留作侍郞臺
천추의 긴 세월 동안 시랑대로 남으리라
권적은 암행어사로 우리에게 익숙한 박문수(朴文秀)의 호남 관찰사 임명을 반대하다가 영조의 미움을 사 정3품 당상관에서 종6품의 기장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중앙에서 고위 관료를 역임하다가 궁벽한 동해 남단에 지방관으로 좌천된 기분을 귀양살이로 표현하며 울분과 서러움을 시로 남긴 것이다.
시랑대라 새겨져 있는 바위 앞의 다른 자연석에는 '엄신영 제우영(嚴信永弟宇永)'이라는 각자를 비롯하여 엄신영(嚴信永), 손경현(孫庚鉉), 이후서 등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찾아 시를 남겨 놓았다. 경관이 빼어난 시랑대에는 권적뿐 아니라 많은 시인 묵객들이 와서 절경을 즐겼던 것으로 생각되며, 시랑대는 권적의 관직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장현 읍지' 형성조에 의하면 "기장 현감과 홍문관 교리를 지낸 손경현이 놀러 와서 학사암(學士嵓)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시랑대란 이름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시랑대는 신오(辛奧)의 '시랑대기'에 "바위 위에는 가운데가 안방 같으며 방바닥처럼 평평하게 되어 있어 사오십 명이 앉아도 남을 만큼 널찍하다"고 표현되어 있다.
시랑대의 뒤편은 기암괴석이 첩첩이 쌓여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앞으로는 동해 푸른 바다가 지평선 너머로 펼쳐져 있어 절경을 이룬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유도 이러한 절경 때문이 아닌가 한다.
서울에서 천리나 떨어진 외진 벽지에 귀양 온 관료들의 시름을 달래기에 빼어난 절경만큼 위로가 되는 것은 드물 듯하다. 기장의 동해 바다 해안가 기암괴석과 울창한 송림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소외된 유배인들은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놓고 외로움을 달랬을 것이다.
이전에는 군부대가 주둔하여 접근하기 힘들었으나, 지금은 해동용궁사를 통해 가면 쉽게 갈 수 있다. 실제 해동용궁사는 부산 사람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알려졌지만, 기장 팔경의 하나인 시랑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제 해동용궁사를 찾는 길에 시랑대에 들러 아름다운 절경을 보며 시 한 수를 읊어 보자.
5. 오랑대(五郞臺)의 다섯 선비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에 있는 오랑대는 정확하게 전하는 설화는 없으나 옛날 기장에 유배 온 친구를 찾아온 선비 5명이 정경에 취해 술을 마시며 가무를 즐기고 시를 읊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오랑대가 있는 연화리 일대는 기장으로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음식점이 즐비해 있었는데, 이 지역이 개발되면서 도로변 일대가 모두 철거되었다. 해안 도로에 연해 있는 좁은 길을 따라가면 아름다운 해안선에 우뚝 솟은 바위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오랑대이다. 오랑대에는 언제 지어졌는지는 모르지만 해신당이 있어 바닷가 지역민의 바다에 대한 경외심을 느낄 수 있다.
해안가에 우뚝 솟은 기암의 끝자락에 예스러운 모습을 간직한 해신당이 오랑대의 멋진 풍광과 어우러져 동해 일출이 더욱 장관을 이루어 일출 명소로도 유명하다. 해마다 연초에는 많은 사진작가들이 오랑대 일출의 장관을 포착하기 위해 많이 찾는다.
지금은 주말에 드라이브하는 해안 도로에서 만날 수 있는 해안가 절경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천리 떨어진 궁벽한 지역에 귀양살이하는 스승을, 형제를, 친구를 두고 떠나며 이별의 아픔을 달래던 곳이지 않겠나!
■ 윤선도(尹善道, 1587 ~ 1671)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과 해옹(海翁), 본관은 해남(海南)이다.
윤선도가는 고조부인 윤효정(尹孝貞)이 확고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증조부 윤구(尹衢)가 문과 급제 후 승정원주서, 예조좌랑, 홍문관부교리 등의 청요직을 거치며 안정된 지위를 확보하면서 명실상부한 명문 가문이 되었다.
윤선도는 윤구의 손자인 윤유심(尹唯深)의 둘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종조부 윤홍중(尹弘中)의 양자로 들어가 가계를 이은 숙부 윤유기(尹唯幾)가 다시 대를 이을 자식이 없자 윤유기에게 입양되어 대를 이었다.
학풍으로 볼 때 윤선도가는 영남학파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고조부 윤효정이 김종직(金宗直)의 제자 최부(崔溥)의 문인이었고, 증조부 윤구는 조광조(趙光祖)와 친분이 있었으며, 양부 윤유기는 이호민(李好閔) 등 영남 출신의 학자들과 두루 교유하였다.
윤선도는 17세기의 대표적 남인 인사로서 박식하여 의약, 복서, 음양, 지리, 음률 등 당시 유학자들이 소홀히 하였던 분야에까지 광범위하게 연구하여 통달하였다.
이러한 학풍은 증손 윤두서(尹斗緖), 현손 윤덕희(尹德熙), 5세손 윤용(尹愹), 그리고 외증손인 정약용(丁若鏞)에게까지 이어졌다.
