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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제1독서 : 로마 12,5-16ㄴ
복 음 : 루카 14,15-24
그때에
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17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20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22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23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오늘 지금 여기서의 하느님 나라 잔치
-초대 받은 우리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평생 화두였습니다.
예수님은 늘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사셨습니다.
언젠가 그 날이 아닌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할 하느님 나라의 잔치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살지 못합니다.
가을 막바지의 단풍 물든 주위 환경이 참 아름답습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 나라의 축제 잔치요 이 잔치에 초대 받은 우리들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죽을 때까지 하느님 나라 축제 잔치에 초대 받는 우리들입니다.
제 행복기도문 내용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어제 병원진료 차 외출하여 약을 받아오다 아름다운 가을 분위기를 만끽하면서
불현 듯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요,
이 하느님의 나라 잔치에 초대 받았다는 깨달음에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순간 다짐했던 말마디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은총으로, 덤으로 사는 인생, 약 먹으면서 죄짓지 말아야지!
이제 남은 인생 분산시키거나 낭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아껴 본질적인 것에 집중해야겠다!”
오늘 복음의 세 부류의 사람들은 우선순위의 분별에 실패하여 하느님 나라 잔치에 초대를 거부했습니다.
사연이 구구합니다.
‘내가 밭을 샀는데---’, ‘내가 겨릿소 다섯 마리를 샀는데---’, ‘나는 방금 장가들었기에---’
모두 현실적 일에 몰두하다 보니 분별력을 잃고 참 좋은 하느님 나라 잔치에 초대가 좌절되었습니다.
하느님 탓이 아닌 각자의 탓입니다.
오늘날 바쁘게 사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모두에게 은총의 선물로 주어지는 하루하루의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은 물론이고 어떻게 해서든 많은 이들이 가득차길 바라시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가 펼쳐지는 매일의 삶입니다.
초대의 거부가 아니라 이미 초대 받은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내는 우리가 문제입니다.
하느님 나라 삶의 잔치에 초대 받았으면서도 잔치의 고마움, 놀라움, 새로움, 기쁨을 까맣게 잊고
무기력, 무의욕, 무감각하게 지내는 우리들이 문제입니다.
초대를 받았어도 깨어 있지 못하기에 하느님 나라 잔치를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아, 오늘 지금 여기 눈만 열리면 새롭고, 놀랍고, 고마운 하느님 나라의 황홀한 잔치가 펼쳐지는 삶의 자리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루하루가 함께 누려야 할 하느님 나라 잔치의 날임을 깨닫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아름답고 좋은 하느님 나라 같아도 혼자의 고립단절이라면 분명 지옥입니다.
외적 경치나 환경이 좋아서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되고 각자의 은사에 충실하며 함께 살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 형제들이 함께 지켜야 할 수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라 우리 삶을 성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꼭 항목별로 체크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2.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3. 형제애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4.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5.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6.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7. 박해하는 자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8.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9. 서로 뜻을 같이 하십시오.
10.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그대로 하느님의 나라 잔치에 초대 받은 우리 모두가 필히 지켜야 할 수칙이자 수행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하느님 나라 미사 잔치의 초대에 응답한 우리 모두에게 한량없는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나이다.
제 눈은 높지도 않사옵니다.
감히 거창한 것을 따르지도, 분에 넘치는 것을 찾지도 않나이다.(시편131,1)---
주님, 제 영혼을 당신 평화로 지켜 주소서.”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한 형제님께서 실직의 아픔을 이야기하십니다.
가정 상황이 좋지 않은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실직까지 해서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서 자신을 ‘실패자’라고 단정을 짓고 있더군요.
이런 신세 한탄만으로 무엇이 바뀔까요? 그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변화는 위험하고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서 시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어려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가장 최근의 일인 실직을 왜 했는지를 떠올려 봤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회사에서는 어떻게 해야 필요한 사람으로 일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실직했다는 것 자체에만 머물러 있다 보니 스스로 ‘실패자’라고 단정 지으면서
이 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티븐 잡스도 자기가 창업한 회사에서 해고되었고,
에이브러햄 링컨은 대통령이라는 딱 한 번의 성공이 있기까지
자그마치 27번을 실패라고 할 수 있는 낙선을 맛보았습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어떨까요?
