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4년 4월.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페르시아의 길란으로부터 도착한 '차'라는 이름의 새로운 음료를 마시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맛에 반한 교황은 '앞으로 매일 3번에 걸쳐 이 차를 올리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차를 즐겨마시게 되었다.
교황으로부터 시작된 '차 마시는 습관'은 곧 추기경과 대주교, 주교와 사제, 귀족을 포함한 지배계층으로부터 상인계층에게까지 번져나갔고, '차 열풍'은 교황령 전체로 퍼져나갔다.
같은 해 5월에는, 교황령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페르시아가 호르무즈로 자신들의 수도를 옮겼다.
차 마시기 열풍이 시작되면서 '차'의 수요가 늘어났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 새로운 음료의 재료가 '인도'라는 먼 땅에서 대량으로 재배된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만약 페르시아를 완전히 정복한다면 바닷길이 아닌 육로를 통해 인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새로운 음료를 포함한 많은 이국의 재화들을 손쉽게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등장! 러시아 제국!)
16세기 말엽인 1597년 10월. 러시아 지역 대부분을 정복한 모스크바 대공이 스스로 러시아의 황제로 등극했고 루스인들은 처음으로 그들의 제국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러한 러시아 제국의 성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동로마 제국 대부분의 강역과 동로마 황제의 제관은 교황의 손 아래 놓여있었기 때문에, 루스 인들이 동로마를 계승했다고 볼 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교황은 러시아제국의 성립을 단지 '루스 인들이 통합해 그들의 왕국을 세웠다' 고 평가절하했고, 교황령의 모든 공식문서에는 제국을 '러시아 왕국'이라고 표기했다.
여하튼 동로마 제국을 계승하여 스스로를 제 3 로마제국이라 부른 이 '러시아 왕국'이 아직 정복하지 못한 러시아의 나머지 지역으로 확장해 나가리라는 사실은 자명했고, 교황은 거의 유일하게 남은 정교회 대국인 러시아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1599년. 2월. 러시아의 움직임과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제 3차 페르시아 성전을 선포했다.
수세에 몰린 페르시아의 아야톨라는 이번에도 이슬람 연합군을 조직해 방어전에 임하려 했으나, 교황령과의 전쟁에서 압도적인 열세로 몇 번이나 패배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이슬람 국가들은 연합군 결성에 거부, 고립적인 자세를 취했고 결국 소수의 국가들만이 페르시아의 호소에 동참, 5만가량의 군세를 편성해 교황군에 맞서게 되었다.
결과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번 전쟁의 수행을 책임진 바그다드의 총대주교 (메소포타미아 권역 담당)에게 한가지 특별한 지시를 내렸다.
'동부전선의 병사들이 크리스마스를 평화속에서 보낼 수 있도록 하라.'
이러한 교황의 지시에 따라 바그다드의 총대주교는 빠른속도로 교황군을 진군시켜 아야톨라를 압박했고, 1599년 12월 10일. 페르시아의 아야톨라는 카스피해 남부 연안과 메소포타미아의 옛 수도를 할양하라는 총대주교의 요구에 동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1599년 12월 25일. 동부전선의 장병들은 16세기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평화속에서 보낼 수 있었다.
1600년. 교황령의 경제규모는 남, 북아메리카로 세력을 확장해나가고 있었던 카스틸랴 왕국, 러시아 왕국, 프랑스 왕국의 경제규모를 합친 것 보다도 거대했다.
프랑스 왕국 다음으로는 저지대의 강자 홀란드와 영국이 뒤를 잇고 있었다.
군사적으로도 교황군은 2위 카스틸랴 왕국과, 3위 러시아 왕국의 육군규모를 합한 것 보다도 거대했다.
해군 규모에 있어서도 교황군은 유럽의 강자들인 영국과 카스틸리아의 해군력을 합친 것보다도 크고 강했다.
강력한 중상주의적 정책을 기반으로 교황령의 상인들은 이탈리아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광활한 영역에서 거의 독점에 가까운 우위를 누리고 있었지만, 교황령의 밖에서 그들의 경쟁력은 미미했으며, 거의 수입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 교황령의 추기경단 장악력은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었고, 15명의 추기경중 13명이 교황령 출신이거나 교황령의 영향을 받고있엇다.
17 세기에 교황령이 이루어야 할 가장 큰 목표는 '인도로의 진출' 이었다.
인도는 많은 재화와 이국적인 물품들을 산출하는 '황금의 땅' 이었고, 이 지역을 지배하는 것은 교황령에게 많은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었다.