이처럼 해남 윤씨가의 가법(家法), 학풍(學風), 문풍(文風)을 체계화하였고, 이러한 집안 전통은 후손들에 의해 착실히 계승되었다.
1606년에 향시에, 1628년에는 별시문과 초시에, 1633년에는 증광문과에 차례로 합격하였다.
이후 시강원 문학, 사헌부 지평, 승정원 동부승지 등의 청요직과 성산 현감, 예조 참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로서 학문을 지도하였다.
남인과 서인 간에 벌어졌던 제 1차 예송논쟁, 즉 복제(服制) 논쟁에서 서인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가하여 예론(禮論)을 당쟁(黨爭)으로 비화시킨 인물로 평가될만큼 조선 후기 당쟁의 중심에 있었다.
서인 문사들로부터 끊임없는 정치적 공격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정치 생애는 대부분 은둔과 유배로 점철되었다.
1675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78년에는 충헌(忠憲)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시장(諡狀)은 홍우원(洪宇遠)이 지었고, 신도비명은 허목(許穆)이 지었다.
문학사에서 시조의 제 1인자로 평가된다. 병자호란 때 현재 전라남도 보길도에 정착하여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부르고 낙서재(樂書齋)를 지어 시작 활동에 전념하였다. 낙서재는 삶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낙서재에 머물며 산중신곡(山中新曲), 고금영(古今詠) 등을 지었고, 그 뒤 1651년에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남겼다.
이듬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경기도 고산에 정착하였고, 이곳에서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夢天謠)를 지었다.
40여 년에 걸친 유배 및 은거생활 속에서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하여 주옥같은 시조와 많은 한시를 지었다. 이들 작품은 문집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에 전한다.
시문으로 당대에 명성을 날렸지만 서가로서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묵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이를 통해 능서가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 작품으로 해남 윤씨가 소장 영모첩(永慕帖)과 해남윤씨가세유묵별첩(海南尹氏家世遺墨別帖)에 실린 필적이 있다. 두 첩은 증손 윤두서가 조상들의 유묵들을 한데 모아 장황한 것이다.
영모첩에 수록된 글씨는 제문 · 시문 · 편지 등을 쓴 것이며, 해남윤씨가세유묵별첩에 실린 글씨는 1639년 영덕에 유배갔을 때 같은 읍에 유배 온 송파(松坡) 이해창(李海昌)에게 보낸 시 5편을 필사한 것이다. 이 두 첩의 글씨는 평소 구사했던 서풍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두 첩에는 이 외에도 4대에 걸친 조상들의 글씨가 함께 실려 있어 글씨를 집안 전통과 관련해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영모첩에 수록된 제문(祭文)은 1619년 작으로 가늘고 긴 획, 길게 늘어뜨린 파책 등에서 조선 중기에 크게 유행했던 송설체의 영향이 여전히 감지되는 작품이다.
양부 윤유기의 글씨에서도 송설체의 영향이 뚜렷이 확인되므로 이는 가학을 통해 전수받은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자형(字形)을 정방형에 가깝게 처리하고, 전절 부분을 뚜렷이 각지게 표현한 점에서 양부의 것과 구분된다.
이러한 서풍은 영모첩의 유대둔사차미상운(遊大屯寺次楣上韻)과 차운수이계하 용여남고사영설(次韻酬李季夏 用汝南故事詠雪)(1639)을 포함한 해남윤씨가세유묵별첩에 수록된 5편의 시 필사본에서 더욱 진전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좀 더 직선적이고 그 끝이 날카로워진 필획, 짙은 농묵, 빠른 운필의 구사 등으로 이 작품들에서는 유려하고 부드러움을 특징으로 하는 송설체를 벗어난 자신만의 개성적 필치를 보여준다.
또한 각 글자의 가로획을 반복적으로 오른쪽 상단으로 치우치게 하여 전체 글씨를 일사분란하고 리듬감있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필치는 근역서휘(槿域書彙)에 수록된 간찰(1639)과 1642년에 작성한 영모첩 내 두 편의 간찰에서도 확인된다.
1650년대에 접어들면 서풍에 변화가 나타난다. 운필은 느려지고 차분해졌으며, 점획은 이전의 글씨에서보다 좀 더 짧고 간단하게 처리되었다. 오른쪽 상단으로 일정하게 향하던 가로획의 필세도 거의 사라졌으며, 농담 변화가 표현되기도 하였다.
대표적 예로 영모첩 내 시(1655)와 소빙화병서(消氷花 幷序)(1661), 그리고 근묵(槿墨)에 수록된 간찰(1655)이 있다.
이들 작품들을 통해 볼 때 해서 및 해행서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좀 더 농후하게 나타나며, 행서 및 행초서에서는 1650년대 이전 서풍이 지속되는 가운데 유연하고 부드러운 필획이 좀 더 많이 구사되었다.
