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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서안(시안)여행을 다녀와서
중국의 천년 역사를 알려면 서안에 가보아야 한다하여 우리 친구부부는 16명(남자 8명, 여자 8명)은 중국 서안을 가기 위해
2011년 8월 16일 이른 새벽 3시40분에 군산이마트 앞에서 집결하여 리무진관광버스를 타고 새벽 4시에 군산을 출발 오전 8시경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에 동행할 군산 아시아여행사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공항에서 대기하다가 출국소속을 마친 다음 오전 9시50분경에 OZ319 아시아나 비행기에 탑승했다.
아시아나 항공기는 10시10분에 인천공항 활주로를 이륙하여 중국서안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안개로 기상이 좋지 않아 밖의 풍경은 볼 수 없었고 비행 중 기상현상으로 인한 기체가 두 차례 심하게 흔들려 안내방송도 있었으나 모두들 레시버를 통하여 영화도 보고 음악도 감상하면서 기내에서 제공하는 소고기 덮밥 을 맛있게 먹었다. 12시40분경에 중국 서안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입국소속을 마치고 가방을 찾아 공항로비로 나오니 하나투어 여행사의 중국 현지가이드가 피켓을 들고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 일행은 공항 앞에 대기하고 있던 25인승 버스에 짐을 싣고 탑승하여 현지가이드로부터 고도 서안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비림박물관으로 출발하였다.
섬서성의 중부에 위치한 서안은 아테네, 로마,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古都)의 하나이며 역사적으로 한과 당의 도읍지였던 장안(長安)이라고 한다. 서안은 기원전 11세기부터 기원후 10세기까지 13개의 왕조나 정권이 도읍으로 삼거나 정권을 세웠던 곳이고 과거 동서 문화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란다. 또한 서안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진시황릉과 세계 8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는 진시황 병마용박물관이 있으며, 당 현종과 그의 애첩 양귀비와 사랑을 나누던 화청지,비림, 대안탑 등 고대중국의 향수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곳이라 한다. 이렇게 서안의 곳곳에는 수많은 문화 유적이 산재하여 실제로 서안 사람들은 어디든 땅을 파면 보물이 나온다고 생각한단다.
가이드 안내로 우리가 도착한 비석의 숲이라고 부르는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은 전형적인 사당식 건물로 건축된 공자문묘(孔子
文廟)였던 곳으로 1,087년 북송조 원우 2년부터 당나라 비석들을 옮겨 모아 만들어 9백여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이 박물관에는 한나라 때부터 근대의 각종 비석, 묘지명 2,300여개 중 1,807개의 비석을 7개의 진열실과 8개의 비정(碑亭)과 6개의 비랑(碑廊)에 전시하고 있었다.
비림이라고 써진 현판에는 碑자에 점 하나가 없다고 한다. 현판은 청나라 때 아편을 싣고 온 영국의 배를 태워 아편전쟁을 부른 임칙서가 쓴 것인데 당시 임칙서는 아편전쟁이 화친으로 돌아서자 전쟁도발자로 몰려 신강위구르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임칙서는 유배지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나머지 점 하나를 쓰겠다고 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병사하여 글자를 끝내 채우지 못했다고 한다. 청대에 건립한 비정 내에는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한 석태효경(石台孝經)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비는 745년 당나라 현종이 공자와 그의 제자인 증자가 나눈 효에 대한 문답을 적은 경서를 친필로 적어 글씨를 새기게 한 것이다.
제1전시실에는 873년 당나라 문종때 주역(周易), 상서(尙書), 시경(詩經) 등의 12개의 경전을 애유회 진개 등의 해서로 새긴 개성석경(開成石經)이 전시 되여 있고 제2전시실에는 안씨 가문의 족보를 새긴 유명한 안씨가묘비(顔氏家廟碑)와 왕희지가 쓴 대당삼장지효서비(大唐三藏至敎序碑)가 전시되여 있었다. 제3전시실에는 장욱이 초서로 쓴 천자문비(千字文碑)가 전시 되어 있었으며 제4전시실에는 송에서 청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시문비(詩文碑)가 전시 되어 있었다. 비림박물관에서는 전서, 예서, 초서, 행서 등의 각종 서체를 비교하면서 유명 서예가들의 필체를 직접 감상할 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비림박물관을 둘러보고 고씨장원과 회족거리로 나섰다.