스스로 ‘실패자’라고 규정지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통해서는 다시금 일어날 힘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극복한 사람은 다음 3가지의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1)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한다.
2) 역경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
3)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단정하면서 포기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혼인 잔치의 비유를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합니다.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를 대면서 양해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혼인 잔치는 기쁨의 자리이고 행복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상황만 앞세우면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앞서 자신의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주님께서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더 큰 선물을 주시려고 하는데,
스스로 단정 지으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질책하면서 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단순한 마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웃으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이리로 데려오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살아가면서 닥치는 일에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누구의 초대를 받았는데 사정이 생기면 양해를 구하고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맞습니다.
밭을 샀으면 밭에 나가보는 것이 당연하고 겨릿소를 샀다면
그 소를 잘 샀는지 부려보는 것도 자연스런 일입니다.
더군다나 방금 결혼을 했다면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은 인정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가야 할 잔치집이 생겼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이 준비 되었습니다. 그 잔치에 초대 받은 것이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그 앞에서 무슨 핑계가 필요합니까?
더 좋은 것, 지금까지 갈망하던 하느님나라가 눈앞에 주어졌는데 왜 망설여야 합니까?
결국 지금까지 기다리고 희망하던 것은 헛된 환상이었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세상 것이 더 좋은데 그것을 어떻게 놓고 가라 하십니까?
그러나 “나 없이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도 나 없이 나를 구원하실 수 없으십니다.”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결코 모든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저러한 핑계를 갖는 한, 구원의 잔치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우선인지를 잘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먼저 선택하면 나머지는 다 채워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사로운 정 때문에 인간적인 것을 택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14,24).
결국 처음 초대 받았던 사람들은 재산과 사업상의 관계, 결혼이라는 핑계거리로 말미암아
구원의 문에서 멀어졌습니다.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대를 외면하였습니다.
오히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좋아했습니다.
그야말로 배가 부르면 산해진미가 귀찮고 배고프면 보리죽이 꿀맛입니다.
그런데 헛배가 불러서 스스로 배부르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있어서 걱정입니다.
스스로 배부른 착각에 빠져 죽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데려 오너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초대에 응답해야 할 사람입니다.
뿌려진 씨앗의 비유(마태13,1-9)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씨앗이 어떤 것은 길바닥에, 어떤 것은 돌밭에, 그리고 가시덤불에,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은 것은 당연히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밭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길바닥 같은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무관심한 사람이지요, 그리고 돌밭은 흙이 얼마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시련 어려움이 오면 금방 신앙이 죽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가시덤불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핑계를 대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저런 핑계대지 말고 매순간 하느님 앞에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하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안녕을 열망하며 그것을 너무 많이 고려하다가 그만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맙니다.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돌다리를 두드려보다가 오히려 돌을 깨뜨리고 만다고’.
잔머리 굴려 계산하지 말고 하느님을 꼭 잡으시기 바랍니다.
함께 모여야 할 자리를 기억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마음이 없으면 방법이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
제가 아는 김 베드로란 선교사님은 세례 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주일미사를 한 번도 빠져본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세례 때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당신은 가지라는 말씀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으니
적어도 주일미사는 거르지 말아야한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주일미사를 빠지지 않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그분은 여행사 사장님이었습니다.
외국에서 지내는 날이 더 많으신 분입니다.
성지순례를 위한 여행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매번 주일마다 빠져나와서
성당을 찾아 미사를 해야 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노고가 아니었습니다.
한 번은 러시아에 가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 가톨릭교회를 찾는다는 것은 모래 속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차로 4시간 이상 되는 도시로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여행 온 분들 중에 냉담하던 한 자매도 함께 동반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말을 하지 못하기에 무조건 묵주에 달린 십자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게 10번 정도 묻고 나니 가톨릭교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냉담하던 자매를 말도 안 통하는데 무작정 고해성사를 보게 하였습니다.
불가능은 없었습니다. 그 자매는 여행 내내 눈물을 흘리며 큰 회개의 은총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여행한다고, 바쁘다고 주일미사에 빠지는 것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또 선교할 기회가 없어서 하지 못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십니다.