▶️ 臨(임할 림/임)은 ❶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临(림)의 본자(本字), 临(림)은 통자(通字), 临(림)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신하 신(臣; 보다, 눈, 신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品(품, 림)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品(품, 림)은 자잘한 물건, 또 그것을 구별하는 일을, 臥(와)는 사람이 위에서 내려다 보는 일의 뜻을 나타낸다. 臨(림)은 파수보는 일의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臨자는 '임하다'나 '대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臨자는 臣(신하 신)자와 品(물건 품)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금문에 나온 臨자를 보면 허리를 굽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과 세 개의 술잔이 그려져 있었다. 왜 바닥에 술잔이 놓여있는지 또 이것을 왜 내려다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臨자에 '임하다'나 '공격하다'는 뜻이 있는 것을 보면 전쟁에 임하기 전에 병사들에게 나누어주던 술잔을 그린 것일 수도 있다.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술을 마시게 했던 행위는 근대까지도 있었던 일이다. 그러니 臨자가 가지고 있는 여러 의미로 볼 때는 이러한 추측도 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臨(림)은 ①임(臨)하다(어떤 사태나 일에 직면하다) ②내려다 보다 ③다스리다, 통치하다 ④대하다, 뵙다 ⑤비추다, 비추어 밝히다 ⑥본떠 그리다 ⑦접근하다 ⑧지키다 ⑨치다, 공격하다 ⑩곡(哭)하다 ⑪장차(將次) ⑫임시(臨時) ⑬병거(兵車: 전쟁할 때에 쓰는 수레) ⑭군의 편제(編制) 단위 ⑮괘(卦)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본래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 어떤 일에 당하여 정한 때를 임시(臨時), 병을 치료하거나 병의 예방 등을 연구하기 위해 실제로 환자를 접하는 것을 임상(臨床), 어떤 시기가 가까이 닥쳐 옴을 임박(臨迫),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를 임종(臨終), 어떤 때에 임함을 임기(臨機), 바다에 가까이 있음을 임해(臨海), 현장에 가서 검사함을 임검(臨檢), 임금이 그곳에 거동함을 임행(臨幸),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군림(君臨), 남이 자기 있는 곳으로 찾아오는 일을 높여 이르는 말을 왕림(枉臨), 남이 찾아옴의 높임말을 내림(來臨), 신이 하늘에서 속세로 내려옴을 강림(降臨), 다시 옴을 재림(再臨), 임금이 몸소 죽은 신하를 조문함을 곡림(哭臨), 높은 곳에 오름을 등림(登臨), 지나는 길에 들름을 역림(歷臨), 갑자기 생긴 일을 우선 임시로 둘러맞춰서 처리함을 일컫는 말을 임시변통(臨時變通), 환자에게 실제로 약을 먹이거나 시술하거나 함으로써 그 효과를 알아보는 실험을 일컫는 말을 임상실험(臨床實驗),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정해 일을 쉽고 편리하게 치를 수 있는 수단을 일컫는 말을 임시방편(臨時方便),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는 말을 임갈굴정(臨渴掘井), 난리가 난 뒤에 무기를 만든다는 말을 임난주병(臨難鑄兵), 진을 치면서 장수를 바꾼다는 말을 임진역장(臨陣易將), 깊은 곳에 임하듯 하며 얇은 데를 밟듯이 세심히 주의하여야 함을 이르는 말을 임심이박(臨深履薄) 등에 쓰인다.
▶️ 分(나눌 분, 푼 푼)은 ❶회의문자로 푼의 뜻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된다. 刀(도; 칼)와 八(팔; 나눔)의 합자(合字)로 물건을 나눔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分자는 '나누다'나 '베풀어 주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分자는 八(여덟 팔)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八자는 사물이 반으로 갈린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사물이 나누어진 모습을 그린 八자에 刀자가 결합한 分자가 물건을 반으로 나누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分자는 사물을 반으로 나눈 모습에서 '나누어 주다'나 '베풀어 주다'라는 뜻을 갖게 됐지만, 물건이 나뉜 후에는 사물의 내부가 보인다는 의미에서 '구별하다'나 '명백하다'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分(분, 푼)은 (1)분세(分稅) (2)분수(分數) (3)십진(十進) 급수(級數)의 단위의 하나. 곧 하나를 열에 나눈 것의 하나. 1의 1/10. 시간(時間)의 단위. 한 시간을 60으로 나눈 그 하나 (4)각도(角度). 경위도 등의 1도를 60으로 나눈 단위의 하나 (5)길이의 단위 1치를 10으로 나눈 그 하나 (6)1돈을 10으로 나눈 그 하나 (7)1할(割)을 10으로 나눈 그 하나 (푼)으로 읽힐 때, ㊀옛날 엽전의 단위. 한돈의 1/10 ㊁무게의 단위. 한돈의 1/10 ㊂길이의 단위. 