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광스님의 임제록] <13>
대장부라면 스스로 일없는 사람임을 알아야
부처와 마구니를 구분하면 경계에 떨어져
부처가 바로 중생이고 중생이 바로 부처
깨달음은 지금 이순간, 시간 필요치 않아
일체의 시간 속에 특별한 법은 따로 없어
問, 如何是佛魔오 師云, 儞一念心疑處가 是箇魔니 儞若達得萬法無生하면 心如幻化하야 更無一塵一法하야 處處淸淨하나니 是佛이니라 然이나 佛與魔는 是染淨二境이라 約山僧見處하면 無佛無衆生하며 無古無今하야 得者便得하야 不歷時節이요 無修無證하며 無得無失하야 一切時中에 更無別法하니 設有一法過此者라도 我說如夢如化하노니 山僧所說이 皆是니라
해석) 어느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와 마구니입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그대의 한 생각에 의심이 일어나면 그것이 바로 마구니다. 만약 그대의 마음에 만법이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환(幻)임을 알아서 다시는 한 티끌, 한 법도 없어서 곳곳이 청정해지면 그것이 곧 부처다. 그러나 부처와 마구니가 이와 같다면 깨끗함과 더러움의 두 가지 경계에 걸리게 된다. 산승이 보는 바에 따르면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고 과거와 현재도 따로 없어서 곧바로 깨닫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치 않다. 따라서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으며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어 일체의 시간 속에 특별한 법이 없다. 설사 이보다 훌륭한 다른 법이 있다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꿈같고 환영 같은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산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강의) 하여시불마(如何是佛魔)는 “어떤 것이 부처와 마구니입니까?”라는 뜻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어떤 것이 부처라는 마구니입니까?”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처님은 깨끗하고 마구니는 더럽다고 생각합니다.
관념 속의 부처님과 마구니는 항상 대립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면 곧 마구니입니다. 불법을 믿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나에게 불성이 있음을 믿지 못하는 것까지 모든 것이 마구니입니다.
이와 반대로 마음이 환영인줄 알아서 아주 작은 티끌이든, 일체의 법이든 집착하지 않아 항상 청정하면 바로 부처입니다. 그러나 임제 스님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만약 부처와 마구니를 분리해서 생각하면 깨끗함과 더러움이라는 두 가지 경계에 떨어지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임제 스님은 본래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까닭으로 증득할 것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습니다. 오랜 세월 수행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가며 닦아야 할 특별한 법도 없습니다. 만약 이보다 나은 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부처가 곧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입니다.
부연하자면 내가 본래 부처인데, 내가 부처인 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부처임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부터 부처였을까요. 그리고 한때나마 중생이었을까요. 몰랐을 뿐이지 본래부터 부처였겠지요.
주머니에 금덩이를 담고 있으면서 금덩이를 잃어버린 줄 알고 찾아 헤매다가 어느 날 문득 주머니에 금덩이가 있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경우도 금덩이를 새로 얻은 것은 아닙니다. 원래 나에게 있었는데 몰랐을 뿐입니다. 따로 얻은 것도 아니지만 또한 잃어버린 적도 없습니다.
깨달음 또한 이와 같습니다. 얻고 잃을 것이 없습니다. 또 달리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 깨닫는 것입니다. 이를 떠나서 달리 고정불변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여시불마(如何是佛魔) 또한 부처인 마구니로 보는 것이 임제 스님의 뜻에 부합될 것입니다.
道流야 卽今目前孤明歷歷地
[출처] [종광스님의 임제록] <13> 대장부라면 스스로 일없는 사람임을 알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