회족거리내에 있는 고씨장원은 반가(班家)로 400년전 명조말기에 고악송이라는 사람이 12세때 무관을 뽑는 시험에서 2등하여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개인 저택으로 현재까지 원형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명 청시대의 건축예술 고가구 조각예술 고대악기 글씨 등 전통문화를 알아 볼 수 있었다, 고씨장원 반가를 둘러보고 회족거리로 나왔다. 이 거리에서는 소수민족 회족의 전통양식을 만나볼 수 있었다. 서안의 대표적인 회족 거주 지역으로 회족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하얀 모자를 쓴 사람들이 골목을 누비고 있었으며 검은 모자를 쓴 사람은 성지 순례를 다녀온 사람이라고 하였다. 거리 양쪽 상점에는 호두 대추 땅콩 등 작은 단도와 청동조각과 그림, 글씨까지 팔고 있었다. 가격은 비교적 싼 편이었다. 문서거리에서는 중국 4대 유명한 서체 및 문방사우를 파는 서안의 명물거리로 양쪽으로 늘어선 상점과 노점상들이 중국의 주요서체 의 탁본과 붓, 먹, 종이, 벼루와 같은 여러 가지 물건들로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문서거리를 관광 하고나서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중국 현지식으로 저녁을 먹고 오후 8시경 숙소에 도착하여 우리들은 몸을 씻고 다시 모여 정담을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둘째 날 아침 7시 30분경에 호텔 7층 식당에서 아침을 부페식으로 먹고 9시 30분에 호텔로비에 집결 버스에 승차하고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화청궁(華淸宮)으로 향했다.
화청지는 여산 산록에 있는 온천지로 수려한 풍경과 질 좋은 지하온천수가 풍부하여 주나라 때부터 무려 3천년간 역대 황제들의 온천 휴양지로의 명성을 누려온 곳이란다. 이 화청지는 온천지보다는 당나라의 현종과 양귀비(본명:양옥환)가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로 더 유명하다.
양귀비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미인 중 한 사람으로 시, 노래, 춤에 능하고 미모가 뛰어나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의 비가 되었다고 한다. 수왕의 어머니 무혜비가 죽고 나서 외로워하는 현종을 위해 미녀들을 찾아다니다가 양귀비를 현종의 술자리에 보내 춤을 추게 하였는데 양귀비에 반한 현종은 740년 양귀비를 여승으로 만들어 수왕에게서 빼냈고 4년후 다시 궁으로 들인 후 745년에 현종의 귀비로 책봉했다. 이때 현종의 나이는 56세 양귀비는 22세였다고 한다.
현종은 양귀비를 맞으면서 사랑에 눈이 멀어 정치에는 관심 밖의 일이 되고 양귀비를 낀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되였고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서 화청지에 궁을 짓고 양귀비와 사랑하는 일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이후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나자 현종은 양귀비와 함께 스촨으로 달아나다 사랑과 목숨의 갈림길 앞에서 현종은 목숨을 택하고
양귀비는 강제 자결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단다.
화천지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로 유명한 온천지다, 구룡지를 지나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양귀비와 현종이 즐겨 목욕하던
해당탕과 연화탕이 나타난다.
해당탕은 탕의 모양이 해당화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탕 안에는 바닥을 다 덮을 정도의 대형 백옥이 놓여 있었다.