한 치의 1/10, 등의 뜻으로 ①나누다 ②나누어 주다, 베풀어 주다 ③나누어지다, 몇 개의 부분(部分)으로 갈라지다 ④구별(區別)하다, 명백(明白)하게 하다 ⑤헤어지다, 떨어져 나가다 ⑥구별(區別), 다름 ⑦나누어 맡은 것, 몫 ⑧분수(分數) ⑨운명(運命), 인연(因緣) ⑩신분(身分), 직분(職分) ⑪길이, 무게, 시간(時間), 각도(角度), 화폐(貨幣) 따위의 단위 ⑫24절기(節氣)의 하나,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을 때, 그리고 ⓐ푼(엽전의 단위)(푼)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구분할 구(區), 나눌 반(班), 나눌 배(配), 나눌 반(頒),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합할 합(合)이다. 용례로는 어떤 사물을 이루고 있는 각 성분이나 요소를 갈라냄을 분석(分析), 어떤 갈래에 달린 범위나 부문을 분야(分野), 틀림없이 또는 확실하게를 분명(分明), 나누어서 넘겨 줌을 분양(分讓), 서로 나뉘어서 떨어지거나 떨어지게 함을 분리(分離), 찢어져 갈라짐을 분열(分裂), 생산에 참가한 개개인이 생산물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나누는 일을 분배(分配), 일을 나누어서 맡음을 분담(分擔), 종류를 따라서 나눔을 분류(分類), 따로따로 흩어짐을 분산(分散), 서로 구별을 지어 가르는 것을 분별(分別), 분량이 적적하여 모자람이 없음을 충분(充分), 전체를 몇으로 나눈 것의 하나하나를 부분(部分), 처리하여 다룸을 처분(處分), 명목이 구별된 대로 그 사이에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나 분수를 명분(名分), 따로따로 갈라 나눔을 구분(區分), 개인의 사회적인 지위 또는 계급을 신분(身分), 몫몫이 나누어 줌을 배분(配分), 남에게 어질고 고마운 짓을 베푸는 일을 덕분(德分), 마음에 생기는 유쾌 불쾌 우울 따위의 주관적이고 단순한 감정 상태를 기분(氣分), 화합물을 조성하는 각 원소를 성분(成分), 자기에게 알맞은 신분 또는 의무로 마땅히 하여야 할 직분을 본분(本分), 영양이 되는 성분을 양분(養分), 서로 소매를 나누고 헤어짐이란 말로 이별을 뜻하는 말을 분수작별(分手作別), 분가함 또는 별거함을 일컫는 말을 분문이호(分門異戶), 얼마 안 되는 돈과 곡식을 일컫는 말을 분전승량(分錢升量), 사리를 분별하는 마음가짐을 일컫는 말을 분별사식(分別事識), 자기 분수에 만족하여 다른 데 마음을 두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안분지족(安分知足), 두 과부가 슬픔을 서로 나눈다는 뜻으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동정한다는 말을 양과분비(兩寡分悲), 한번 서로 인사를 한 정도로 아는 친분을 일컫는 말을 일면지분(一面之分),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중대한 의리와 명분을 일컫는 말을 대의명분(大義名分) 등에 쓰인다.
▶️ 惟(생각할 유)는 ❶형성문자로 唯(유)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묻다, 알아보다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 隹(추, 유)로 이루어졌다. 마음에 묻다, 전(轉)하여 생각하다의 뜻이 있다. 또 음(音)을 빌어 발어(發語)의 어조사로 쓰인다. ❷형성문자로 惟자는 '생각하다'나 '사려하다', '오직'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惟자는 心(마음 심)자와 隹(새 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隹자는 꽁지가 짧은 새를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추→유'로의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惟자는 단순히 '생각하다'나 '사려하다'를 뜻하기 위해 心자가 의미요소로 쓰인 글자이지만 실제로는 '오직'이나 '오로지'라는 뜻으로 쓰이는 편이다. 그래서 惟(유)는 ①생각하다, 사려(思慮)하다 ②늘어 세우다 ③마땅하다, 들어맞다 ④~이 되다 ⑤오직, 오로지 ⑥오직, 홀로 ⑦생각컨대 ⑧이(어조사; 伊, 是) ⑨~와(접속사) ⑩~으로써, 때문에 ⑪예, 대답(對答)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만 단(但), 다만 지(只), 생각 념(念), 생각 사(思), 생각 상(想), 생각할 임(恁), 생각할 륜(侖), 생각할 억(憶), 생각할 려(慮), 생각할 고(考)이다. 용례로는 마음으로 생각함을 사유(思惟), 삼가 생각함을 공유(恭惟), 삼가 생각하건대를 복유(伏惟), 삼가 생각함을 앙유(仰惟), 다시 생각해 봄을 고유(姑惟), 두루 생각컨대를 통유(統惟), 공경히 생각함을 장유(莊惟), 매 위에 장사 있나는 속담으로 매질하는 데 굴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를 이르는 말을 유장무장(惟杖無將), 의리의 유무는 따지지 않고 이해 관계에만 관심을 가진다를 이르는 말을 유리시시(惟利是視), 분주하고 다사多事하여 날짜가 모자란다를 이르는 말을 유일부족(惟日不足), 먹는 것을 백성들은 하늘과 같이 여긴다를 이르는 말을 식유민천(食惟民天), 옷은 새 옷이 좋고 사람은 옛 사람이 좋다를 이르는 말을 인유구구(人惟求舊), 죄상이 분명하지 않아 경중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가볍게 처리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죄의유경(罪疑惟輕) 등에 쓰인다.
