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당신의 작은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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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다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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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말은 단지 문학적 비유나,
불가피한 상황에 대처하는 소극적 태도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어딘가로 '떠나는' 적극적인 행위의 표현이다.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우리의 공간과 사물을 바라보고, 익숙하지만 소외됐던 것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이다.
함께 거주하는 사람들을 새롭게 만나보는 것이다.
이번 휴가와 연휴엔 거실과 침실로, 또 발코니와 주방으로 떠나보면 어떨까.
오랫동안 자신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넨 의자와, 매일 마주쳤지만 무심코 지나쳤던 현관으로.
함께 살았지만 여태 제대로 만나본 적 없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언제든 갈 수 있지만 아직 제대로 가본 적 없는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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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공상하고 싶을 때는 구석에 놓인 의자로,
당신의 냄새가 그리울 때는 작은 침대로,
누군가의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할 때는 조명이 만들어낸 빛과 그림자 속으로,
용기 있는 체념과 포기가 필요한 날에는 발코니로,
잘 구워진 위안의 냄새를 맡고 싶은 날엔 주방으로,
우리의 거주지는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생활이 차곡차곡 쌓여서 관계를 만들어낸 소중한 삶의 풍경이다.
그 풍경으로 우리는 매일 떠나고 매일 도착한다.
***
사물에 대한 태도는 곧 세상에 대한 태도다.
집 안의 사물들을 천천히 다시 보고 만져보고 사용하면서 그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때,
그들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때, 비천한 공간이라도 행복한 공간일 수 있고,
낡고 조잡한 상품이라도 더없이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닐까.
만약 내게 권한이 주어진다면 항로를 바꿔 우리의 집과 우리의 사물에게로 '제대로' 떠나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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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퇴근 시간.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야근까지 하며 처리할 일은 아니다.
따로 약속은 없다. 대신 떠나야 할 곳이 있다. 회사에서 지하철과 도보로 45분이 소요되는 거리,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만들어진 구조물들이 '단지'라는 울타리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공간이다.
구조물들은 축구 선수처럼 등 번호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열 맞춰 서 있다.
그들 중 내가 갈 곳엔 '105'라는 번호가 적혀 있다.
'105'라고 쓰인 건물 안에서도 내가 가야 할 곳은 9층에 자리한 여섯 곳 중 한 곳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이제 거의 다 왔다. 건물만큼 낡은 현관문 앞에 선다.
이곳이 오늘 밤 내 여행의 목적지다.
물론 이곳에는 어제도 왔고, 아마 내일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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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규모의 거주지에서 대개 가로세로 1미터 남짓한 크기인 현관은 공항을 닮았다.
현관과 공항의 물리적 크기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머뭇거릴 수 있는 곳, 한번 더 숙고해볼 수 있는 곳,
엉거주춤 서 있을 수 있는 곳, 떠나는 누군가를 잡을 수 있는 곳,
떠나보내기 싫어하는 누군가에게 잡힐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현관과 공항의 심리적 크기는 닮았다. 가장 짧게 머무는 곳이지만
가장 긴 여운을 남기는 현관은 우리의 작은 공항이다.
여행에서 힘겹게 돌아온 당신을 껴안고, 야근으로 지친 당신을 다독이고, 취해 비틀거리는 당신을 부축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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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다시 '현관'이라는 작은 공항을 오갈 나와 당신의 여정이 무사하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취해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하는 곳 맞네요
어릴때 힘들었을때 문열고 현관에 발 딪자마자 앉아서 부모님께 못하겠다고 울었던 기억 있는데
딱 맞네요
이런게 참 와닿죠?나의 일상을 차지하는 것에 의미를 새롭게 더해 다르게 생각하고 공감할 수 있단게요.어디를 가도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게 오늘따라 참 위로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