뜨거운 온천수가 차가운 옥에 닿아 서서히 식으면서 목욕하기에 알맞은 온도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연화탕에는
옛날 안록산이 온갖 동물의 모양을 조각하여 바친 기둥이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 황제, 태자 등이 온천을 했던 탕들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당 현종이 머문 비상전을 둘러보고 연못중앙에 전라의 모습으로 수줍게 서 있는 양귀비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하여
다가서니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중국 4대 미인이였던 양귀비는 풍만한 몸매를 지니고 있어 현대 기준으로는 미인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양귀비가 목욕을 좋아했던 이유는 몸에서 암내가 많이 나 암내를 없애기 위함이었는데 현종은 비염으로 냄새를 맡을 수 없어 천생연분 이였다고 한다.
양귀비가 목욕한 해당탕을 중심으로 서인탕, 상식탕 연화탕, 태자탕 5개의 황실욕실이 있었다. 화청지 동쪽에는 정말약이 쓴
“ 華淸池 „ 금자편액이 걸려있었고 온천석벽에 있는 온천송비(溫泉頌碑)는 중국 비석예술 중에서도 우수한 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서안사변의 현장 오간청에 가보니 장학량이 장개석을 잡으려고 쏜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고 깨진 유리창도 보존되어 있어 그날의 현장을 잘 알 수 있었다. 화청지 옆 뜰에는 현종이 양귀비에게 계절마다 싱싱한 과일을 먹을 수 있도록 여러 대추나무위에 감나무의 접을 붙여 키웠는데 대추는 열리지 않고 감만 열려 실패하였다고 한다.
화청지를 보고나서 진시황 병마용박물관(秦始皇兵馬俑博物館)으로 이동하였다
서안에서 가장 유명한 진시황 병마용은 세계 8대 불가사의한 중국 유적지로 흙을 구워 만든 수많은 병사, 장교, 말, 전차, 곡예사, 역사, 악사 등 토우가 실물과 비슷한 크기의 모형이 있는 갱도이다.
병마용갱은 1974년에 진시황릉의 동쪽에서 한 농부가 농수를 얻기 위해 우물을 파던 중 땅이 꺼져 발견하였다.
진시황 병마용(秦始皇兵馬俑)은 죽은 진시황을 지키는 위한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불멸의 생을 꿈꿨던 진시황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병사와 말을 흙으로 빚어 구워 대규모 호위병 군단을 만든 것이다. 1974년에 발견된 후로 현재 까지 3개의 갱(坑)이 발굴 되었는데 700여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과 100개가 넘는 전차, 40여필의 말, 10만여개의 병기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이 실제 무기인 병기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고 창고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발견된 병사들 하나하나가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머리모양을 갖고 있어 그 섬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지금까지 발굴된 3개의 병마용갱을 박물관으로 만든 것이다. 그 중 1호갱은 제일 처음에 발굴된 갱으로 3개의 병마용갱 중에서 가장 큰 갱이다. 갱내에는 토병과 말들이 가운데를 중심으로 동쪽을 바라보며 사열하듯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있는 병마용들은 대부분이 갑옷을 입고 손에 창, 극 등의 무기를 들고 있어 주력부대로 추정된다. 갱이 시작되는 부분에는 처음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토용을 발견했다고 하는 자리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 농부로 인하여 2천2백년 동안 잠자던 토용들을 큰 손상 없이 발굴할 수 있었다고 한다. 2호 병마용갱은 1호 병마용갱 보다 규모는 작지만 갱내에는 기마병, 보병, 전차 등 혼합된 군대가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력부대를 지원하는 부대로 추정된다. 3호 병마용갱은 3개의 갱 중 규모가 가장 작고, 병마용의 수도 가장 적다. 단 1대의 전차와 4마리의 말 68개의 토용만 발견 되였다. 이곳의 병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형태로 토용이 배치된 것으로 미루어 경호부대로 추정 된다 이곳에서는 그 외에도 사슴뿔, 짐승뼈 등이 출토되었으나 아직도 상당수가 흙 속에 묻혀 있어 발굴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병마용박물관안에 있는 병마용들이 대부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진시황이 동진(東進)하여 전국을 통일했고, 또 사후에도 분열되지 않고 제국이 안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동쪽을 경계하는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한 고조 유방이 전쟁 중에 진시황의 병마용을 부수고 병마용갱의 덮개 역할을 했던 통나무에 불을 질렀는데 다행히도 황하가 범람하여 통나무에 붙은 불이 꺼지면서 황토 흙으로 파묻여 지금까지 잘 보존되었다고 한다.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을 출발하여 진시황릉으로 갔다.