▶️ 有(있을 유)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달월(月; 초승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𠂇(우; 又의 변형)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有자는 '있다, '존재하다', '가지고 있다', '소유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有자는 又(또 우)자와 月(육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에 쓰인 月자는 肉(고기 육)자가 변형된 것이다. 有자의 금문을 보면 마치 손으로 고기를 쥐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내가 고기(肉)를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有자는 값비싼 고기를 손에 쥔 모습으로 그려져 '소유하다', '존재하다'라는 뜻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有(유)는 (1)있는 것. 존재하는 것 (2)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 소유 (3)또의 뜻 (4)미(迷)로서의 존재. 십이 인연(十二因緣)의 하나 (5)존재(存在)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있다 ②존재하다 ③가지다, 소지하다 ④독차지하다 ⑤많다, 넉넉하다 ⑥친하게 지내다 ⑦알다 ⑧소유(所有) ⑨자재(資財), 소유물(所有物) ⑩경역(境域: 경계 안의 지역) ⑪어조사 ⑫혹, 또 ⑬어떤 ⑭12인연(因緣)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재(在), 있을 존(存)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 폐할 폐(廢), 꺼질 멸(滅), 패할 패(敗), 죽을 사(死), 죽일 살(殺), 없을 무(無), 빌 공(空), 빌 허(虛)이다. 용례로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음을 유명(有名), 효력이나 효과가 있음을 유효(有效), 이익이 있음이나 이로움을 유리(有利), 소용이 됨이나 이용할 데가 있음을 유용(有用), 해가 있음을 유해(有害), 이롭거나 이익이 있음을 유익(有益), 세력이 있음을 유력(有力), 죄가 있음을 유죄(有罪), 재능이 있음을 유능(有能), 느끼는 바가 있음을 유감(有感), 관계가 있음을 유관(有關), 있음과 없음을 유무(有無), 여럿 중에 특히 두드러짐을 유표(有表), 간직하고 있음을 보유(保有), 가지고 있음을 소유(所有), 본디부터 있음을 고유(固有), 공동으로 소유함을 공유(共有),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는 뜻으로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우환을 당하지 아니함 또는 뒷걱정이 없다는 뜻의 말을 유비무환(有備無患), 입은 있으나 말이 없다는 뜻으로 변명할 말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구무언(有口無言), 있는지 없는지 흐리멍덩한 모양이나 흐지부지한 모양을 일컫는 말을 유야무야(有耶無耶), 형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천지간에 있는 모든 물체를 일컫는 말을 유상무상(有象無象),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명무실(有名無實), 머리는 있어도 꼬리가 없다는 뜻으로 일이 흐지부지 끝나 버림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유두무미(有頭無尾), 다리가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박식한 사람을 이르는 말을 유각서주(有脚書廚), 만물은 조물주가 만드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일컫는 말을 유생불생(有生不生), 다리가 있는 양춘이라는 뜻으로 널리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유각양춘(有脚陽春), 뜻이 있어 마침내 이루다라는 뜻으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을 유지경성(有志竟成),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온다는 뜻으로 뜻을 같이하는 친구가 먼 데서 찾아오는 기쁨을 이르는 말을 유붕원래(有朋遠來), 시작할 때부터 끝을 맺을 때까지 변함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시유종(有始有終), 무슨 일이든 운수가 있어야 됨을 이르는 말을 유수존언(有數存焉),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있으나 마나 함을 이르는 말을 유불여무(有不如無), 말하면 실지로 행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함 또는 각별히 말을 내 세우고 일을 행함을 이르는 말을 유언실행(有言實行), 끝을 잘 맺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으로 시작한 일을 끝까지 잘하여 결과가 좋음을 이르는 말을 유종지미(有終之美), 입은 있으되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정이 거북하거나 따분하여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유구불언(有口不言), 행동이나 사물에 처음과 끝이 분명함 또는 앞뒤의 조리가 맞음을 일컫는 말을 유두유미(有頭有尾),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 융통함을 이르는 말을 유무상통(有無相通), 장차 큰 일을 할 수 있는 재능 또는 그 사람을 일컫는 말을 유위지재(有爲之才), 끝까지 일을 잘 처리하여 일의 결과가 훌륭함을 이르는 말을 유종완미(有終完美),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그대로 있지 않고 인연에 의하여 변해 가는 것이라는 말로 세상사의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유위전변(有爲轉變), 가기에 잎을 더한다는 뜻으로 이야기에 꼬리와 지느러미를 달아서 일부러 과장함을 이르는 말을 유지첨엽(有枝添葉),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의 문이 개방되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유교무류(有敎無類) 등에 쓰인다.