그분은 술도 안 드시지만 술자리가 있으면 술집 사장님도 불러서 성당 다니라고 권면을 합니다.
그렇게 실제로 술집 사장님이 세례를 받고 술장사를 접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 앞에서 핑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마음만 있다면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잘 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성당과 미사시간을 찾아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 때 주일미사를 빠졌다는 고해를 너무 자주 듣습니다.
미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혼인잔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혼인잔치 식탁에 앉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유태인들입니다.
그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주님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하느님은 아드님의 혼인잔치를 성대하게 치르고 싶었습니다. 그
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고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미사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결혼했는데 집에 들어오는 것을 두 번째로 여기고 여기저기서 자고 다닌다면
집에서 기다리는 배우자의 마음이 어떨까요?
이 세상에서의 혼인잔치에도 참여할 마음이 없다면 저 세상의 혼인잔치에도 참여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그 자리를 다른 사람들로 채울 것입니다.
미사의 중요성에 대한 마음을 가집시다.
마음이 없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이 말은 마음만 있다면 주님께서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미사에 참여할 방법을 마련해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핑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꽃동네 영성원’엘 다녀왔습니다.
가는 길이 4시간이고 오는 길이 3시간이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길이었고, 초행길이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수녀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에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분이 많다는 걸 새삼 알았습니다.
영성원은 별장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아무 조건 없이 기증한 부부의 도움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영성원을 위해서 봉사하는 분을 보았습니다.
수녀님께서 따뜻한 차를 한잔 드렸는데, 봉사자는 그 마음을 보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수녀님의 헌신과 노력을 보았습니다.
2시간씩 걸리는 길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신다고 합니다.
영성원 마당을 치우고, 영성원 식사를 준비하고, 영성원 방과 경당을 꾸미는 분은 모두 봉사자였습니다.
힘들 법도 한데 그분들의 눈망울은 모두 천국에 있는 사람처럼 맑고, 향기로웠습니다.
한 자매님이 남편의 유언을 들려주었습니다.
투병 중인 남편은 아내에게 이렇게 유언하였다고 합니다.
“전 재산은 수도원과 수녀원에 기부하세요.
남은 시간은 봉사하면서 지내세요. 나도 천국에서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남편은 장기기증도 하였다고 합니다. 남편의 유언을 전하기 위해서 자녀들을 불렀다고 합니다.
혹시 자녀들이 서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모두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다른 자매님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두 가지를 이야기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는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며느리가 자랑스럽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시어머니의 전 재산을 학교에 기증하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재산을 조금만 남겨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잠시 있었지만,
가족들 모두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학교에 기쁜 마음으로 기부하였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는 사람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잔칫상에 모이는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 뜻을 같이하고 서로서로 지체로 살아야 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잘 사용하여 주님을 섬기고,
오만한 생각을 버리며 비천한 이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며, 형제애로 서로 아끼고 서로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고 희망 속에서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런 이들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그분 잔칫상의 음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비가 내리는 초행길이라 가을 단풍을 감상하지는 못했지만,
하느님을 따르는 아름다운 마음을 보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겁니다.
이분들의 순수함과 따뜻함을 평화신문을 통해서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분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사랑의 지체입니다.
이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이미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은 사람입니다.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루아 수녀
오늘 복음은 루카 14장 안의 내용입니다.
14장을 시작하며 루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사람의 초대로
그의 집에 예수님이 방문하셔서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뿐만 아니라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이 꽤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 바로 이전의 내용은 잔치에 부유한 이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를 초대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어떤 이가 "하늘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이는 행복합니다."하고 말합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라 하시지만,
하늘나라에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이 초대되리라 생각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은 그를 깨우쳐주려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보면 예수님의 비유에서
주인은 '어떻게 해서라도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하고 말합니다.
주인에게 중요한 것은 초대받은 이가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많은 이들이 잔치에 초대받아 기쁨을 누리고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께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부차의 문제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해 잔치를 찾아온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마음을 지니지 못하고 늘 구분 짓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같아지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분의 잔치에서 음식을 맛볼 수 있길 기도합니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