진시황릉으로 이동하면서 멀리 바라보이는 얕은 산 처름 보이는 곳이 진시황릉(秦始皇陵)이라고 한다. 가까이 가보니 주위는 온통 석류나무 과수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릉은 기원전 247년 즉위 하자마자 자신의 묘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둘레가 6km 높이가 40m나 되어 무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야산으로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릉은 먼저 평지에 땅을 파고 지하 궁전을 만들어 진시황제의 관과 순장품을 넣은 다음 그 위로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릉 안에는 수은 강이 흐르고 지하궁전이 있다고 하는데 발굴을 하지 않아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없다. 진시황릉을 만들기 위하여 각지에서 징발된 인원만 70만명으로 37년간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 진시황릉은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 되였다.
오후 6시경 진시황릉을 보고나서 우리가 찾아간 음식점은 한국 음식점 경복궁이었다. 음식점에 들어서니 이틀 동안 구경도 못했던 김치와 된장국 등이 차려져 있었다. 곧 이어서 밥과 삼겹살 나와 맛있게 배불리 먹고 숙소에 도착하였다.
세째날 중국의 5악의 하나로 서악에 해당되는 명산으로 산세가 가파르고 험준하며 절경을 간직한 천하명산인 화산을 등반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5시에 일어나 하늘을 보니 날씨는 흐려서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아침 6시에 도시락을 들고 관광버스에 올랐다. 화산으로 가는 도중 교통질서는 한마디로 무질서 그대로였다. 대부분의 자동차들은 신호를 무시하거나 차선도 지키지 않고 사람들도 신호등은 아예 지켜지지 않았다. 약 1시간30분쯤 달려 화산입구의 주차장에 도착하여보니 안개가 끼고 이슬비가 내려 차안에서 도시락으로 아침식사 마치고 비닐우의를 하나씩 사 입고 24인승 버스로 갈아타고 약 20분정도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아 화산(華山)입구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와보니 6인승 케이블카는 쉴새도 없이 정상으로 오르내리고 있었으나 많은 관광객들은 차례를 기다리며 줄지어 서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아래와 위를 쳐다보니 안개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바위틈을
따라 북봉 정상에 올라 기념촬영을 하고나서 동봉 정상으로 향했다.
구불구불 굽어진 등산로는 도처에 깍아 지른 듯한 절벽들이 있고 가는 길은 가파르고 돌을 그대로 쪼아서 만든 돌계단은 양옆으로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어 이것을 붙잡고 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안개비가 조금씩 거치면서 시야가 확보되니 경관은 과히 자랑할 만한 비경이었다. 90도가 넘는 절벽이 양옆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 절벽사이 틈새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은 한폭의 분재와 수석을 보는 것 같아 감탄스럽기만 하였다. 동봉으로 오르는 길은 너무 가파르고 험하여 우리 일행 중간에서 발길을 되돌려 오후 2시경에 하산하는 케이블카속에서 절경을 구경하면서 내려와 오후 3시경에 화산을 출발하여 중국 전통 발맛사지 업소에 도착하니 발맛사지 하는 방마다 소파가 4개씩 놓여있었다. 우리들은 방에 들어가 중국전통차를 마시며 발맛사지를 받았다. 양말을 벗고 따뜻한 대야에 발을 담그니 등반으로 하루 종일 지친 몸의 피로가 가시는 것 같았다. 어깨부터 양팔을 주물러 내려오는데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발을 씻기고 로션을 바르더니 발맛사지를 시작하였다. 한 삼십분 이상을 발맛사지를 하고 수건으로 싼 다음 밖으로 나가 발맛사지가 모두 끝났나 하고 앉아 있으려니 다시 들어와 돌아 앉힌 다음 등과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온몸의 피로가 다 풀린 것 같다.