▶️ 千(일천 천/밭두둑 천/그네 천)은 ❶형성문자로 仟(천), 阡(천)은 동자(同字), 韆(천)의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열십(十; 열, 많은 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人(인)의 뜻을 합(合)하여 일 천을 뜻한다. ❷지사문자로 千자는 숫자 '일천'을 뜻하는 글자이다. 千자는 사람의 수를 나타내기 위해 만든 글자이다. 千자의 갑골문을 보면 사람을 뜻하는 人(사람 인)자의 다리 부분에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이것은 사람의 수가 '일천'이라는 뜻이다. 고대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천’ 단위의 수를 표기했다. 예를 들면 '이천'일 경우에는 두 개의 획을 그었고 '삼천'은 세 개의 획을 긋는 식으로 오천까지의 수를 표기했다. 千자는 그 중 숫자 '일천'을 뜻한다. 후에 천 단위를 표기하는 방식이 바뀌면서 지금은 千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千(천)은 (1)십진(十進) 급수(級數)의 한 단위. 백의 열곱 절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일천 ②밭두둑, 밭두렁 ③초목이 무성한 모양 ④아름다운 모양 ⑤그네 ⑥반드시 ⑦기필코 ⑧여러 번 ⑨수효가 많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갖가지의 많은 근심을 천우(千憂), 만의 천 배를 천만(千萬), 아주 많은 수를 천억(千億), 여러 번 들음을 천문(千聞), 썩 먼 옛적을 천고(千古), 썩 오랜 세월을 천추(千秋), 엽전 천 냥으로 많은 돈의 비유를 천금(千金), 백 년의 열 갑절로 썩 오랜 세월을 천년(千年), 한냥의 천 곱절로 매우 많은 돈을 천냥(千兩), 백 근의 열 갑절로 썩 무거운 무게를 천근(千斤), 십리의 백 갑절로 썩 먼 거리를 천리(千里), 수천 수백의 많은 수를 천백(千百), 많은 군사를 천병(千兵), 천 길이라는 뜻으로 산이나 바다가 썩 높거나 깊은 것을 천인(千仞), 많은 손님을 천객(千客), 여러 가지로 변함을 천변(千變), 천 년이나 되는 세월을 천세(千歲),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천만인(千萬人), 썩 많을 돈이나 값어치를 천만금(千萬金), 하루에 천리를 달릴 만한 썩 좋은 말을 천리마(千里馬), 천 리 밖을 보는 눈이란 뜻으로 먼 곳의 것을 볼 수 있는 안력이나 사물을 꿰뚫어 보는 힘 또는 먼 데서 일어난 일을 직감적으로 감지하는 능력을 일컫는 말을 천리안(千里眼), 천 년에 한 번 만난다는 뜻으로 좀처럼 얻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이르는 말을 천재일우(千載一遇), 천 번을 생각하면 한 번 얻는 것이 있다는 뜻으로 많이 생각할수록 좋은 것을 얻음을 일컫는 말을 천려일득(千慮一得), 천 가지 생각 가운데 한 가지 실책이란 뜻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하나쯤은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을 천려일실(千慮一失), 마음과 몸을 온가지로 수고롭게 하고 애씀 또는 그것을 겪음을 일컫는 말을 천신만고(千辛萬苦), 천 년에 한때라는 뜻으로 다시 맞이하기 어려운 아주 좋은 기회를 이르는 말을 천세일시(千歲一時), 천 리나 떨어진 곳에도 같은 바람이 분다는 뜻으로 천하가 통일되어 평화로움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천리동풍(千里同風), 여러 시문의 격조가 변화 없이 비슷 비슷하다는 뜻으로 여러 사물이 거의 비슷 비슷하여 특색이 없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천편일률(千篇一律), 천 가지 괴로움과 만가지 어려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르는 말을 천고만난(千苦萬難), 천만 년 또는 천 년과 만 년의 뜻으로 아주 오랜 세월을 이르는 말을 천년만년(千年萬年), 무게가 천 근이나 만 근이 된다는 뜻으로 아주 무거움을 뜻하는 말을 천근만근(千斤萬斤), 울긋불긋한 여러 가지 빛깔이라는 뜻으로 색색의 꽃이 피어 있는 상태를 형용해 이르는 말을 천자만홍(千紫萬紅), 천차만별의 상태나 천 가지 만 가지 모양을 일컫는 말을 천태만상(千態萬象), 천금으로 말의 뼈를 산다는 뜻으로 열심히 인재를 구함을 이르는 말을 천금매골(千金買骨), 썩 많은 손님이 번갈아 찾아옴을 일컫는 말을 천객만래(千客萬來), 오래도록 변화하지 않는다는 말을 천고불역(千古不易), 수없이 많은 산과 물이라는 깊은 산속을 이르는 말 천산만수(千山萬水), 여러 가지 사물이 모두 차이가 있고 구별이 있다는 말을 천차만별(千差萬別) 등에 쓰인다.