또한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카톨릭의 영역을 대폭적으로 확대하고, 이슬람 세력을 축출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존재했다.
이슬람 세력의 주요 거점중 하나인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에 대한 진출과 완전한 정복 또한 이번 세기에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였다. (그리고 두바이유를 독점하는겁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지배권 확대와 지브롤터 해협 확보 또한 이번 세기에 해결해야 할 중요 문제중 하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랑스 왕국의 붕괴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숙원이었다.
프랑스 왕국을 붕괴시키는데 성공한다면, 방해세력 없이 유럽 대륙에서 완전한 패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지대와 독일 지역은 홀란드와 바바리아, 보헤미아, 브란덴부르크의 4개 국가가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있었고, 어느 국가도 통일 독일을 이루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은 교황령이 바라는 독일의 모습이었다.
이 시기 교황령은 서쪽으로는 이탈리아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페르시아의 서부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고 있었고, 이는 프랑크 왕국보다도 훨씬 거대한 규모였다.
이 시기 교황령은 제국의 행정체계를 교황- 총대주교- 대주교- 주교에 맞도록 개편했다.
의회체계 역시 이에 맞추어 교황령 사부회 (제국 의회 - 성직자. 귀족. 상인. 농민. )와 각 지역의 규모에 맞는 사부회로 편성되었다.
교황이 직접 총대주교를 겸임해 통치하는 이탈리아와 주변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총대주교가 부임되어 행정을 맡았으며 이 총대주교가 행정을 담당하는 권역이 지방 행정의 가장 높은 단계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1600년 당시 존재했던 11개의 총대주교령은 다음과 같았다.
로마 (이탈리아와 그 주변의 도서지역)
베오그라드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 지역)
소피아 (불가리아 지역)
콘스탄티노플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
앙카라 (아나톨리아 중. 동부지역) + 코카서스 지역(임시)
안티오크 (시리아 지역)
알렉산드리아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지역)
예루살렘 (유대 지역)
메카 (아라비아 지역)
바그다드 (메소포타미아 지역)
이스파한 (페르시아 지역)
1600년의 교황령.
첫댓글 로마제국판도를 기대했는데 알렉산더 대왕을 따라가시려나보군요.
그렇게 됫어요 ㅠㅠ, 유럽은 그다지 CB도 없고-. 로마제국 판도 만들면 종교 영역으로 볼때는 손해니까요.ㅋ 어차피 대부분 카톨릭인데 . 차라리 이교쪽 땅을 개종시키는게 교황령 플레이 다운것 같아서 ㅎ; 그리고 인도까지 육로로 진출하면 먹기도 쉽고 영양가도 있고요 ㅎ;
그래봣자 1650년 지나면-. 홀리워가 사라지니 (베스트 팔렌 조약인데! 어찌 홀리워가 사라진단 말입니까!ㅠㅠ) 그때부턴 유럽 지역이나 주물럭 주물럭.
종교의 자유(라고 해봤자 개인이 아닌 국가의 자유지만)를 인정한 조약이라서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긴 한데 이단정화 명분은 게임 끝날때까지 적용되니까요 ㅠㅠ.. 조약 당사국들이 구교. 신교국가들인데. 엉뚱한 이교도를 상대로 한 홀리워는 안먹히고, 이단정화는 먹히니까요;ㄷㄷ
물론 그 이후에도 홀리워 먹히면-;;; 비유럽 지역은 폭풍처럼 쓸려나가버리니-; 무한확장을 막으려는 역설사의 노력인 것 같지만요;
그래도 나중엔 비잔티움은 절대왕정 제국주의 + 공화정 체제변환후 혁명전쟁이 가능하니까요 ㅠㅠ 판도는 비잔티움이 수월하죠;; ㄷㄷ 제노바도 공화독재-제국주의 한다음에 공화국-혁명전쟁 하니까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장악하는게 가능하더군요;ㄷㄷㄷ.
교황령은- 같은 종교면 CB가 리컨퀘스트나 국경충돌. 모욕. 해방-;;; 정도밖에 ㅠ. 해방 빼면 전부 운이고; 해방은 인페미는 똑같으니까요 ㅋ;
프랑스(갈리아 속주),이베리아 점령하셔야죠 이젠 로마제국 재건하세요
프랑스, 이베리아는 분할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ㄷㄷ;; 서로마는 서로마(신성 로마제국)가 알아서 하고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