발맛사지를 마치고 오후7시경 저녁식사를 하면서 당나라시대 번성을 춤과 악기로 표현한 섬서가무쑈를 본 뒤 오후10시경 호텔로 돌아와 하루일과를 마무리 했다.
네쨋 날 8시30분에 관광버스에 탑승하여 9시40분에 첫 코스인 섬서역사박물관(陝西歷史博物館) 도착하였다.
주은래의 지시로 건립 되여 1991년에 개관한 섬서 역사박물관은 현대화된 1급박물관으로 현대식 시스템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었다. 박물관 입구를 들어서면 넓은 중앙 홀에 당나라 고종의 릉에서 나온 돌사자상이 서 있고 섬서성의 자연 경관을 보여주는 황토고원과 황하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 박물관은 고전과 현대의 건축예술이 한데 어울려 놓은 건축물로 중국에서도 자금성에 있는 고궁박물관 다음으로 큰 대규모 박물관이다.
박물관 중앙에 위치한 2층 건물에는 원시시대부터 1840년 아편전쟁 중에 섬서성에서 출토된 각종 전시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서쪽에는 있는 주제 전시관에는 주로 실크로드 등 섬서성의 역사 문화 등에 관련된 문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주요 전시품은
청동기 도용 금 은 장신구 당나라 무덤 벽화 등이었다. 동쪽의 역사문화전시관에는 주로 중국과 외국의 문화 교류를 주제로 물건들이 전시 되여 있었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13개 왕조가 섬서성에 수도를 정했던 만큼 전시실에는 중국역사상 중요한 유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섬서 역사박물관을 구경하고 대안탑으로 향했다
대안탑(大雁塔)은 646년 당나라 고종(高宗)이 어려서 돌아가신 어머니 문덕황후(文德皇后)를 기리기 위해 세운 대자은사(大慈恩寺) 경내에 있다. 대안탑은 서안의 유명한 상징적인 탑 중의 하나이다. 이 대안탑은 삼장법사로 유명한 고승인 현장이 인도에서 장안으로 가저온 150개의 불사리(佛舍利)와 8체의 불상 657부의 경전을 직접 번역하고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쌓아 올렸다고 한다 원래 대안탑은 5층으로 건축되었는데 중건될 때 10층이 되었다가 지금은 7층만 남아있다.
대안탑의 특징은 전탑이라는 점과 탑 속으로 사람들이 들어가 시내를 구경할 수 있다는 것 이다. 당대의 두보 등 많은 저명한 시인들이 대안탑에 올라와 본 후 많은 문구들을 남겼다고 한다.
대안탑이란 이름의 유래는 인도를 향해 가던 현장이 어느 날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렸는데, 그때 어디에선가 기러기 한 마리가 날아와 길을 인도해 주었다고 한다. 부처가 기러기로 현신하여 자신을 도왔다고 생각한 그는 훗날 인도에서 돌아와 탑을 짓고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해 雁塔(기러기탑)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대안탑을 다 보고난 다음 시내로 빠저 나와 중국 현지식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팔로군 서안변사소기념관(八路軍 西安辯事所記念館)에 오후2시30분경에 도착 하였다.
팔로군 서안변사소기념관은 해방이후에 건설된 전쟁기념관으로 항일전쟁 당시의 혁명근거지였던 이곳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공산당 설립이전부터 항일전쟁 전후까지의 현대사가 연결된 역사적인 곳이다. 팔로군 서안변사소에서 등소평, 주덕 등이 팔로군을 지휘하며 중국 혁명의 발판을 만들어 나갔던 혁명의 근거지로 1959년 기념관으로 문을 열었다.