▶️ 行(행할 행, 항렬 항)은 ❶회의문자이나 상형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彳(척; 왼발의 걷는 모양)과亍(촉; 오른발의 걷는 모양)의 합자(合字)이다. 좌우의 발을 차례로 옮겨 걷는다의 뜻을 나타낸다. 또는 네거리, 굽지 않고 바로 가는 일, 나중에 가다, 하다란 뜻과 항렬(行列), 같은 또래란 뜻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❷상형문자로 行자는 '다니다'나 '가다', '돌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行자는 네 방향으로 갈라진 사거리를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行자를 보면 네 갈래로 뻗어있는 사거리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람이나 마차가 다니던 사거리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行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길'이나 '도로', '가다'라는 뜻을 전달하게 된다. 行자는 한쪽 부분이 생략된 彳(조금 걸을 척)자가 쓰일 때가 있는데, 이는 彳자 자체가 별도의 부수 역할을 하는 경우로 역시 '가다'라는 뜻을 전달한다. 참고로 行자가 '항렬'이나 '줄'이라는 뜻으로 쓰일 때는 '항'으로 발음을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行(행, 항)은 (1)글의 세로 또는 가로의 줄 (2)길을 감. 군자(君子)는 대로(大路) (3)행동(行動) (4)한시(漢詩)의 한 체 (5)당(唐)나라에서는 한 곳에 집중되어 있던 동업 상점의 조합, 또는 도매상, 중간 업자 혹은 단순히 상점을 가리킴. 은행이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되었음 (6)어떤 지명(地名)이나 시간 아래에 붙이어 그리로 감, 어떤 곳으로 감의 뜻을 나타내는 말 (7)일체의 유동(流動), 제행(諸行)하며 변화하는 존재. 현상 (8)십이 인연(因緣)의 하나. 과거세(過去世)에서 신(身), 구(口), 의(意) 세 업(業)으로 지은 선악 일체의 본원적 생명 활동. 십이 인연(因緣) (9)수행(修行) (10)실천. 행위. 인간적인 행동(知, 智) (11)칠사(七祀)의 하나. 도로와 행작(行作)을 주장하는 궁중의 작은 신(神) (12)조선시대 때 관계(官階)가 높고 관직(官職)이 낮은 경우에 벼슬 이름 위에 붙여 일컫던 말. 가령 종1품(從一品) 숭정 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가진 사람이 정2품(正二品)의 관직인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면, 숭정대부 행 이조판서(崇政大夫行李曹判書)라 했음 등의 뜻으로 ①다니다, 가다 ②행하다, 하다 ③행하여지다, 쓰이다 ④보다, 관찰하다 ⑤유행하다 ⑥돌다, 순시하다 ⑦늘다, 뻗다 ⑧장사(葬事)지내다 ⑨시집가다 ⑩길, 도로, 통로 ⑪길, 도로를 맡은 신(神) ⑫고행(苦行), 계행(戒行) ⑬행실(行實), 행위(行爲) ⑭여행(旅行), 여장(旅裝: 여행할 때의 차림) ⑮행직(行職: 품계는 높으나 직위는 낮은 벼슬을 통틀어 이르는 말) ⑯일 ⑰행서(行書), 서체(書體)의 하나 ⑱시체(詩體)의 이름 ⑲장차, 바야흐로 ⑳먼저, 무엇보다도 그리고 항렬 항의 경우는 ⓐ항렬(行列)(항) ⓑ줄, 대열(隊列)(항) ⓒ열위(列位), 제위(諸位)(항) ⓓ항오(行伍), 군대의 대열(隊列)(항) ⓔ순서(順序), 차례(次例)(항) ⓕ같은 또래(항) ⓖ직업(職業)(항) ⓗ점포(店鋪), 가게(항) ⓘ깃촉(항) ⓙ의지(意志)가 굳센 모양(항) ⓚ늘어서다(항) ⓛ조잡하다(항)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움직일 동(動), 옮길 반(搬), 흔들 요(搖), 옮길 운(運), 들 거(擧),할 위(爲), 옮길 이(移),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알 지(知), 말씀 언(言), 말씀 어(語)이다. 용례로는 길 가는 사람을 행인(行人), 동작을 하여 행하는 일을 행동(行動), 여럿이 벌이어 줄서서 감을 행렬(行列), 가는 곳을 행선(行先), 물건을 가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파는 일을 행상(行商), 실지로 드러난 행동을 행실(行實), 정치나 사무를 행함을 행정(行政), 체면에 어그러지도록 버릇 없는 짓을 함을 행패(行悖), 법령의 효력을 실제로 발생 시킴을 시행(施行), 관례대로 행함을 관행(慣行), 앞으로 나아감 또는 일을 처리해 나감을 진행(進行), 계획한 대로 해 냄을 수행(遂行), 일을 잡아 행함을 집행(執行), 약속이나 계약 등을 실제로 행하는 것을 이행(履行), 절뚝거리며 걸어감이나 균형이 잡히지 않음을 파행(跛行), 자기의 거주지를 떠나 객지에 나다니는 일을 여행(旅行), 방자하게 제 멋대로 행함 자행(恣行),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아울러 행함을 병행(竝行), 차량 등이 정해진 노선에 따라 운전하여 나감을 운행(運行), 출판물이나 돈이나 증권 채권 따위를 만들어 사회에 널리 쓰이도록 내어놓음을 발행(發行), 강제로 행함을 강행(强行), 몸으로 움직이는 모든 것을 이르는 말을 행동거지(行動擧止), 지식인이 시세에 응하여 벼슬에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설 줄도 아는 처신의 신중함을 일컫는 말을 행장진퇴(行藏進退), 길을 가는 데 지름길을 취하지 아니하고 큰길로 간다는 뜻으로 행동을 공명정대하게 함을 비유하는 말을 행불유경(行不由徑), 하늘에 떠도는 구름과 흐르는 물이라는 뜻으로 다른 힘에 거스르지 않고 자연 그대로 유유히 움직이는 모양 곧 자연에 맡기어 행동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행운유수(行雲流水), 타향에서 떠돌아 다니다가 병들어 죽음을 일컫는 말을 행려병사(行旅病死), 길에서 만난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행로지인(行路之人), 걸어가는 송장과 달리는 고깃덩이라는 뜻으로 배운 것이 없어서 쓸모가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행시주육(行尸走肉), 그 해의 좋고 언짢은 신수를 일컫는 말을 행년신수(行年身數), 간 곳을 모름을 일컫는 말을 행방불명(行方不明), 일을 다하고도 오히려 남는 힘이 있음을 이르는 말을 행유여력(行有餘力), 기러기가 줄을 지어 남쪽으로 날아감을 일컫는 말을 행안남비(行雁南飛) 등에 쓰인다.