기념관 안에는 당시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회의실 훈련실 침실 등이 원래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이 건물은 원래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 에드가스노의 아내인 헬렌 포스터의 소유로 그녀는 건물의 외관은 병원으로 위장하고
팔로군에게 활동 공간으로 제공하였다고 한다.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기념관 끝에는 헬렌 포스터를 위한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었다. 팔로군 서안변사소기념관은 항일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관으로서 항일전쟁 당시의 비참한 중국의 상황을 담은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일본인들의 만행을 고발 하고 있었다.
우리일행은 팔로군 서안변사소기념관 관광을 마치고 오후 4시에 서안성벽에 도착하였다.
서안성벽(西安城壁)은 당나라의 장안성을 본떠 명나라 때 건축한 성벽으로 중국에서 보전하고 있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완전한 고성(古城)중의 하나로 명 태조 홍무제 3년부터 11년에 걸쳐 건설되어 그 역사가 600년에 이른다. 전체 길이가 13.6킬로미터, 높이가 12미터, 폭이 15미터로, 높고 두터운 벽이 이 성의 가장 큰 특징이다.
성벽은 동서남북의 4개문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었다. 성벽의 동서남북에 위치한 문들은 그 쓰임이 각각 달랐다. 남문은 황제만이 다닐 수 있는 문이고 북문은 사절단이 오가는 문이며 동문은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곡식 생필품 등의 공물들이 들어오는 문이고 서문은 실크로드를 항해 열린 문으로 서방의 상인들이 낙타를 타고 출입하였다고 한다. 문의 역할에 따라서 문의 형태도 달라서 황제가 다니던 남문은 3중곽 서문과 북문은 2중곽 동문은 1중곽으로 되어 있다. 남문은 현재 개방되어 있어 성벽위로 올라가 보았다. 성벽이 워낙 길어 걸어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서안성벽을 구경하고 나서 중국에서 처음으로 소고기를 뜨거운 국물에 익혀 먹는 샤브샤브란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다섯째 날 아침 9시에 모여 실크로드 시작점 유적지로 향했다
서안 시내 중심가를 벗어난 서쪽의 대경로에 대상이 낙타에 짐을 가득 싣고 떠나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조각된 거대한 석상군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한 당나라 때 대상들이 서역을 향해 출발하던 실크로드 시작점에 세워진 석상군이다. 이 석상은 1992년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활발한 경제 문화교류를 가졌던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졌단다.
이곳에서 개척자 장건의 조각상도 만나볼 수 있었다. 실크로드란 중국의 당대에 실크가 서역을 거쳐서 유럽의 중심지였던 로마로까지 가는 여정을 실크로드(비단길)라고 부른다. 이 길은 주로 말과 낙타를 이용해서 비단이 중국에서 로마로 가게 되고 유럽의
물건들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길인데 당시에는 주로 대상(낙타를 탄 상인-카라반)들이 주류를 이루었단다.
실크로드 시작점 관광을 마치자마자 아방궁으로 갔다.
아방궁(阿房宮)은 중국 대륙에 처음으로 통일왕조를 세운 진시황(秦始皇)이 기원전 212년에 건립하기 시작한 대규모 황궁이다.