▶️ 淚(눈물 루/누, 물 빠르게 흐르는 모양 려/여)는 ❶형성문자로 泪는 간자, 㴃는 속자, 涙는 약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겹치다'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戾(려→루)로 이루어지고 '눈에 괸 물'의 뜻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淚자는 '눈물'이나 '촛농', '울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淚자는 水(물 수)자와 戾(어그러질 려)가 결합한 모습이다. 戾자는 문안에 개가 갇혀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淚자는 이렇게 문에 갇힌 개를 그린 戾자에 水자를 결합한 것으로 개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며 운다는 뜻이다. 그래서 淚(루/누, 려/여)는 (1)'눈물 루(누)'의 경우는 ①눈물 ②촛농 ③울다 ④촛농이 떨어지다 (2)'물 빠르게 흐르는 모양 려/여'의 경우는 ⓐ물이 빠르게 흐르는 모양 ⓑ쓸쓸하다 ⓒ적적하다(寂寂--)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로는 涕(눈물 체) 등이다. 용례로는 울어서 흐르는 눈물을 체루(涕淚), 눈물이 나오게 함을 최루(催淚), 초가 탈 때 녹아 내리는 기름을 촉루(燭淚), 바람을 받을 때에 흐르는 눈물 또는 촛농을 풍루(風淚), 눈물 자국을 누흔(淚痕), 눈물이 글썽글썽하게 어린 눈 또는 병적으로 늘 눈물이 나오는 눈을 누안(淚眼), 눈물길로 눈물이 눈에서 코로 흐르는 길을 누관(淚管), 눈물을 머금음을 함루(含淚), 눈물을 흘리는 것을 수루(垂淚), 구슬처럼 떨어지는 눈물을 주루(珠淚), 손수건을 적시는 눈물을 건루(巾淚), 눈물 자국을 잔루(殘淚), 잘못을 뉘우쳐 흘리는 눈물을 회루(悔淚), 두 눈에서 나오는 눈물을 쌍루(雙淚), 그치지 않고 자꾸 흐르는 눈물을 음루(淫淚), 마음속 깊이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을 감루(感淚), 부처의 공덕에 마음이 감동하여 흐르는 눈물을 법루(法淚), 눈물샘으로 눈물을 내보내는 두 개의 샘을 누선(淚腺), 눈물 주머니를 누낭(淚囊), 임금의 눈물을 용루(龍淚), 화장한 얼굴을 적시는 눈물을 장루(粧淚), 눈물길을 이르는 말을 누로(淚路), 눈물을 흘리면서 시나 노래를 부르거나 욈을 누송(淚誦), 이별의 슬픈 눈물을 이루(離淚), 원통한 눈물을 원루(冤淚), 마음으로는 슬퍼하지 않으면서 거짓으로 흘리는 눈물을 공루(空淚), 몹시 슬프고 분통하여 나는 눈물 또는 아름다운 여자의 눈물을 홍루(紅淚), 우는 소리 없이 흘리는 눈물을 암루(暗淚), 피눈물을 이르는 말을 혈루(血淚), 눈물을 흘림을 영루(零淚), 눈물을 뿌림을 휘루(揮淚),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서 흘리는 눈물을 자루(慈淚), 분하여 흘리는 눈물을 분루(憤淚), 슬퍼서 흐르는 눈물로 슬픈 눈물을 비루(悲淚), 근심 걱정 때문에 흘리는 눈물을 수루(愁淚), 눈물을 흘림 또는 그 눈물을 낙루(落淚), 눈물을 이르는 말을 누액(淚液), 늙은이의 눈물 또는 늙어서 기신없이 흐르는 눈물을 노루(老淚), 눈물을 흘림을 유루(流淚), 구슬처럼 흘러나오는 눈물 방울을 누주(淚珠), 우는 소리와 흐르는 눈물을 성루(聲淚), 눈물이 비 오듯 흘러 내림을 우루(雨淚), 이별할 때에 슬퍼서 흘리는 눈물을 별루(別淚), 마음에 사무쳐서 뜨겁게 흐르는 눈물을 열루(熱淚), 너무 슬퍼서 몹시 흐르는 눈물의 비유를 누하(淚河), 고향이 그리워서 흘리는 눈물을 향루(鄕淚), 임금의 사랑을 잃게 된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을 이르는 말을 고신원루(孤臣冤淚)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