지금은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고 흔적만이 있지만 그 규모를 거대하다. 아방궁을 건설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황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함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황제에게 알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방이라는 이름은 수도 함양에서 가까운 궁전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사방이 넓은 궁전에서 유래했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하나의 국가로서 정복하는 과정에서 경성(북경)과 함양(서안)에 궁궐들을 다시 짓게 했는데 이것을
육국궁전(六國宮殿)"이라 불렀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아방궁의 규모는 동서로 500보(650m정도) 남북으로 50장(115m 정도)이고 위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방궁은 크고 작은 전우(殿宇)만 700여 곳에 이르고, 900개의 방이 모두 기후가 틀렸다고 한다. 진시황 생전에는 주변의 육국에서 가져 온 보석과 미녀들을 궁내에 보관해 두었고 매일 돌아가며 하루씩 각각의 방에 머물렀는데 죽을때 까지도 다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이 거대한 아방궁은 진시황제의 재위 중에 완성하지 못하고 2세 황제에 의해 나머지 공사가 진행되었으나 완성되기도 전에 초패왕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아방궁을 불에 태웠는데 규모가 거대하여 3개월 동안이나 탔다고 한다.
현재의 아방궁은 고증에 의하여 2,200년전 축소판으로 복원해 놓은 것이란다.
아방궁 관광을 마지막으로 하고 서안국제공항으로 이동하여 출국수속을 마치고 1시25분에 인천공항으로 출발하는 아시아나 OZ320편 비행기에 올랐다. 무사히 4박5일의 여행일정을 마감하였다.
여행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하고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으며 친구들 간 더욱 더 가까워 질수 있는 기회가 주어줘서 감사하다. 세계 4대 고도(古都)의 하나인 중국 최고의 관광지인 서안의 섬서역사박물관, 비림박물관, 대안탑, 서안성벽, 진시황릉, 진시황병마용박물관, 화청지, 실크로드의 시점을 관광 및 문화체험을 하면서 수많은 역사인문경관의 웅장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중국인들은 모든 음식을 데우거나 기름에 튀겨 먹으며 평상시에도 차를 즐겨 마시고 식사 중에도 차와 술을 마시면서 담소하며 급하지 않게 음식을 즐기는 중국인들의 식사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시골에 있는 화장실은 우리나라의 1960~70년대 화장실처럼 미흡한 면이 많았고 또한 교통질서는 정말 엉망이었다. 신호등이나
횡단보도는 거의 지켜는 사람이 없었고 거리에는 온통 차와 자전거 사람들이 뒤엉켜 통행하는 것을 보면 아직은 교통질서의식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았다. 중국 서안은 물이 좋지 않아 끊여 먹거나 생수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도시에는 냉장고가 없었다. 이곳 서안은 교육도시로 각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어 명문학교도 많지만 선생님들의 부정부패가 매우 심하다고 한다. 또 한국어 학과를 지원하는 이유는 한국드라마를 보기 위해서라니 이곳에도 한류열풍이 불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넓은 나라 중국의 일부를 관광하면서 보고 듣고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체험해 보았지만 지금의 중국은 매우 빠르게 성장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동행한 친구의 글을 옮겨온 것임-
첫댓글 역사 기행 제가 다녀온듯 싶습니다 .
즐건 여행 하셨네요 .
잘 보고 갑니다
새로가입하셔서 축하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많이 찾아주세요...
이리 긴문장을 어찌쓰셧을까요^^
넘 대단하십니다.(칭구분님이요)
진시황 병마용박물관이 넘 신기하고 신기했습니다.
시간날때 자세히 읽어보고 감상하겠읍니다
수고하셨읍니다 ^^
다시한번 가보고 싶은곳입니다...
사진으로 다시보니 감개무량...
ㅎㅎㅎ ... 와 !!! ~ 대단하신 천하태평님을 여러번 외쳤는데
마지막에 " -동행한 친구의 글을 옮겨온 것임- " 이라 하시네요.
함께 동행한듯 글을 잘 써주신 대단하신 친구분 이십니다.
명소 잘 다녀오고 많이 견문하길 바랍니다.
여행도 건강할때 아니면 불가!
좋은데 다녀왔구려... 난 앉아서 역사공부를....ㅎㅎ
여행도 역시 사전 지식을 미리 알고 가보면 더 감격적일거라는 생각이드네요~
님덕분에 그곳 여행시 좀더 뜻깊은 여행이 될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